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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Aug 27. 2022

다시, 홍콩 그리고 곰팡이와의 사투

긴 여행을 하고 돌아왔더니, 우리를 반기는 건 집안 곳곳에 켜켜이 쌓인 곰팡이다. 우리가 집을 비운 집을 비운 몇 달간, 2-3주에 한번 청소해주시는 분이 있었음에도 이 습한 도시의 찜통더위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켜켜이, 아주 차곡차곡 쌓여있던 곰팡이는 남의 집을 침범한 자의 수줍음이나 민망함 하나 없이, 당당하게 온 집안을 뒤덮고 있었다. 이 텅 빈 집의 주인은 곰팡이었던 셈이다. 옷장 안에 옷들에도, 신발장 안의 신발에도, 서랍 안의 잡동사니에도, 주방 안에 있는 조미료 통에도 소복이 쌓여있다.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하고 싶어 진다. 이들에게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는 전투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자신이 없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홍콩 입국 심사를 거쳐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 입국 전 PCR 검사, 입국 후 공항 검사, 호텔 격리 3일 + 3일 내내 코로나 검사 - 이 심사를 가뿐히 패스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지금와서 보니 격리 시설에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함을 하는 나를 옆에 두고, 남편은 이 상황이 최악 중에 최악은 아니지 않느냐고, 바퀴벌레나 쥐 같은 상대하기 더 어려운 생명체가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라고 한다. 어쨌거나, 그는 나와 달리 낙관적인 편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한 반복 쓸고 닦고, 24시간 빨래 돌리기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지난주에 나는 서울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낮술을 하고, 조카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무려) 짜장면과 떡볶이를 먹었는데. 그 시간이 너무 꿈만 같다.



2년 반만의 한국이라서 그런지, 다정하게 나와 놀아준 사람들의 마음 때문인지,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무거웠고, 눈물도 찔끔 났다. 받기만 하고, 돌려준 건 없어서 미안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심란한 마음으로 베란다에 나가보니, 놀랍게도 방치되어있던 화분에 파인애플이 열려있다. 파인애플을 먹고 남은 꽁지에 싹을 틔워, 화분에 심으면 파인애플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던 게 2년 전이었는데, 정말 파인애플이 열렸다.



어쨌거나, 이것 역시 하나의 에피소드로 넘길 수 있는 시점이 올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지금은 에어컨을 틀어놓고 얼굴에 마스크팩을 하면서, 최민석 작가의 신작 <기차와 생맥주>를 읽고 있다. 5살 조카가 서툴게 쓴 내 이름과 거꾸로 쓴 남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보고 키득댄다.



세심하게 챙겨준 사람들 덕분에 곰팡이와의 사투에도 굴하지 않고, 우울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살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조금씩 기대면서 살아야 한다는,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이어져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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