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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May 31. 2023

아말피에서의 특별한 하룻밤


작가 존 스타인벡은 1953년 아말피 해안의 포지타노에서 1년을 보내고 하퍼스 바자 매거진에 ‘포지타노’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 당시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탈리아 남부의 이 작은 해안 마을이 지금처럼 인기가 있을 수 있었던 건 이 칼럼의 영향이 크다.


그는 “포지타노처럼 아름다운 곳을 만난다면, 누구나 이곳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감춰두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포지타노는 여운이 깊다(Positano bites deep.)”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머무르는 동안 실제 같지 않은 꿈과 만난 곳이며, 떠난 후에야 손짓하여 부르는 실존하는 곳이 된다.


존 스타인벡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아말피 해안을 찾았고, 이곳에서 잠시 머물거나 혹은 제2의 집으로 삼고서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DH 로렌스가 이곳에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고, 버지니아 울프와 블룸스버리 그룹의 작가들이 이곳에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도 이곳에서 얼마간 집필하기 위해 머물렀다고 한다.


무엇이 그들을 아말피 해안으로 향하게 했을까? 그들이 본국에서 찾지 못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몇 년 전 8월의 어느 날, 우리는 나폴리로 가는 길에 아말피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곳에서의 짧은 시간을 특별하게 보내기 위해서 재밌는 아이디어를 냈다. 아말피 해안에는 마을 사이를 잇는 여러 하이킹 루트가 있는데, 우리는 그중에서 산 중턱에 위치한 라벨로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하이킹을 해보기로 했다. 해변에서 출발해서 한 시간 정도 절벽을 타고 난 계단을 올라가는 루트였다.


한 여름의 아말피 해변은 어딜 가나 당일치기 여행을 하고 있는 단체 관광객들로 붐볐고, 해변에는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자랑스럽게 드러낸 장기 투숙객들이 썬배드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푸르른 해변의 풍경을 옆에 끼고서 신나게 하이킹을 시작했다.


10분쯤 지났을까. 그늘 없이 가차 없이 내리쬐는 햇볕에 땀이 비 오듯이 흘러 우리의 옷은 흠뻑 젖고, 쉼 없이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에 숨이 가빴다. ‘한 여름에 이탈리아 남부에서 하이킹이라니, 바보 같은 짓이었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고개를 돌리니 끝없이 펼쳐진 청량한 지중해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와, 이건 그냥 볼 수 있는 뷰가 아니다. 절벽을 내 힘으로 걸어 올라와 보는 뷰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바람 한점 불지 않는 날이었지만, 눈으로나마 시원함을 충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올라 드디어 라벨로에 도착했다. 땀을 한 통은 흘린 것 같은데, 그 고됨을 단숨에 씻어버릴 만큼 라벨로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아름다운 풍경과 그와 어우러지는 근사한 건물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절벽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가까이에는 푸르른 나무에 둘러싸인 풍경과 저 멀리로는 지중해 바다가 보였다.


우리는 먼저 플라자 안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젤라또를 주문했다. 하이킹에서 소모한 칼로리를 상쇄하고도 남을 달콤함을 우리의 몸에 선사해주었다. 당분과 수분이 적절히 채워지자 이제야 주변을 돌아볼 힘이 났다.


라벨로는 많은 작가들이 찾은 곳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아무래도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니 해변 마을보다 더 조용하고, 관광객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집중해서 글을 쓰고 예술작업을 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미국의 정치소설 작가인 고어 비달 Gore Vidal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탈리아에서 집필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자신의 로벨로 집을 ‘퍼치 Perch'라고 불렀다(Perch는 높은 나무나 산 자락 같은 높은 장소에서 아래를 넓게 조망할 수 있는 그런 뷰 포인트를 가진 자리를 말한다). 이곳에서 그는 미국사회와 정치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넓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가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조용하고, 집중하기 좋은 환경에 더해, 작은 마을에서의 심플한 일상 역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일과는 아침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오후 4시 반까지 글을 쓰고, 그 이후에는 플라자에 있는 동네 바에 앉아서 사람들과 소소한 동네 가십을 나누었다고 한다. 크고 작은 이슈들로 자주 머리가 복잡해지는 본국에서의 일상과는 달리 심심할 만큼이나 심플한 일상이었다.




작은 동네라 3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었다. 뷰 포인트를 따라 이어진 호텔들을 지나자 야외 가든이 있는 작은 키오스크가 보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와인에 곁들여 샌드위치와 치즈 플레이트를 먹었다. 눈앞의 풍경이 음식 맛을 두 배쯤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배부르게 음식을 먹고서 헤르만 헤세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문화에,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진심이었는데, 그는 그 의미에서 대해 “사람들은 세계를, 예술을, 인간을, 무엇보다 스스로를 배우게 됩니다.”라고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들이 이 작은 마을에서 발견했던 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었던 건 아닐까. 일상의 소음을 걷어내고 심플한 일상에서 조금 심심하게 지내면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조금 더 잘 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라벨로는 작가들의 안식처로서의 명성을 자랑스러워하는 듯,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단편 소설 콘테스트를 열고 있었다. 라벨로를 여행하고 나서 이곳에서 받은 영감으로 단편 소설을 쓰면 되는데(영어로), 수상자에게는 1주일간 라벨로의 호텔에서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단편 소설 한 편은 커녕 소설 한 장도 써본 적도 없지만 왠지 솔깃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비싼 곳에서의 일주일이라니!


라벨로에서의 머물렀던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상상해 보는 일은 즐거웠다. 그들은 사람들 속 분주한 일상 대신 여유롭게 혼자 있는 시간을 택한 것이다. 그런 자발적 고립 속에서 많은 작품들이 탄생했겠지. 그들의 내면에 어떤 것들이 지나갔는지 감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말피에서의 시간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나 훌륭한 절경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명성에 걸맞는 비싼 숙박비를 생각하면 순간순간 집중해서, 아낌없이 만끽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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