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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Dec 30. 2020

그때, 그리고 지금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오늘 뭔가를 보고 싶은데, 뭘 봐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이때 일어나는 내적 갈등의 중심에는 오늘 내 정신적 감정적 여유 공간은 어느 만큼 인가를 판단하는 데 있다.

이를테면  <빅뱅이론>, <모던 패밀리>, <커뮤니티> 같은 류에 손이 가는 날에는 두뇌회전이나 감정적 굴곡 없이, 그저 엔터테이닝한 것이 필요한 날이다. 가볍게 웃고, 즐거움을 충전하고 싶은 날.

어떤 날엔 무언가를 배우고, 새로운 내러티브로 자극을 받고, 모험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무게감 있는 드라마나, 역사/시대물, 다큐멘터리를 본다. 내 경우에 이때 주의할 점은, 비극적 역사적 사건을 다루거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적 영화를 선택할 거라면 지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할 준비가 되었나 잘 살펴야 한다는 것. (영화의 톤에 쉽게 빠져들어 정의감에 불타거나 하면서 에너지 소모가 많은 타입)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딱 그 중간인 기분이다. 재밌으면서도, 또 그냥 웃는데서 그치지 않고 어떤 의미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을 보고 나니, 이 영화가 딱 그런 날에  맞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카고 7은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의 리더 7명을 가리키는 말로, 이 영화는 리얼리티쇼만큼이나 드라마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그들의 재판 과정을 보여준다. 주제가 갖고 있는 무게만큼 진지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을 뒤엎고 훨씬 더 ‘재밌었다’. 재밌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다양한 층위의 이슈를 아우르면서도, 리듬과 위트가 있어서 재밌게 볼 수 있는 잘 만들어진 작품이었다는 점이 나에게는 기분 좋은 반전이었다.

Nico Tavernise/NETFLIX


이 영화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포커스를 잃지 않는다.

자유, 새로움과 변화를 갈구했던 60년대의 시대적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위협적인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
아비 호프만과 톰 헤이든의 대립에서 드러나는 진보 안에서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혁명은 기존 시스템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시스템을 전복시키고서야 이뤄질 수 있는 걸까)
판사를 통해 자리에 부적격인 사람이 권력을 휘두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유일한 흑인인 바비가 겪는 일을 보며, 군고구마를 몇 개쯤 연달아 먹고 목이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경험을 하게 되는, 흑인 인권 문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이자 감독인 애런 소킨이 다듬고 다듬어서 단단히 준비해서 내놓은 것 같은 대사가 영화를 가득 채우고, 사샤 배런 코엔과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에 (다시 한번) 반하며 영화를 즐겁게 보고 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며 조금 씁쓸해진다.


미국의 Black Lives Matter 시위, 홍콩과 태국의 민주화 시위, 극명하게 갈렸던 (그래서 긴장과 초조함의 며칠을 보냈던) 지난 11월의 미국 대선, 이번 달 초 조슈아 웡을 비롯한 홍콩 시위 리더 세 명이 실형을 받고 수감된 것 - 우리의 지금이 오버랩된다.

50년 전인 그때와 지금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어떤 것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즐거웠던 2시간의 러닝타임 뒤에 오는 왠지 모를 씁쓸함의 이유일 것이다.


https://www.netflix.com/title/81043755?s=i&trkid=1374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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