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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팔룡 Apr 14. 2021

자영업을 하는 사람에게 기다림이란

백전백승하는 최팔룡의 영업일기(12)

우리집 거실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어떤 관공서에서 발주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인부들이 많이 달려들어 빠르게 공사를 하는 것 같지 않고 부산한 느낌도 없다. 2달 전부터 터파기를 하는 것 같더니 아직도 자재 몇 개를 갖다 놓고 쉬어 가는 분위기다. 빨리빨리를 좋아한다는 한국 사람이 이런 공사도 한다. 관급공사다 보니 시간이 좀 지체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공기가 늘어나면 예산이 더 추가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이렇게 보면 빨리빨리가 한국 사람 특유의 문화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결국 경제적인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느리게 가는 것은 단순히 멋 부리기나 지적 유희의 소산은 아니다. 이 공사 현장은 예산 따먹기 같은 태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몰라도, 여유 있는 태도는 경제 활동의 공간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고 때로는 효율을 높여준다. 천천히 하는 것이 효율을 높여준다고 하면 형용모순처럼 느끼겠지만 결코 이상한 표현이 아니다. 내가 2004년 봄에 영업사원으로 처음 직장생활을 했을 때 나를 가르쳐주셨던 과장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팔룡 씨, 거래처에 오늘 못 가면 내일 가고, 내일 못 가면 모레 가세요.” 열 번 잘해도 서두르다 한 번 사고내면 성과를 다 까먹는다는 말을 이렇게 멋지게 하실까. 직장 내 괴롭힘은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일까. 나는 이 말 한마디로 내 미래를 긍정하게 되었고 선배들을 배우고 존경할만한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빨리빨리 문화는 당장의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발생한 병적 현상이지 대중문화로서 일반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결코 아니다.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인들이 서인도철도를 부설할 때 고대 유적의 벽돌로 빨리빨리 공사를 해버린 일화가 있다. 인더스강 유역을 따라 1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장구한 구간에 침목과 철로를 까는 것은 좋은데 그 밑에 까는 자갈을 조달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영국인들은 5천년이나 잠자고 있던 인더스 문명의 하라파 유적을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귀한 유물(벽돌)을 자갈 대신 사용했다. 덕분에 인도에 철도가 시원스레 깔렸는지는 몰라도 세계 최고 문명의 흔적들은 상당수 파괴되었다. 여기에 무슨 문명사회의 예절이 있으며 상식적인 체면이 있었던가.      


요즘 사람들이 암흑기라고 먹칠을 해버리는 중세 도시에서도 빨리빨리 정신을 가지고서는 도제가 어엿한 수공업자로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인, 마에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자질구레한 용무에서부터 전문기술까지 2년~4년씩 배워야 했다. 물갈기, 집안 청소, 불 피우기, 심부름까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빵셔틀’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일을 배웠다. 부당한 처사라고 항의하면서 관서에 신고를 하는 따위 행동을 할 것이라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어엿한 직인으로 성장하면 다른 도시를 전전하면서 일자리를 얻어 견문을 넓힐 수 있다. 혹독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원래 도시로 돌아와 자기 사업장을 열고 마에스트로 승격될 수 있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부당한 처사 따위를 염두에 두고 멍청이 같은 생활을 했다며 타박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암흑기에도 상공인들의 기술력은 보존되었고 그 방식은 빨리빨리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즘의 상공인들을 관찰해봐도 다르지 않다. 인내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성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내 그것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반찬가게를 하는 황 사장님의 사례도 그랬다. 창업한지 이제 2년 차,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게 보인다. 앞이 안 보인다는 코로나 초기에 창업을 했으니 얼마나 암담했을까. 창업 직전까지 황 사장님은 조리원으로 근무하면서 월 300만원을 받고 살았는데 첫 달 매출은 100만원이 채 안되었다. 똑같은 위치에서 이미 반찬가게를 하던 분의 지리적 이점을 이어받고 시작했는데 그 모양이었다. 그랬던 것이 한 달에 5만원씩 매출이 올랐다. 얼마나 애가 탔을까. 코로나로 거리에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없었던 달에는 매출이 오히려 줄었다. 그 때 좌절했으면 지금은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반찬가게의 본격적인 판매는 오후에나 시작된다. 오전에 가게를 열어 놔도 손님은 거의 없다. 그래도 사장님은 오전에 일찍 출근한다. 인근 가락시장에서 싱싱한 나물을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으면 그 날 하루는 참 상쾌하다. 황 사장님은 자가 차량이 없어 무거운 장바구니를 낑낑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 날 조리한 것들이 잘 팔리면 좋겠지만 좀 묵힐 때도 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선도가 유지되지 못하면 과감히 버린다. 원가를 생각하면 좀 오래뒀다가 팔아도 될 것 같지만 고집스럽게 선도를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은 누구라도 반찬 가격이 너무 싸게 책정된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 것이다.     


일단 요리를 볼작시면 그 분의 솜씨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 국이면 국, 찬이면 찬, 뭐든 솜씨가 좋다. 맛있다. 한결 같다. 식당은 아니지만 사장님한테 밥을 좀 하라고 해서 식사도 해봤다. 깔끔한 반찬과 국을 먹어 보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맛있고 배가 불렀다. 단사표음(簞食瓢飮)이라고 했던가? 단사표음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다. 다음 일터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사장님과 함께라면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것 같다. 다녀 봐도 뾰족한 식당은 없잖아. 이렇게 정갈하게 음식을 하는 사장님과 옆 사무실을 쓰면서 늘 밥을 얻어먹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당이 아니다보니 음식값이 정해진 것이 없어서 거금 1만원씩 드렸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들었다.     


이 달에는 200만원 정도 수익이 날 거라고 했다. 2년 전 300만원 월급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점차 매출이 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코로나로 식당에 가는 것이 꺼려지는 세상에서 반찬 솜씨가 있으니 단골은 계속 늘게 되어 있다. 갑자기 경쟁자가 생기면 난감하겠지만 우리 가게가 너무 잘된다는 소문이 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는 괜찮다. 너무 잘 되어도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할 것이고 경쟁자가 냄새를 맡고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저 조금씩 조금씩 인내하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단골손님만 잡으면 그들이 알아서 신규 고객을 물고 온다. 바쁜 세상에 가정에서 모든 반찬을 만드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으면 된다. 혹시나 식중독 같은 사고가 나거나 엉뚱한 소문이 나는 일만 없으면 좋겠다. 솔직히 고객들은 한 덩어리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그 분의 창업에 일조한 바가 있어 뿌듯하다. 조금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다. 

    

1월에는 황 사장님의 부가세 신고를 도와드렸고 5월에는 종합소득세 신고도 해결해드릴 참이다. 이런 것을 하는데 큰돈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도와주고 도움을 받으면 나쁠 것이 없다. 가족 외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오늘 또 선배 과장님이 했던 말을 생각한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일을 하자. 우리 인생은 길면 길고 짧다면 짧다. 서두른다고 인생이 빨리 빛나지도 못한다. 확실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내 힘을 비축해놓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에서도 새싹 상공인들이 당장에 수익을 내야 한다며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확실한 자기 전망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결국 성공하게 되어 있고 미래는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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