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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Mar 30. 2023

홍콩의 푸드코트에서 먹는 파인다이닝


처음 ABC키친을 알게 된 건 친구의 생일 파티 때였다. 8명이 모이는 자리였는데, 그중 한 명이 생일파티하기에 좋은 곳이 있다며 이곳을 예약했다. 그리고는 참가자들에게 ‘좋아하는 와인 한 병씩 가져오기'라는 공지를 남겼다.


친구가 예약했다는 식당의 주소를 보니 홍콩섬 셩완에 있는 호커센터였다. 호커센터 hawker centre는 우리나라의 푸드코트 같은 개념인데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이 모여있고, 중간에 공용 테이블이 있어서 사람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시켜와서 먹는 시스템이다. 보통 누들이나 볶음밥 같은 저렴한 홍콩 로컬음식점이 모여있어서, 서민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근사한 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여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 친구가 왜 호커센터에서 파티를 하자고 했을까 의아했다. 도착해 보니 이곳은 내가 본 다른 푸드코트와 달랐다.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어서 그런지, 홍콩 로컬 음식점 외에도 인도 식당, 네팔 식당과 태국 식당까지 다양한 국적의 음식점이 들어와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다국적의 음식점의 끝에는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쓰인 ABC 키친의 가게 간판이 보였다.



가게 앞 테이블에는 마치 프렌치 비스트로를 연상시키는 빨간색과 하얀색 체크무늬의 테이블보가 깔려있고, 테이블마다 와인 잔이 세팅되어 있다. 미리 와있던 친구는 “여기 어때? 너무 재밌고 근사하지 않아?” 라면서, 마치 레스토랑의 마케팅 직원처럼 이곳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프린지 클럽에 있던 레스토랑인 M의 셰프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대중적인 파인다이닝‘을 컨셉으로한 유러피안 레스토랑을 열고 싶어서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북적이는 시장통 같은 푸드코트에서 고상하게 음식을 썰고, 와인을 마신다는 게 먹힐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홍콩과 서양의 만남 같은 색다른 컨셉에 사람들이 열광했고,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했다. 특색 있는 분위기에 더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메인 메뉴가 한화로 3만원-4만원대이다), 무엇보다 와인 콜키지가 무료인 점이 매력이었다.


평일 저녁이었는데도 예약 없이는 자리를 잡기 어려울 만큼 꾸준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듯했다. 예약된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해 준 서버는 가져온 와인이 있는지 묻고, 바로 서빙을 해주셨다. 우리는 자리마다 놓인 오늘의 메뉴를 훑어보았다. 돼지 바비큐 roasted suckling pig와 스테이크가 이곳의 시그니쳐 메뉴이고, 이외에도 생선과 시푸드도 시즌별로 준비가 된다. 우리는 각자 메인 메뉴를 고르고, 다양한 전채요리를 시켜서 셰어 하기로 했다.



음식을 기다리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 가게의 테이블은 대략 열개 정도인데, 주방에는 두 명의 셰프가 분주하게 요리를 하고 있고, 가게 주인인 듯한 남자와 다른 직원 한 명이 홀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 가게의 테이블에는 홍콩식 볶음면을 먹고 있는 홍콩 사람들이 있고, 또 그 옆으로는 외국인 커플이 인도 커리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먹고 있다. 다양한 음식이 경계 없이 뒤섞여 신기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유럽식 테이블 앞에 앉아있다. 곧 빵과 버터가 나오고, 전채요리가 하나씩 나왔다. 생각보다 근사한 프레젠테이션에 놀랐다. 정성 들여 프레젠테이션 한 음식과 좋은 재료를 쓴 것이 눈에 띄었다. 다른 음식들도 다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스캘럽을 가장 맛있게 먹었다.



우리 앞에 놓인 음식은 고상했지만, 우리는 고상한 척할 필요 없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먹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느끼는 긴장이 사라진 캐주얼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코스에 맞게 식기를 제대로 들었는지, 내 포크와 나이프를 어느 방향으로 두어야 하는지, 냅킨을 예쁘게 접어 무릎에 잘 두었는지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음식에 곁들여 각자가 가져온 서로 다른 와인을 맛보았다. 대부분이 유럽 친구들이라 음식과 페어링을 하면서 와인의 취향을 가꾸어왔기 때문인지, 자신의 와인 취향을 잘 설명할 줄 알았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는 디저트까지 먹었다. 식사 내내 서빙해 주시는 직원들은 유머러스했고, 와인 잔이 비기 전에 친절하게(그리고 인심 좋게) 와인을 따라주셨다. 마지막에 디제스티보를 위해 우리가 포트 와인을 가져온 것을 보고는, 와인잔을 바꿔서 작은 포트와인 잔으로 세팅해 주셨다. 세심한 서비스에 너무 고마워서 우리들은 이 귀한 포트와인을 우리끼리만 마실 수 없다며, 직원분들의 잔도 부탁드렸다. 셰프 분들까지 밖에 나와서 다 같이 ‘치어스'를 외치며 함께 식후주를 즐겼다.



그렇게 에이비씨 키친은 우리 그룹의 공식 모임 장소가 되었다. 갈 때마다 우리는 분명 좋은 시간을 보낼 것을 안다. 맛있는 음식과 북적거리고 흥겨운 분위기, 다정한 서비스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음식맛으로만 본다면 일반 파인다이닝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이곳은 우리에게 특별한 다이닝 경험이다. 음식은 혀로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눈과 코, 귀, 촉감까지 오감을 모두 사용하는 경험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또 다음 방문을 고대하고 있다. 몇 번이고 갔던 곳인데도, 매번 신기하고 새롭다. 음식맛뿐만 아니라 그곳의 공기와 복작거리는 소음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그리워 다시 찾게 되는 곳이다.


ABC Kitchen

+852 9278 8227

https://maps.app.goo.gl/TrhjUoKqJcB3UjWA6?g_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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