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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Sep 28. 2022

일상과 여행 그 가운데 어디쯤

시칠리아 한달살기, 열일곱 번째 날


아침부터 뭔가 제대로 안 흘러가는 느낌이다. 에너지도 별로 없고, 머리도 좀 멍하고, 어깨도 결리고, 일도 잘 안 풀리고, 커피를 마시고 나니 속이 쓰렸고, 가벼운 점심을 먹으려고 샐러드 가게에 갔는데, 소스가 헤비하고 간이 세서 실망스러웠고, 새로 찾아간 카페는 일하기 좋은 환경일 줄 알았는데, 뭔가 눈치 보게 되는 그런 분위기였고. 한마디로 마음에 먹구름이 끼고 그런 날이다.


일상이라는 건, 이렇게 신이 나지 않고 하루가 기대되지 않는 날에도 묵묵히 살아가는 것임을 되새긴다. 그렇다고 없던 신이 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상할 것 없다고,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하루의 시작은 지리멸렬했으나, 더 나아질 수도 있다.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그것이 그냥 일상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같은 골목에 사는 아주머니 두 분이 창문 너머로 수다 삼매경 중이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대화를 멈추고 환하게 웃으며 “부에노 세라 (좋은 저녁 되세요)”를 외쳐주었다. 우리도 부에노 세라 하고 답했다. 아주머니들은 곧 다시 수다로 돌아갔다.


문득 시칠리아스러운 저녁의 풍경 속에 내가 조금 스며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니 새삼 시칠리아스러움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색색깔 널린 빨래, 칠이 벗겨진 건물벽, 따스한 햇살, 열정적으로 토론하며 걷는 사람들, 왠지 정겨운 이탈리아어, 창문으로 밖을 한참을 내다보는 할머니, 눈이 마주치면 정색하는 고양이, 마구 속도를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 초소형차가 좁을 골목을 비집고 달리는 광경, 아주 멋지게 빼입은 할아버지,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 언니들, 마치 이제 마지막 키스라는 선고를 받은 것처럼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연인, 코끝에 스치는 시트러스 향.



치앙마이를 제외하고 이렇게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르는 여행은 처음이다. 여행이 길어지면 매 순간 너무 좋다,하고 감탄하는 일은 줄어든다. 아주 낯설지는 않지만, 또 익숙하지는 않은 데서 오는 애매함이 싫을 때도 있다.


삶이 익숙한 것으로만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그 단조로움의 무게를 견딜 수 없고, 삶이 낯선 것들로만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그 생경함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그렇다면 여행과 삶이 별반 다를 게 없기도 하다. 둘 다 적당한 변화와 적당한 안정을 추구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삶은 여행이고, 여행 또한 삶이다. 그래서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보내려고 한다.

최민석 <기차와 생맥주>


조바심일지도 모른다. 내가 읽어야 할 책은 다 읽고 있는지, 내가 먹어야 할 음식들은 다 먹고 있는지, 이탈리아어를 더 잘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쓸 기회는 많이 없고, 글은 충분히 쓰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 들을 다 알게 되고, 느껴야 할 것들을 다 얻어가고 있는지, 조바심이 난다.


별거 안 한 것 같은데 벌써 여행의 반이 넘어가면서 그랬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면 될 수 있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들에 나는 여전히 가까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오르티지아로 가는 길도 헤매고, 식당에서 이탈리아어로 주문하는 일도 늘 긴장되고, 다 서툴다. 무엇보다도 나는 집에서의 나와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궁극적으로 나는 조금 다르게 느끼고 달라지기를 바랐던 걸까.


다음날 아침, 곤히 잠든 남편을 두고 조용히 거실로 나와, 따스한 노란빛 햇살로 환하게 밝혀진 거실에서 아침을 깨울 음악을 틀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일기를 쓴다. 8시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 집에서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경쾌한 옥타브의 새소리. 고요하고 평화롭다.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따스한 햇볕을 맞고 있으면, 그런 걱정이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 따스한 햇살을 즐기지 못한다면, 나중에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한들, 내 걱정으로 미래의 나쁜 일이 덜 나빠지는 게 아닐 텐데. 지금은 지금 즐길 수 있는 걸 즐기자, 일어날 일은 내 걱정과는 상관없이 일어나게 되어있으니.라고 굉장히 시칠리아스러운 마인드를 되뇌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돌아보면 매일매일이 ‘와, 행복하다 정말.’ 하고 감탄하는 날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좀 더 가벼웠고, 평온했고, 소소하게 기분이 좋은 날들이었다. 이곳 사람들처럼 걱정 같은 잡생각은 내려두고, 그저 지금 내리쬐는 햇살에 집중하려고 했다.


이런 걸 보면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조금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걱정 대신 지금의 평온을 선택하는 연습. 지금 그걸 하고 있는 거였나 보다.


서툴지만, 매일매일 연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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