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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Jun 22. 2023

시칠리아의 여름밤에 즐기는 야외 오페라

고대 그리스 비극 <아가멤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는 그리스 유적인 거대한 원형 극장이 있다. 시라쿠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거점 도시로 삼기 위해 지은 도시라 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중에서도 기원전 3세기 경에 만들어졌다는 원형 극장이 가장 유명하다. 만오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인데, 무대와 좌석은 거대한 암석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만들어졌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시라쿠사의 고대 그리스 극장 (출처: 위키피디아)


평소에는 옆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과 함께 여행객들의 유적지로 존재하지만, 매년 5월부터 7월까지 두 달 동안은 야외 오페라의 극장으로 이용되면서 반짝 되살아난다.  수준이 높다고 명성이 난 이탈리아 국립 연극단에서 매년 다른 프로그램으로 고대 그리스 연극을 올린다. 매년 여름이면 시칠리아 전역에서 사람들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시라쿠사로 몰려든다고 한다.


여느 때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네의 서점에 들렀던 날, 이제 제법 친근해진 서점 주인이 우리에게 이 공연을 소개해주었다. 우리가 한 달간 머무른다는 걸 알고는 고대 그리스극장에서 야외 공연을 볼 수 있는 이런 특별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며 강력 추천을 했다. 아직 표가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구할 수 있다면 꼭 가보라면서.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비극이니 가기 전에 시놉시스를 읽어보고 간다면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날 저녁 집에 가서 바로 공연 웹사이트를 확인했다. 정말 남은 기간 동안 거의 모든 공연이 매진이었다. 매 공연마다 천장 이상의 티켓이 팔렸다는데,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중 몇 장 남아 있는 공연 중 우리와 일정이 맞는 날이 있어서 우리는 <아가멤논>으로 티켓을 예약할 수 있었다.


<아가멤논>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 중의 첫 편으로 아가멤논의 피살과 오레스테스의 복수로 이어지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이다. 간단한 시놉시스는 이렇다.


아트레우스의 아들인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자격으로 병력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한다. 중도에 그는 실수로 아르테미스 여신의 분노를 사고, 그 결과 바람이 불지 않아서 전함이 항구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발이 묶이는 사태가 벌어진다.

여신을 달래기 위해 아가멤논은 신탁의 지시대로 딸 이피게네이아를 데려다가 산 제물로 바친다. 친딸의 목숨조차 헌신짝처럼 내버린 남편의 행위에 격분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고, 티에스테스의 또 다른 아들 아이기스토스와 밀통하며 남편을 없애려는 흉계를 꾸민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은 아내의 손에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는 통치자로 올라서게 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공연 당일, 도착해 보니 학교에서 단체로 공연을 보러 온 대규모 학생 그룹이 제일 많았고, 회사를 마치고 온 듯한 직장인들도 많이 보였다. 잘 차려입고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매우 들떠 보였다. 이들에게도 특별한 장소에서의 특별한 공연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공연장에 가까워지자 노천극장의 하얀색 대리석이 눈이 부셨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극장이니만큼 모든 좌석에서 다 보일만큼 큰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티켓 가격은 30유로부터 100유로 정도까지 좌석에 따라 달라졌는데, 공연의 규모나 퀄리티를 생각하면 저렴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장이 관객들로 빼곡히 채워지자 공연의 막이 올랐다. 2천여 년의 시간이 시각과 촉감 같은 감각으로 느껴진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고대 그리스 연극의 방식으로 한 번에 한 명, 두 명의 배우만이 무대에 오르고, 공연의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코러스들이 일렬로 늘어서 무대를 채워졌다. 내가 앉은 대리석에 2,800년 전의 고대 그리스 관객들이 앉아서 나와 같은 무대를 보았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신기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공연을 보았을까? 지금처럼 하루의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들뜬 마음으로 공연장에 도착했을 것이고, 내 옆의 아저씨처럼 샌드위치를 사 와서는 간단하게 요기를 하며 연극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넷플릭스가 있고, TV도 있지만, 그들에겐 유일한 엔터테인먼트였으니, 이 노천극장이 그들에겐 가장 ‘핫’한 유흥이었을 것이다. 비극에 같이 원통해하고, 절정에 이르러서는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악역에게는 야유를 퍼붓고, 희극적 장면에서는 박장대소를 했겠지.


연극배우들은 엄청난 에너지로 독백으로 극을 이끌었고, 옆에 있는 코러스들은 다양한 추임새로 다채로운 톤을 더했다. 조명과 음악도 웅장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모든 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탁월한 연기에 압도당해서 2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수천 년의 기운을 그대로 머금고 있는 이 공간이 이 경험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연극의 헤로인인 클리타임네스트는 딸을 제물로 바쳐 자신의 영광을 누리려 했던 아가멤논을 무참하게 죽이면서, 딸의 복수를 했고, 이로서 정의는 실현되었다고 관중들에게 호소하면서 극이 막을 내렸다.



피로 붉게 물든 강렬한 마지막 씬으로 무대가 막이 내리고, 복수라는 비극의 굴레가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아버지가 딸을, 아내가 남편을, 그리고 아들이 다시 엄마를 죽이면서 복수를 한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연극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이스킬로스가 제시하는 것은 의로운 복수의 통쾌한 광경이 아니라 상처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갈등하며 겪는 고뇌이다.”라고 비평가 데이비드 덴비는 말했다.


그래, 어쩌면 이런 핏빛의 복수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아닌지, 혹은 더 나아가 인생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마음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겪는 갈등과 고뇌, 그것에 대한 공감인 것이다.


인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 혼란스러운 순간들로 이루어져있다. 2천 년의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삶에서의 갈등과 고뇌의 순간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억울하게 잃고,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고,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부글부글 타오르는 고뇌의 순간들. 그래서 그때도 지금도 이 광활한 노천극장의 관중석은 빼곡히 채워지고, 사람들은 이 뒤틀린 비극적 스토리에 빠져들어 함께 공감한다. 그렇게 보면 이런 고뇌의 순간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다. 과거의 누군가도 공연이 끝나고 몽글몽글해진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까. 신비한 과거를 여행한 것 같은, 내가 모르는 아주 오랜 과거와 닿아있는 것 같은 아주 특별한 밤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시칠리아의 여름밤의 매력을 하나씩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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