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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Aug 29. 2022

두 달간 유럽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전 11시에 로마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이틀을 지내고, 남쪽으로 내려가 나폴리에서 3박을 하고서,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들어가서 한달을 지낼 계획이다. 비행기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해서 머리가 무거웠다.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이번 숙소는 트레스테베레 Trastevere에 있다. 역에서 내려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큰 캐리어를 하나씩 들고 있는 우리는 택시를 탈까 잠깐 고민하다 그냥 걷기로 했다. 피곤한 몸으로 울퉁불퉁한 자갈이 깔린 길을 걸으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역시 여행을 잘하는데 필요한 건, 모험심이나 용감함이 아니라 불편함을 감수하는 능력이다. 아무리 계획을 잘해도, 늘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여행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잘도 이렇게 여행을 베이스 삼아 인생을 살고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Booking.com을 통해 구한 이번 숙소는 집 전체를 비앤비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세 개의 방이 있고, 각 방마다 화장실/샤워실과 발코니가 있었다. 로베르또라는 이름의 집주인은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는데, 이 집은 부모님 소유인데 자신이 개조해서 비앤비로 운영한다고 했다. 서글서글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사람이었다. 우리 짐을 보더니, 짐이 많네요- 하며, 집에서 가장 큰 방을 내주었다. 들어가자마자 탁 트인 뷰를 가진 발코니를 보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 순간, 장시간 탄 비행기의 여독도 다 사라지는 느낌이다.



첫 일정은 언제나처럼 커피와 코르넷또 cornetto(이탈리아 크로아상). 집주인 로베르또가 추천해준 바 Bar로 갔다. (이탈리아에서 커피숍은 바 라고 불린다. 페이스트리와 커피, 아페르티보/칵테일도 함께 판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일상의 중심에는 집 앞에 있는 바가 있어서,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들러 커피와 코르넷또를 먹고, 오후의 아페르티보 시간이 되면 저녁을 먹기 전 친구들과 간단히 술 한잔을 하고 집에 들어간다. 그러니 새로운 동네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동네 바에 가서 사람들 구경을 하는 일이 첫걸음인 셈이다.



로마에서는 별거하지 않고 좋아하는 산책로를 걷고, 그리웠던 커피숍과 레스토랑을 가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다시 말해, 했던거 또 하는 여행. 새로운 걸 경험하는 여행도 좋지만, 갔던 데 또 가고, 했던 거 또 하는 여행의 매력도 있다.



긴 산책을 했다. 트레스테베레 Trastevere를 가로질러 걷다가 언덕을 따라 걸었다.


티베르 강에 다다랐다. 아, 여기가 로마지-라고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한참을 넋 놓고 구경하다가 근처에서 젤라또를 먹고(감동을 하고), 또 걸었다. 걷다가 BTS의 사진이 문 앞에 도배가 되어있는 바를 발견했다. (왜일까?)



스페니쉬 계단에 도착하니,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차원의 거대한 관광객 무리를 만났다.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대 전차 경기장인 Circus maximus에서 잔디밭에 누워있는 걸 좋아한다. 그늘 아래 잔디에 누워 한참을 눈을 감고 로마의 공기를 음미하고, 도시의 소음을 들었다.



한때 로마를 그저 그런 관광지로 넘겨짚고, 여행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패키지 관광객들로 가득한 곳, 몇천 년 전에 죽어버린 것들의 도시. 로맨틱한 도시라는 이미지는 관광상품처럼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로마의 진짜 매력은 역사나 유적을 넘어서, 감각적인 경험에 있다. 필터를 거친듯한 따스한 색감이 눈앞에 펼쳐지고, 서늘하다가 따스하다가를 반복하는 바람이 살갗에 닿고, 발길이 닿는 어디를 가더라도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입안 가득 맛있는 음식으로 행복감을 충전할 수 있다. 동시에, 이 도시는 어쩐지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영혼이 맴도는 듯한 어스름한 기운이 감돌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럽에서 3년을 지내며 쓴 에세이 <먼 북소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로마는 무수히 많은 죽음을 흡수한 도시이다. 로마는 모든 시대의 모든 형태의 죽음에서 가득 차 있다. 시저의 죽음에서 검투사의 죽음까지. 영웅의 죽음에서 선교자의 죽음까지. 로마사는 죽음에 대한 묘사로 넘쳐나고 있다.

원로원 의원은 명예로운 죽음을 선고 받으면 우선 자기 집에서 성대한 술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실컷 먹고 마시고 난 후 천천히 혈관을 가르고 철학을 논하면서 죽어갔다. 가난하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시체는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칼리굴라는 철학자라는 철학자를 모조리 처형했고 네로는 그리스도 교도를 사자의 먹이로 만들었다.


이런 역사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나면, 인생 사는 거 뭐 있나. 배부르고 등 따숩고, 그거면 되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첫 번째 저녁은 카쵸 에 페페 Cacio e pepe로 정했다. 전채로는 구운 제철 야채, 그리고 하우스 와인을 주문했다.



젠장, 맛이 없다. 짜고, 느끼했다. 원래 짜고 느끼한 음식이지만, 맛있게 짜고 느끼해야 했다. 뭐, 오늘 셰프가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갑자기 메인 셰프가 아파서, 아직 실력이 영글지 못한 보조셰프가 음식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징크스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나에게는 ‘새로운 도시에서 가는 첫 번째 레스토랑은 반드시 실패한다.’라는 징크스가 있다. 아쉽게도, 어쩐지 늘 그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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