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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Jan 21. 2022

2021년을 견디게 해 준 것들


1. HBO 시리즈 Succession 석세션



HBO 시리즈인 Succession 석세션을 하루에 한편 보는 재미로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루퍼트 머독의 집안처럼 미국의 미디어 재벌 일가의 경영승계를 둘러싼 드라마인데, 하나같이 표독스러운 빌런들로만 가득한 블랙코미디이다. 어두운데 정말 웃기고, 캐릭터들이 짜증 나는 데도 정말 재밌다는 그런 흔치 않은 조합. 시즌3까지 모두 끝낸 지금, 이제 시즌4까지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슬플 정도다.


2. <The Song of Achilles> 아킬레스의 노래



올해 가장 좋았던 책을 하나 고르라면 <The Song of Achilles> 아킬레스의 노래를 꼽을 거다. 조금 조잡하게(?) 느껴지는 표지부터, '사랑' 중심으로  서사라는 점까지, 평소라면 선뜻 고르지 않았을 책이지만, 우연히 책을 펼쳐 들었고, 너무 아름답게 쓰여진 문장들에 한순간에 반했다. 우리가  아는 트로이 전쟁의 전사 아킬레스와 패트로클로스라는  책의 주인공의 사랑이야기인데,   남자에  빠져서  책을  읽고도 한동안  애틋한 감정의 서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  둘은 남자이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 간의 연애가 흔한 일이었다.) 대체로 쉬운 영어로 쓰였고, 몰입도 있는 서사를 갖고 있어서 원서 읽기 연습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완전 추천.


3. 여름의 기억


그리고 또 여름의 기억들이 있다. 미국에 계시는 시부모님과 함께 로드트립을 했다. 잭 캐루악의 자전적 소설 <온 더 로드>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계속 가야 한다고, 로드트립의 목적은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계속해서 어디론가 가는 행위, 움직임 그 자체에 있다는 말을 동경해왔다. 하지만 정작 길 위에서의 시간은 그리 철학적이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초리얼리즘 코미디에 가까웠다.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서 애리조나, 뉴멕시코, 그리고 콜로라도까지 4개의 주를 지나는 20시간이 넘는 시간을 차에서 보냈다. 차 안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 서로에 대해 적나라하게 많은 것이 드러난다. 음악 리스트를 속속들이 알게 되고, 좋아하는 노래를 목청껏 같이 부르는 훈훈한 순간도 있었지만, 서로가 거슬리는 순간에는 속으로 삼키며 인내심이 시험에 들기도 했다. (최저가 주유소를 찾아야 한다고, 긴 하루를 끝의 피곤한 저녁에 주유소 세 개를 지나치는 아버님…) 그럴 때마다 노트를 꺼내서 그런 에피소드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 결과 여행의 끝에는 노트의 반 이상이 분노의 기록으로 뒤덮여있었다. (하지만 차 안에서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좋은 순간들도 많았다. 정말이다.)



4. 아레나 옴므 플러스 칼럼 <홍콩의 봄이 진 후에>


홍콩의 시위가 격렬하게 이어지던 2019년의 여름, 한 학생의 인터뷰를 기억한다. 취재 기자는 몇 명의 학생이 사망했고, 다수가 경찰에 잡혀가는 지금 두렵지 않은지 물었다. 학생은 조금 울컥한 듯하다가 곧 침착하게 답을 했다.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을때, 이 시위가 실패하고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더 이상 홍콩이 아닌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무섭지 않아요.
그 삶을 선택할바에는, 죽는게 나으니까요.


그때부터였다. 함께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들에게 힘을 보태지 못한다는 어떤 부채감을 안고 살았다. 행동하지 않는 내가 부끄러웠다. 올 해 4월호 <아레나 옴므 플러스>에 글을 쓸 기회가 주어져서, 그런 의미에서 정말 감사했다. 조금이나마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https://www.smlounge.co.kr/arena/article/47645


5. 불안한 날에는 하이킹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마음이 어지럽고, 기운이 안나는 날에 자주 하이킹을 갔다. 걸으면서 걱정을 조금 덜었고, 조금 덜 불안해졌다.



여기까지 리스트업을 하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말일까, 이 책과 영화, 걷고 여행했던 시간이 지난 한 해를 견디게 해 주었을까라고.


잘 모르겠다. 팬데믹과 이곳 홍콩의 상황, 모두 예측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동요했던 2021년. 그 시기를 지날 수 있었던 건, 다음을 예상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일도, 당장 다음 주도 모르겠고, 그냥 오늘 하루만 생각하자, 생각하면 아침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하루를 살아갈 힘이 났다. 오늘 하루만이 그저 내 인생이었고, 그렇게 하루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는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나면 우울한 날에도, 즐거웠던 날에도, 그저 그건 오늘 하루의 에피소드일 뿐 그 감정에 오래 지배되지 않았다(물론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2022년에도 그저 오늘만 생각하기로 한다. 하는 일을 더 잘하게 되거나, 성격이 더 좋아지거나, 피부가 더 고와지거나 할 가능성이 낮아 보이기 때문에, 더 나아지겠다는 큰 포부는 갖지 않기로 한다.


지난 한 해에 몇 개의 공모전에 글을 썼고,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를 기대하고 한 것은 아니었고, 도전이 필요해서 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도전하고 싶은 일이 나타난다면, 조금 덜 고민하고 도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애써 대단해지려고 하지 않고,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닌 나를 사랑할 수 있기를.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전해야겠다. 그거면 된다.


눈을 뜨고, 와, 이 사람이 나랑 같이 있다니. 정말 잘됐다. 정말 고마운 일이야.
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한순간이라도 그가 당연한 적이 없었다.


연말에 읽은 어라운드 매거진에서 좋았던 글귀. 뮤지션 오지은의 인터뷰 중에서. 덧붙여 "영원한 게 없는 세상에서 오늘을 함께 사는 건 꽤나 멋진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라고 했던 그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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