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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Sep 30. 2022

흥청거리는 밤이 나에게 말을 걸다

카타니아의 금요일 밤


카타니아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카타니아에서의 하루는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나폴리처럼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과 세련된 아름다움이 공존했다.


도시의 첫인상은 잿빛의 황량함이었다. 도시의 건물들이 에트나 화산에서 나온 잿빛의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중충한 잿빛에 눈이 적응하고 있자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칠리아의 두 번째로 큰 도시답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낡고 지저분한 골목을 따라 걷다보니 웅장한 광장이 나오고, 거기에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 극장이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혼란과 반전의 연속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어서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시에스타 중이었고, 길은 텅 비어있었다. 카타니아의 중심인 두오모 광장을 지나 고즈넉한 골목 끝자락에 있는 한적한 카페에서 오후를 보내기로 했다. 카페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테이블을 잡고 앉아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고 있다. 14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카타니아는 ‘힙’한 도시였다고 한다. 시칠리아의 첫 대학이 이곳에 세워졌고, 이탈리아의 잘 나가는 예술가와 작가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특히, 이곳 출신인 오페라의 거장 벨리니를 만나러 오는 예술가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는 이런 노천카페에서 사람들과 음악에 대해 열정적인 토론을 나누지 않았을까.



5시가 넘어가자 거리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오늘 읽은 책에서는 카타니아의 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카타니아는 뜨거운 남지중해의 대도시답게 먹거리나 이벤트, 밤의 문화가 아주 발달해있다. 환락과 오락이라면 유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고 한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우니베르시타 광장을 지나 마시모 극장 광장까지 흥청거리는 남부 이탈리아의 정취가 가득해진다.

<이탈리아 남부 기행> 민혜련


6시가 가까워오자 우리가 있던 카페는 밤이 되어 바 Bar로 변신할 준비를 한다. 음악의 볼륨이 높아지고, 테이블에 Reserved라는 예약 노트가 붙여지기 시작했다. 시라쿠사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저녁을 먹고 가려고 봐 두었던 레스토랑으로 갔다. 오픈하자마자 갔는데도 예약이 꽉 찼다는 비보를 들었다.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니 아페르티보를 시작으로 저녁식사, 그리고 술자리까지, 사람들이 긴 유흥을 즐길 거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자 낮에 텅 비었던 도시가 완전히 살아났다. 마치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거리로 나와있는 것 같다. 음악과 왁자지껄 사람들의 대화 소리, 먹고 마시며 그릇과 잔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모두가 즐겨야 한다는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이곳의 밤은 내가 경험한 한국과 홍콩의 밤과는 달랐다. 굳이 설명하자면, 왁자지껄함의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홍콩에서 직장인이었던 내 금요일 저녁은 한 주를 버텨낸 나를 토닥이는 시간이었다. 와인을 앞에 두고 친구들과 나는 서로 얼마나 힘든 한주를 보냈는지를 자랑하듯 토로했다  - 요새 잠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일은 얼마나 버거웠는지, 옆자리 동료는 얼마나 성가신지 등등. 그래서 우리의 금요일 저녁은 달면서도, 끝에 쓴 맛이 났다. 이런 밤이 오면 홍콩의 밤거리 란콰이펑에는 거하게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나의 금요일 저녁은 그저 순수한 즐거움만은 아니었다. 지나간 한 주의 피로와 다가올 월요일에 대한 두려움이 흥건히 취한 사람들의 얼굴에 비쳤다. 그와 반대로 이곳의 금요일 저녁은, 왠지 가벼워 보인다. 순수한 즐거움이 사람들의 중심에 있다. 고되었던 지난 한 주에 질척대지도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다음 주 월요일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웃고, 소리 높여 떠들어대고, 맛있는 것을 먹고, 음악을 목청껏 따라 부른다.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몸사위는 지금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카타니아는 천재지변으로 도시가 몇 번이고 사라져 버린 경험을 한 도시이다. 1169년 기록적인 대지진이 있었고, 1669년 에트나 화산 분출로 용암이 주변 도시를 덮어버렸고, 1693년 시칠리아 전역을 휩쓴 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져 쑥대밭이 되었다. 이 사실보다 더 인상적인 건, 이런 재해로 도시가 파괴되었다가도 11번 이상 재건되었다는 사실이다. 카타니아의 가리발디 문에는 이렇게 새겨져있다고 한다.


“나는 나의 재로부터 더욱 아름답게 부활한다. Melior de cinere surgo.”


이들은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아질 뿐”이라는 사실을 배우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앞에 주어진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 것뿐이라고 믿는 것 같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몰입도 있는 시간을 즐기는 이들의 밤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기차 시간이 다 되어서 아쉽게도 일어나야 했지만, 이 밤의 여흥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복잡하게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을 즐겨. 라고 하는 것 같았던 그들의 밤에 물들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가벼웠다. 인생이란 단순하고 유쾌하며 너그러운 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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