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가려고 1층에 내려오니 오늘도 어김없이 산야가 큰 빗자루로 콘도 주변을 쓸고 있고, 그의 5살 된 딸 툭툰이 아빠 주변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나를 보자 툭툰은 쪼르르 달려와서는 “레드, 핑크, 그린!”을 외친다. 내가 의아해하자 산야가 웃으며 “얘가 요즘 유튜브로 영어를 배우고 있어서”라고 한다. 나는 마구 기특해하며, 툭툰을 번쩍 안아 들고는 주변을 돌면서 다른 색들도 알려주었다.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툭툰의 똘망똘망한 눈이 참 예쁘다.
산야는 콘도의 청소부이고 그와 그의 가족은 미얀마 국경 지역의 샨족 출신이다. 고산지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점점 살기가 어려워져서 치앙마이로 왔다고 했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처음 치앙마이에 정착했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처음에 치앙마이에 왔을 때 아내가 둘째를 임신 중이었고, 혼자서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낮에는 아파트의 청소원으로, 밤이 되면 다른 콘도의 밤 근무 경비원으로 일 하면서 말 그대로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근무를 했다. 잠을 안 자고 어떻게 살 수가 있었냐고 묻자, 나이트 근무 중에는 대부분 별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앉아서 쪽잠을 잘 수가 있었다고,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면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했다. 밤 근무가 끝나면 1시간 정도의 짬이 나서 집에 가서 씻고, 잠깐 누웠다가 다시 출근을 하는 일상이었다.
1년 정도 그렇게 생활했는데 출산 후에는 아내도 일을 구하게 되어서 지금은 낮 근무만 하고 있다면서, 삶이 다시 사바이사바이 해졌다며 활짝 웃는다.
아직 유치원을 가지 않는 툭툰은 자주 아빠 일터에 따라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들에 더 좋은 삶을 주고 싶어서 아빠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직은 모를테지.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툭툰은 수영장 청소를 하는 아빠를 따라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줍고 있다. 그런 딸을 보며 산야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지난 주에 서점에서 샀던 방콕을 배경으로 한 소설책인 Comrade Aeon’s Field Guide to Bangkok을 다 읽었다. 이 작가의 전작인 Finding George Orwell in Burma (오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버마에 대해 쓴 논픽션)을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방콕에 대해서 소설로 썼다고해서 당장 사서 읽었다.
이 책은 겉에서 보기에 평온해보이는 태국사회가 1992년 블랙메이 Black May와 같은 사회적 트라우마를 어떻게 품고 살아가는지, 사회가 안고 있는 상처가 서로 관계가 없어보이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빠통코 장사하는 아줌마, 외국계 주재원의 영국인 와이프, 슬럼에 사는 사람들, 하이소 고위층 비즈니스맨, 태국국민 여배우 - 이 모든 사람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블랙메이(พฤษภาทมิฬ)는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과 닮아 있는데, 1992년에 태국 군사독재에 대항해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군사정권이 시위대에 총과 무력으로 대응해서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사상자에 대한 정부의 집계는 50명 사망, 170명 ‘행방불명’이라고 말하고, 시위대의 집계는 이보다 최소 3배이상은 많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대화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방콕에 살아온 한 외국인이 “방콕은 변했어. 불교의 영향으로 그저 자기 위치에 만족하고, 자분지족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더이상 자기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불만을 터트리며 살아가. 이제 방콕은 ‘미소의 도시’가 아니라 불행한 사람들의 도시가 되었어.”라고 하자, 옆에 있던 태국인 주인공은 이렇게 조용히 혼잣말을 한다.
"태국은 언제나 분투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나라였지. 그걸 ‘미소의 나라’로 포장하고 싶었던 건, 그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외국인의 환상일 뿐이었어."
한 나라를 알아간다는 건, 외부인의 시선이라는 렌즈가 아닌, 현지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곳을 보는 일이라는 걸 되새기게 되는 문장이었다. 이 책을 읽고나니 내 마음 속 태국이라는 나라의 음영이 조금 짙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