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음 여행지
에어비앤비 숙소: 120만원
장보기: 35만원
식비(레스토랑, 와인바, 커피와 젤라또): 80만원
근교 여행 (버스와 기차, 투어비): 35만원
심카드: 5만원 *2개 : 10만원
소소한 잡비 및 쇼핑: 20만원
총 한달 생활비 : 300만원
굳이 돈을 아끼려고 한 것은 아니고, 버짓을 정해둔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생활비가 비싸지 않았다. 무엇보다 먹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저렴했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교통비가 들지 않았다.
심플한 삶이었던 만큼 돈을 쓴 곳도 심플하다. 숙소를 제외하고 큰 소비는 장보기와 식비, 몇 번의 근교 여행 정도가 다였다. 평소의 소비패턴과 비교를 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의 일상에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돈을 들이는 것들 - 좋은 레스토랑에 가기, 쇼핑, 바/술집 - 이 훨씬 덜 하거나, 저렴하게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집에서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생활의 퀄리티가 높았다. 싸고 질 좋은 식재료로 먹는 즐거움이 무엇보다 컸다. 아침마다 환상적인 1유로 커피 한잔에 베이커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시장에서 2-3 유로면 싱싱하고 맛있는 복숭아를 한 봉지 가득 살 수 있었다. 저녁은 장본 걸로 간단하게 파스타를 만들어 먹거나, 종종은 해변 방파제에 앉아 노을을 보며 와인과 아란치니(튀긴 라이스볼)를 먹었다.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식사하고 싶을 땐 우리가 좋아하는 동네 맛집에 가서 애피타이저에, 해산물 파스타, 와인까지 먹고도 40유로가 넘지 않았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것들은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 해변에서의 달리기, 오르티지아 브릿지를 바라보며 젤라또 먹기, 이웃 아줌마들과의 유쾌한 대화, 동네 책방 구경하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종일 걸어 다니며 동네 탐험하기, 아무리 봐도 지겨워지지 않는 사람들 구경 (열정적인 대화, 몸짓과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들), 해변 앞 와인바에서 밤늦도록 나누었던 우리의 대화 같은 것들이었다.
돈을 들이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이 많았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것들은 저렴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자주 생각했다. 이곳의 무엇이, 우리의 일상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했을까.
일반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곳 시라쿠사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을지언정, 소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공들여 잘 쉬고, 잘 즐기는 리추얼이 있었다. 아침에는 일터에 가기 전, 동네 바에서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커피에 아침을 먹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페르티보로 간단하게 한잔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졌다. 금요일 밤이 되면 '라 벨라 피구라 La Bella Figura'(아름다운 형태라는 이탈리아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적인 삶의 태도에 가깝다)가 절정을 이루는데, 동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멋있게 갖춰 입고, 뽐내듯 치장을 하고, 밤이 늦도록 술과 음악과 대화를 즐겼다.
어쩌면, 언젠가 돈으로 풍요로워질 삶을 기다리기보다, 돈이 많든 적든 지금 그 안에서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즐기며 사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당연한 듯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었다. 길을 헤매고 있으면 언제나 누군가가 다가와서 도와주었다. 동네 바에서 아침을 먹고 5.6유로가 나오면 주인아저씨는 자꾸만 5유로만 내라고 했다. 유명한 샌드위치 집에서 이탈리아어로 된 메뉴를 보며 주문을 하려는데, 주인아저씨가 나와서는 진열대 안에 있는 수많은 햄과 치즈 종류를 하나씩 가져와서 보여주면서 메뉴를 설명해주었고, 그래서 내 뒤에 줄 서있던 열댓 명의 손님들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이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고서야, 이 경험이 지금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지쳐있던 마음에 위로 같은 시간이었다. 한 세기 전에도 이렇게 살았을 것 같은 오래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그랬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호기심이 살아 있는 선량한 눈빛의 사람들. 이 따스함에 나는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의 한 달이 마음의 휴식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왠지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내 그대로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시칠리아에는 내가 상상하던 시칠리아 대신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도대체 뭘까? 내 마음을 이토록 잡아끄는 그것은 무엇일까? 시칠리아에서, 그리고 그 곳을 떠나와서도 나는 가끔 그것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칠리아에서 찍어온 화면들이 방영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우리는 한 달간 시칠리아의 삶에 스며들어 느리게 살았다. 우리는 이곳의 삶의 방식이 좋았고, 그래서 지중해 바람과 햇살이 있는 곳에서의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다음 여행지는 그리스의 섬, 크레타로 정했다. 그렇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가 사는 곳. 크레타에서 일주일을 머물기로 했다. 그곳에서라면 지금처럼 잘 먹고, 느리게 걷고, 수영을 하며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로 예정되었던 여행은 결국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서, 총 3주를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 떠나야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크레타에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었고, 소박하고 맛있는 음식과 와인, 아름다운 바다가 우리를 자꾸만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다음 편에서 <우리 여기서 살까 - 그리스>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