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도 Nov 03. 2021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에 담긴 것들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며칠 전엔 오랜만에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마지막으로 영화관을 갔던 게 6개월도 넘은 것 같다.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이지만, 영화를 보러 가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의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야한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없어서 적당히 마음이 여유롭고, 무엇보다 아침의 콩나무 지하철을 견뎌낼 만큼 영화가 매력적이어야 한다.


다행히도 내가 좋아하는 야우마테이에 있는 독립영화관은 조조의 시작이 11시 반이라 너무 이르지 않다. 최근에 흥미로운 영화가 눈에 들어와서 한번 가보기로 한다.


조조영화의 매력은 거의 텅텅 빈 영화관에서 고요하고 잉여롭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 영화관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근처에 제법 큰 노인회관이 있어서, 시니어 할인(조조영화를 거의 반값에 볼 수 있다)을 이용하려는 어르신들로 조조영화가 붐비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당첨. 내가 선택한 영화는 중세 프랑스의 #미투 MeToo 스토리를 담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라스트 듀얼>이었는데, 설마 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상영관 좌석의 반 이상이 채워져, 고요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영화를 보게 됐다. 거기에 더해 내 옆자리에 앉은 한 청년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부스럭부스럭 가방을 뒤져 맥도널드 햄버거를 꺼내서 먹기 시작한다. 무려 두 개나.


어수선한 영화관 분위기만큼이나 어수선했던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반 동안, 나는 어르신들과 내가 사실 상당히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자발적으로 노동 시장에서 벗어나 있고, 한가함에 기반한 할인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아침잠이 별로 없다는 점도 있겠다.



오늘 본 영화 <라스트 듀얼>은 남편의 친구에게 강간을 당한 여인이 공개적으로 가해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이야기로,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15세기 프랑스는 지금과 너무도 다르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기에 이 사건은 강간사건이 아니라, ‘소유권 침범 사건’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는 아내가 아닌, 남편과 그의 친구였다.


그들은 재판을 통해 법의 판결을 받는 대신, ‘듀얼 duel’(공개적인 장소에서 일대일로 결투를 하는 것)을 통해 잘못을 가리기로 왕실의 승인을 받는다. (이 결투가 프랑스 역사상 왕실이 승인한 마지막 결투였다고 해서, 라스트 듀얼이라고 불린다.)


1409년에 실제로 일어난 이 결투를 이 후 사람들이 일러스트로 그렸다. (이미지 출처: Alamy)


이 시대의 사람들은 결투를 통해, 신이 진실을 밝혀준다고 믿었다. 즉, 결투에서 이기는 사람은 신이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고, 지는 사람은 유죄임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할리우드식 자극적인 전투 씬이 많아서 다소 머리가 아팠지만, 드라마 <킬링 이브> 이후로 팬이 된 조디 코머가 연기한 여주인공이 이 영화의 몰입도를 이끌어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녀에게 공감하게 되는 건, 흔들리는 눈빛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혼란스러움이다. 그 시대의 세계관 안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의 부조리, 무엇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부당함을 겪는 그녀의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끝내 원하는 결과를 얻고도, 그녀는 여전히 피해자로 남은 기분을 느낀다.



‘여성 인권’이라는 개념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그리고 신의 능력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걸 이해하기 전의 시간에 살고 있는 그녀는 이 혼란이 구조적인 문제에서 왔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의 경험은 외롭고 사적인 분투로만 남는다.



악역으로 나온 아담 드라이버와 주인공 조디 코머의 연기는 좋았지만, 두 시간 반은 꽤나 더디게 흘렀다. 45일 상영 후에 온라인 플랫폼으로 넘어갈 예정이라는데, 작은 화면으로 봤으면 더 좋았을 것도 같다. 액션 장면에서 에너지를 덜 쓰고, 감정선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아서다.


그러면서도 영화관을 나오는 길, 왠지 마음이 가벼웠다. 오늘의 내가 그녀를 이해한 것처럼, 오늘의 혼란스러움도 미래의 누군가에게 좀 더 명확하게 이해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도 어떤 불평등, 편견 그리고 부조리 앞에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맥락 너머에 무엇인가가 더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왠지 희망적이 된다. 우리의 혼란이 덜 외로워진다.


서로 다른 우리가 이어져있다는 느낌은, 영화관의 어르신들과 15세기 프랑스의 그녀와의 공감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 소중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