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 전부터 오른쪽 이가 시렸다.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치과에 간 게 아마도 3년 전인 것 같다. 아 올게 왔구나 하는 느낌으로, 3년간 치과를 가지 않은 나 자신을 의사 앞에 내려놓고, 그의 호통을 달게 받겠다는 마음으로 치과에 갔다. 나에게 미용실과 치과는 그런 곳이다. 가야 할 때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아 이젠 더 이상 안 되겠어, 라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겨우 가게 되는 곳. 그리고 가서는 왜 이렇게 관리를 못했느냐고 흠씬 혼이 난다.
이번에 진료를 보던 의사는 내 치아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엑스레이까지 찍어 보고 나서, 놀랍게도 충치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엑스레이상 이전에 충치 치료한 곳에 보수가 필요해 보이긴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어 보인다고, 좀 더 지켜봐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아마 양치를 하다가 민감한 곳을 건드렸을지도 모르고, 그저 지나갈 불편감일 수 있으니 기다려보자고 했다.
우선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데서 안도했고, 그 다음엔 신기했다. 뜻밖이라서. 치과 의사의 입에서 나온 We’ve still got time.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말. 호통과 비난을 감수할 마음으로 들어와서 이런 뜻밖의 긍정적인 답변을 만나다니. 왠지 이 말의 울림에서 내 치아 건강 문제를 넘어선, 어떤 그 이상의 낙관마저 느껴졌다.
3월 내내 쉬지 않고 들려오는 나쁜 소식들에 혼란스러웠다. 내가 사랑하는 밴드 Foo Fighters의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가 남미 투어 중에 사망했고,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의 애완동물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한국에서는 선거의 충격이 있었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안타깝기만 했다.
거기에 더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서글픔이 있다. 지금의 홍콩에서 살아가는 한 시민으로의 삶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권력을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아주 실질적인 무기력감을 느끼게 한다. 너의 존엄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매일 누군가가 나에게 외치고 있는 기분이다.
“바로 그것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주의를 끌었던 이유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거리는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가 우연히 어떤 비법을, 무정한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어떤 처방을 발견한 게 아닐까 궁금했다…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말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작가 룰루 밀러는 이런 관점에서 책을 시작한다. 계속되는 좌절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삶을 따라가며 그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범상치 않은 인생을 살았던 이 과학자의 인생은 챕터마다 놀랍고, 신기한 발견 투성이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인생 행적의 끝에서 작가는 인생에서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에서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에 주목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작은 친절과, 서로를 챙기는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메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것이 어쩌면 지금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 앞에서 종종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사회의 시스템이나 이념을 넘어서, 서로의 존재로 인해 중요해진다. 거기엔 대단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일상의 우리가 서로에게 가닿는 영향을 아는 것이다. 우리 서로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그것이 숨어있는 삶의 질서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우리는 무의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우주 안에서 우리는 한낱 먼지에 불과하니, “넌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이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우리의 무의미함을 직시하면, 그런 무의미함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향해 저벅저벅 나아가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말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말에 담긴 어떤 서늘함이 삶을 기대기엔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답을 찾고자 했고, 결국엔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라는 것에서 필요했던 온기를 발견했다. 롤러코스터 같았던 이 책의 여정의 끝에 담긴 메세지가 딱 내가 원하는 만큼의 현실적인 낙관을 안고 있다.
그렇게 나는 어느 과학자의 이야기와 자연세계, 그리고 반전의 치과진료가 빗어낸 이 낙관의 기운에 기대어 오늘을 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