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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원 May 09. 2020

저녁 식사 후엔 사과


야근이 잦았다. 근무 시간은 10 to 7. 정시 퇴근은 글렀고, 꼬박 일에 매진해도 밤 9시가 훌쩍 넘을 것 같은 날엔 동료와 함께 7시 10분쯤에 회사를 나섰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석식권을 사용할 수 있는 주변 식당 중에서 회사에서 가장 멀고, 회사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 식당으로 향했다. 매일 메뉴가 바뀌고 맛이 좋아 점심시간이면 손님이 꽉 차는 아담한 백반집이었다.


저녁 시간에도 야근하는 강남의 직장인들로 바글바글했는데, 회식이 많은 목요일이나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에는 확실히 손님이 적었다. 하필 남들 놀 때 우리는 야근이었고, 그래서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가게엔 우리뿐이야! 회사 사람은 없어! 


오늘의 저녁 메뉴는 제육볶음. 아싸!


자리에 앉아서 인사치레로 “사장님 제육볶음 2개요~”라고 말한다. 제육볶음 양념이 맛있게 졸아붙는 냄새가 난다. 푸짐한 반찬이 먼저 나오고, 메인 메뉴 등장. 밥을 뜨기도 전에 제육볶음을 크게 한 젓가락 집어 입으로 밀어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음~ 이 맛이야. 야근 스트레스와 업무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맛.

 
“급하고 중요한 일은 왜 오후에 떨어질까요?”
“야근을 안 하고 이걸 대체 이번 주까지 다해!”

 
잔뜩 불평불만을 내뱉다 보면 밥 먹는 속도가 빨라진다. 분노에 차 허겁지겁 밥을 먹는데, 사장님이 보고 계신 드라마에선 주인공들의 갈등 상황이 한창이었다.

 
(남편의 사무실에 책상에 불륜 사진을 뿌리며) “당신, 이거 뭐야”
(분노한 아내를 말리며) “내가 다 설명할게. 일단 집으로 돌아가”

 
어쩌면 진부하고 그래서 제일 재밌는 막장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밥과 호박무침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드라마에 시선을 고정하는데 ‘와 요새도 이런 드라마가 흥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내 말에 옆 테이블에서 드라마를 보시던 사장님이 “이거 요즘 인기야~”라고 말씀하셨다. 어쩐지 그 말에 난생처음 본 드라마에 집중하게 된다. ‘저 둘이 부부인데 남편이 바람피우다가 걸렸다는 거지? 사진까지 찍혀놓고 뭘 설명해. 에라. 이참에 헤어지고 딴 사람 만나라’ 밥을 먹으며 온갖 추임새가 턱턱 나오고.

 
“안 그래도 저 여잘 옛날부터 좋아하는 남자는 따로 있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내용은 사장님이 말로 설명해 주신다. 집에서 엄마랑 소파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며 이러쿵저러쿵 떠들 때처럼. 그 백반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때면 종종 사장님이 보시는 드라마를 참견하고, 지금 싸우는 저 둘은 배다른 형제인지 묻기도 하고. 괜히 그 재미에 다른 식당 갈까 하다가도 그곳으로 향하곤 했다.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을 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술집 사장님과는 작별 인사를 마쳤고, 마지막으로 백반집에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야무지게 밥을 먹고 나서, 사장님이 깎아주신 사과를 후식으로 먹다가 입을 뗐다.

 
“저희 이제 못 와요. 사무실 이사 가서요.”
“어머, 아쉬워라. 그래도 가끔 밥 먹으러 와”
“네. 나중에 시간 되면 올게요.”

 
야근은 줄었다. 가끔 저녁을 먹고 일해야 할 때면 사내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점심도 사내 식당에서 먹었는데.  늘 먹는 그 맛. 얼른 먹고 올라가서 일해야지. 10시는 넘기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니 어쩐지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진다.


먹성 좋은 나를 일찌감치 알아보시고 반찬과 고기를 많이 주시고. 후식으로 깎아주신 사과를 아삭아삭 씹으며 드라마 속 악역도 씹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사장님이 가끔 보고 싶다.




<다정한 사람들>


'이 사람 왜 이렇게 다정해?' 대가 없는 선의를 베푸는 사람. 어쩌면 타고나길 다정함이 한도 초과인 사람은 날 당황하게 만든다. 건물 입구에서 문을 잡아준다거나, 지하철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기다리는 그런 기본적인 매너도 바라지 않은 지 오래돼서 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기대도 안한 다정함을 마주할 때면 적잖이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괜한 조언도 어설픈 위로도 쉽게 하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매너라지만 조금은 과하다 싶은 다정함이 필요할 때도 있다. 고무장갑 물을 튀기며 난데없이 날아드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 내가 몇 살인지도 헷갈리면서 늘어놓는 아빠의 걱정, 처음 본 아저씨한테서 듣는 인생 팁, 자꾸만 곁에 와서 맛있게 잘 먹는지 지켜보며 말로 거드는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열정,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표정과 손짓으로 자꾸만 나를 이해시키려는 타지에서 만난 현지인의 노력.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로소 소중하고 즐거운 내가 본 다정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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