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요양기>, <코쿤카!>, <나 혼자 발리>
여행의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는 여행 에세이도 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다채로운 풍경묘사와 여행의 꿀팁이 가득한 글보다 솔직하고 가감 없는 내면의 여행기에 더 끌린다. 이 세 권의 책은 서로 다른 곳을 여행했지만, 결국 남들과 다른 여행을, 어떤 마음으로 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모두 시간이 많은 여행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늘 도착했다가 며칠 뒤 떠나는 여행자가 아니라서 마음이 여유롭다. 한 달씩 머무르는 여행을 한다는 건, 여행을 하는 요령의 문제이기보다 낯선 곳에서 어떻게 편안해질 수 있는지의 문제에 더 가깝다. 마음이 편안해져야 즐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금세 적응해서 늘어져 지낼 수 있는 그녀들은 머무르는 여행에 최적화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이 왜 남미, 치앙마이, 발리에 갔는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떠나기 전 그들은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가,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기껏 새롭고 낯선 도시에 가서는 빈둥대다가만 온다.
숙소의 대다수가 가는 투어에 혼자서만 조인하지 않고, 투어에 가는 대신 게스트 하우스의 고양이 곁에서 햇살을 쬐는 하루를 선택한다. 어느 날은 커피숍에서 모르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마음을 열어 친구가 되기도 한다. 택시기사가 두 배만큼 바가지를 씌웠다는 걸 알게 되고는 잠시 아까워하면서도 기사님이 두 배 정도 친절 했던 것 같다고 툭툭 털어버리기도 한다. 본인도 여행자금이 넉넉하지 않지만,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누군가가 지갑을 잃어버린 걸 알고 선뜻 맥주를 나눠마시자고 말한다.
그들은 유명한 관광지나 이름난 식당을 가진 않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도시를 이해해 가고, 소극적이지만 소통을 해나가며 적응하고, 충실히 그곳을 느낀다. 꼭 유명한 사원이나 성당에서만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 마음을 흔들고, 생각의 전환을 일으키는 것들은 의외로 평범하고 사적인 공간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읽은 책의 글귀, 볕이 예쁘게 들어오는 커피숍의 공간, 길에서 만난 작은 동물들, 타인의 뜻밖의 불친절이나 친절의 경험 같은.
“현지인과 친구가 된다는 건 여행자의 욕심일 뿐, 사람과 마음을 나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문화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한다. 관광객들 상대로 평소에 자기들이 일해서 번 돈보다 훨씬 쉽게 물건들을 얻고 팁을 받는데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가지를 씌우고 돈을 벌기 위해 작은 거짓말들을 한다.”
“할 일은 별로 없었지만 바닷가와 동네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로비나에도 다녀오고 싶고 우붓도 가고 싶은데 마음만 있지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평범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보니 어디 구경하러 멀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무는 여행을 좋아하는 걸로 치자. 돈도 안 들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때 천천히 하면 된다.”
<나 혼자 발리> 중에서
신기한 건 그럼에도, 그녀들은 느릿느릿 빈둥거리기만 했는데도 그들의 여행은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그건 아마도 그들이 자신의 취향을 알고, 자신의 여행 스타일에 따라 여행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곳에 가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어야 한다는 여행자들의 암묵적인 룰을 따르는 대신, 자신의 방식을 따른다.
취향이 담긴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이것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여행 스타일을 알게 되는 것은 주로 실패한 여행에서 온다. 나 역시도 여행이 아니라 고행에 가까웠던 일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여행을 했을 때 만족스러운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깨달은 나의 여행방식은 (부끄럽지만) 너디nerdy하기 그지없다. 나에게 여행은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구경하는 일이다. 짧은 체류 기간 안에 그 도시의 감성을 읽어내기 위해서 나는 다양한 텍스트와 영상을 본다. 여행 전에 이렇게 새로운 곳에 대해 알아가고, 닥치듯이 ‘흡수하는’ 과정이, 나에게는 여행을 하는 일만큼이나 즐겁다.
예를 들면, 2년 전 뉴욕 여행에서는 가기 전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행복했다. 우디앨런의 <애니홀>과 <맨하탄>을,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와 <택시 드라이버>를 다시 보고, 올드 뉴욕에 대한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70년대의 뉴욕 아트 씬이 생생하게 담긴 패티 스미스의 <Just Kids>, 그리고 존 디디온이 뉴욕을 떠나면서 쓴 에세이 <Goodbye to All That>을 읽었다. 이런 것들을 마음에 담아 가면, 뉴욕의 평범한 골목을 걸으면서도 그 길에 담겨 있는 있는 겹겹의 쌓인 것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남미에 정말 요양하러 오셨네요?”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 다른 여행자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남미에 가서 꼭 요양을 해야지!”하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나의 여행 기질이 그랬을 뿐이고, 편안한 공간에서 최대한 늘어져 있는 게 좋았을 뿐이다. 남미 이전에 배낭여행이라고 가본 곳은 인도가 전부였는데, 인도에서 자아는 못 찾았지만, 거기서 내 여행 스타일은 제대로 찾고 왔다. 낯선 곳에서 아주 게으르게 움직이며 익숙함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최대한 심심하게 지내는 것. 요양하듯 여행하는 것이 내겐 가장 큰 행복이었다.
<남미 요양기> 중에서
게으른 여행의 동지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참 단단한 사람들이구나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여행을 훔쳐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단단한 삶의 방식을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들은 단지 조금 색다른 여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삶을 선택하고 있었다. 편하게 남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조금 더 고될지라도,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그것이 그들을 외롭게 만들지라도, 꿋꿋이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
“어떤 길이든 기쁨도 슬픔도 외로움도 괴로움도 있겠지, 다만 선행자와 동료가 많을수록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예상할 여지도 많다. 그런데 어쩌랴, 나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모르는 길을 가는 게 더 쉬운 사람. 모르는 길은 위험조차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내게는 가고 싶은 길이다.”
<나 혼자 발리> 중에서
이렇게 힘을 빼고 담백하게 쓴 글이 얼마만인지. 날것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던 즐거운 독서였다. 앞으로도 이런 독립 출판물들이 더 많이 나와서 세상 어디에선가 혼자서 자기만의 길을 가며 분투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좋겠다.
사진 크레딧 - L'odyssee Bell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