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번째 날
이제 딱 1주 남았다. 이곳에서의 시간. 한편으로는 그때가 되면 떠날 준비가 되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는 것도 좋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기를 떠난다는 게 쉽지가 않다.
오늘 오후, 신호등이 없는 도로를 건너려다 쌩쌩 달리는 차들 앞에서 쉽게 못 건너고 있는데, 건너편 길에서 차를 대놓고 안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차에서 내려 도로 중간으로 걸어가더니 차들을 막아 세우고, 우리들에게 손짓을 하며 건너가라고 한다. ‘그라찌에’라고 인사를 했는데 아저씨는 별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차로 돌아간다. 이곳에는 별일 아닌듯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다.
첫 수영을 했다. 물에 들어가기엔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 늘 와서 앉아 있기만 하다가 오늘은 용기를 냈다. 물에 몸을 담그고서 첫 2-3분은 오들오들 추웠는데, 곧 적응이 되고 그다음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밖에서 물에 떠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편해 보이는데, 막상 물 안에 들어오면 그게 보이는 것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바다 수영은 계속해서 변화해서 들어오는 파도에 적절하게 헤엄을 쳐야 가라앉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쉬지 않고 팔과 다리를 휘저어야 한다. 그냥 수면 위에 떠있는 일이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이라니. 사는 거랑 비슷하다 싶었다. 남들 보기에는 그냥 별거 안하고 사는것 같은 사람들도 그저 평범하고 별일 없이 살기 위해서는, 물속에서 손발을 계속해서 휘젓는 것 같은, 그런 사소하지만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루지 않은 삶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스물일곱 번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풍경
좁은 골목골목을 지나 집에 가까워져서 오면 집 앞 플라자의 큰 나무들이 보인다.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동네 스리랑카 청년들이 크리켓을 하고 있다. (우리 동네에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 크리켓이란 공을 배트로 쳐서 득점을 내고 이런 류의 게임인데,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는지 공을 이쪽 저쪽으로 보내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재밌다. 오렌지 빛 노을이 지고 있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오고, 두 개 골목 전에 지나쳤던 차에서 음악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크리켓에 매진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면, 이제 곧 집에 도착한다.
벌써 이곳이 집처럼 느껴진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 익숙해지고, 안락함을 느낀다. 하루의 끝에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공간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우리가 새삼 신기하다.
스물여덟 번째 날
며칠 남지 않은 시간, 해야 할 일들을 목록을 쓰다가 그냥 다 지워버렸다. 지금, 남은 시간을 가장 잘 보내는 일은 그저 순간에 나를 맡기는 것. 그리고 거기서 느낀 경험을 매일 기록하는 것이다.
그 외엔 좀 못해도 된다. 루스하게 그냥 두어도 어찌어찌 흘러갈 것이다.
걸어오는 길에 한 커플이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는 춤을 추고 있었다. 이탈리아 노래 같기도 하고 스리랑카 노래 같기도 한 애절한 맛이 있는 음악이었다.
스물아홉 번째 날, 동네 카페 스케치
클래식 이탈리아 영화에 나오는 멋진 여성들처럼 한껏 머리를 부풀리고, 짙은 화장에 멀리서도 향수 향이 날 것 같은 멋쟁이 아주머니들과 마치 집 앞 편의점에 나온 듯 편안한 차림의 동네 주민들이 공존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누구든 편하게 앉아서 쉬어 간다.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뽐내는 자리이면서, 동네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가십을 주고받고, 나처럼 길을 잃은 여행자도 앉아 구경을 한다. 그게 이 동네의 매력이다.
서른 번째 날, 마지막 밤
발단은 그저, 해변으로 가는 길에 어느 골목으로 갈 것인가에서 시작되었다.
나: “내가 이쪽으로 가자, 했는데 왜 대답도 안하고 다른 쪽으로 가는 거야?”
남편: “아니 별 것도 아닌 걸로 왜 언성을 높이고 그래?”
‘별 것도 아닌 걸로’라는 말에 나는 더 화가 나서, 세상에 별것도 아닌 것이 어딨냐고, 너의 행동으로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면 그건 별거가 되는 거 아니냐고. 미안하다 인정하고 풀어야지, 왜 그렇게 말을 하냐, 로 시작해서 우리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평소의 나라면 웃고 넘겼을 일, 너 죽을래? 하고 장난치고 말았을 일에 뭔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럴려고 한건 아니지만, 그땐 화가 났고 그런 때에는 상대방의 말과 의도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여유가 없어진다. 그러니 내가 인간이지, 아니면 성인이겠지.
한참을 날카롭고 서늘한 말이 오가다가 냉전에 들어갔다.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채로 해변에 도착했다.
서로 말도 안하고 각자 수영을 하러 물에 들어갔다. 나는 쭈뼛쭈뼛 해변을 가로질러 모래사장에서 걸어 물로 들어갔고, 그는 근처 방파제에서 다이빙을 해서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수영을 시작해서 나보다 먼저 깊은 곳으로 가고,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천천히 몸이 차가운 물에 적응하도록 기다렸다가 입수했다. 처음 30초는 놀랄 만큼 차갑지만, 곧 적응이 된다. 물속에서 시원한 물과 따뜻한 물의 흐름이 교차하며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싼다. 젠틀한 물의 흐름을 느끼며 서서히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편안해졌다. 긴장되었던 몸의 근육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엄쳐서 바다 깊이 들어갔다. 물 위에 떠서 바다를 등지고 해변을 보고 있자니 해변에 있는 사람들이 작게 보이고, 그 뒤로 도로의 차들도 작아졌다. 덩달아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삶도 작아 보이고, 우리의 다툼도 작게 느껴졌다. 그러게, 우리는 모두 그저 작고 미미한 존재들인데, 그 안에서 니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기를 쓰고 따질게 뭐람. 꿍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우리는 왜 이 평화로운 물처럼 잔잔하게 살지 못하나.
영차영차 수영을 해서 그가 있는 곳까지 닿았다. 미안해. 우리 화해하자, 했더니 그는 벌써 웃고 있다. 아마 바닷속에서 그도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우리는 함께 헤엄을 쳐서 더 멀리까지 갔다. 마음에 잔잔함이 찾아왔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