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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Oct 02. 2021

어느 금요일 저녁에 일어난 일

여기, 한 남자 A가 있다.

금요일 저녁, 퇴근을 하고 친구와의 저녁 약속을 위해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다. 그때, 지하철 역 앞에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학생이 어떤 남자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은 40-50대 정도에 키가 크진 않지만 다부진 체격이다. 청바지에 체크무늬 셔츠 위 단정한 청자켓을 걸친 이 아저씨는 험상궂은 폭력배처럼 보이지도 않고, 아이의 부모나 선생님이라기엔 가학성이 너무 과하다.


지나가던 두 명의 시민이 몽둥이를 쥐고 있는 남자를 말리며, 뭐 하는 거냐고, 왜 이 학생을 때리고 있는지 따지듯 묻는다. 사정없이 몽둥이를 내리치고 있는 이 남자는 마치 폭력이라는 과열된 행위가 주는 마약에 취한 듯, 멈출 생각이 없다. 그냥 지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A도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발걸음을 돌려 대치하는 이들의 가까이에 섰다.


사람들이 점점 더 몰려들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당신 혹시 경찰이야?”

티가 나게 움찔하는 그가 보인다. 황급히 아니라고 답하며 신경 쓰지 말고 다들 갈 길 가라고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친다. 사람들과 대치하느라 잠시 멈춘 이때를 틈타 A는 이 남자의 손에서 몽둥이를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다. 남자의 손에서 몽둥이가 채 다 빠져나가기 전에, 그는 휙 몸을 돌려 A를 공격했다. 동시에 몸의 중심을 잃고 둘은 함께 바닥에 나자빠지고 마는데, A가 먼저 상체를 일으켜 그를 위에서 제압하면서 그의 손아귀에서 몽둥이를 낚아챘다. 그는 경찰이 도착해서 이 남자를 넘길 때까지 그를 잡아두고 있기로 했다. 그렇게 어린 학생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일상의 작은 정의가 실현된 듯했다.


여기까지의 정황으로는 우리는 A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용감한 시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역 신문의 한 코너를 채울만한 작은 사건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어 경찰이 도착하고, 이 사건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방향으로 전개된다. 도착한 경찰은 학생을 폭행한 남자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더니, 오히려 A에게 다가가 수갑을 채우며 경찰서로 연행한다.


이 사건은 2019년 홍콩에서 일어난 일로, 폭력을 휘두르던 남자는 오프 듀티였던 경찰로 밝혀졌고, 그는 ‘학생이 지하철 게이트를 무단으로 뛰어넘는 걸 봤다’라며 그의 폭행을 정당화하려 했다(참고로, 무임승차는 홍콩법에 따르면 범법행위가 아니다). 한편, A는 37살의 미국인 Samuel Bickett으로, 그는 난데없이 공무집행 방해 및 폭행죄를 선고받았다.


홍콩 법원은 공식 근무 중이 아닌 경찰이 정도를 넘어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고, 정황을 모른 채 학생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시민의 방어적 행위는 범법이라고 판결을 내린 셈이다.


여기에 더해 미국인 Bickett의 배경을 알게 되고서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일류 국제 로펌의 시니어 변호사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대형 로펌에서 소송 및 수사 관련 케이스를 담당해온 변호사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법률자문으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억울한 사건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법정 공방 끝에 그에게 4개월 반의 실형이 선고된 이번 여름, 이 판결은 시민들에게, 특히 외국인 커뮤니티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지난 7월 1일 ‘국가보안법’이 발표된 이후, 홍콩의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시민들이 체포되고 말도 안 되는 과도한 형량을 받고 있지만 (한 시위 참가자는 시위 중 경찰에 레이저 포인터를 쏘았다는 이유로 1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번 사건처럼 시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반시민에게, 특히 외국인에게 이런 불합리한 선고를 내린 것은 처음이다. 시위나 정치적인 이슈에 한 발짝 떨어져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겐 큰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일은 홍콩이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의 절대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덮어 씌우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는것이다.


한 때, 이곳에도 법이 작동하고, 정의라는 개념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그 시대는 완전히 막이 내린 것 같다.


2019년 대규모 시위 이후, 시위대 및 일반 시민에 대한 경찰의 부당 폭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지금까지 단 한 명의 경찰도 처벌받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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