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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팔룡 Apr 24. 2021

동백나무처럼 내핍하기

백전백승하는 최팔룡의 영업일기(13)

동백(冬栢)은 이름 그대로 겨울에 피는 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꽃은 봄이나 여름에 피는데 이 꽃은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옛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대개의 꽃나무가 겨울에 꽃을 피우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추워서라기보다는 꽃가루받이를 해줄 곤충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따뜻해지면 곤충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꿀을 찾아 벌이 날게 되면 꽃가루가 옮겨 붙어 봄꽃을 피우는 것이다.   

   

동백은 곤충이 아니라 새가 꽃가루받이를 해준다. 그래서 겨울에 필 수 있다고 한다. 동백꽃의 대표적인 친구 새는 동박새다. 한겨울에 먹이가 부족하면 동백꽃의 꿀이라도 마시려고 달려든다. 이 때 동백꽃은 함부로 꿀을 내어 주지 않는다. 꽃을 활짝 피우지 않고 반만 열어서 먹을 만큼만 조금씩 꿀을 내어 준다. 확 열어 주면 동박새가 제 임무를 다 못하고 꿀만 먹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동박새는 몸 길이가 10cm 정도인데 꽃의 크기는 그 절반 정도이다. 인간이 보기에는 가소롭겠지만 새로서는 먹을 만한 식단이다. 아껴두었다가 먹으면서 꽃과 상생한다. 이렇게 내핍하는 방식으로 그 꽃과 새가 겨울을 난다.     


내핍 경제는 점차 중요한 키워드로 다가오고 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어감이 강해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수년 전에 내 대학동창과 경제 얘기를 하다가 내핍이라는 것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분단 상황에 기인한 그의 비뚤어진 사고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왔다고 생각해서 답변하기 싫었지만 일단 내핍경제는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내가 내핍처럼 종교적인 단어를 경제적인 범주로 착각한다면서 비웃었을 것이다. 물질과 소비가 풍부한 우리 사회에서 내핍 따위를 들먹이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직도 많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자영업을 하는 경제인들 상당수가 내핍이라는 상황을 견디면서 이것을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설 투자를 제대로 못한 상황에서 영업을 해야 하고, 재료비에 비해 턱 없이 낮은 가격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팔아야 한다. 선거를 겨냥해서 나오는 지원금이라도 받아서 버텨야 한다. 방역사태가 벌어지면 급격한 매출 하락을 감수해야 하고 상황 지속을 감안하여 장사를 계속 해야 할지 밤새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가게를 접고 나면 뭘 해야 하나. 결국 박한 마진을 보면서 가게를 해야 할 것이다. 최저임금 따위는 호사스럽다. 서울에서 조그만 가게를 혼자서 하는 사람들은 비용 빼고 나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누리기도 어렵다. 예전에는 소상공인도 가게를 확장하여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요즘은 힘들다.     


소상공인만 그럴까? 어쩌면 세계적인 추세가 아닐까 한다. 며칠 전 현대자동차는 아산공장의 그랜저 생산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국민차 수준으로 사랑받는 제품도 만들어내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차량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요소를 구비해도 단 1개가 없으면 전부를 만들지 못한다. 해당 반도체 부품은 첨단 제품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조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차량 전체를 생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 강국이라지만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이렇다.     


얼마 전 경제부총리는 이런 문제를 거창하게 서플라이 체인(supply-chain)을 복원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설명했는데 실상 허약한 우리 경제 구조를 가리려고 유식한 단어를 써 본 거라 느껴진다. 이런 대목에는 국제분업체계라는 공식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생산의 각 단계들을 각 국가나 다국적기업들이 나누어 맡아 거대한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다. 이 분업 체계는 원래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어느 한 쪽에 문제가 생기면 보충적인 방식으로 복원을 할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비용을 줄인다면서 아슬아슬한 방식으로 분업 체계를 유지한다. 대규모 생산 설비가 필요한 반도체 공장을 여러 개 유지하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특정한 1개 기업이 전담하는 식이다. 화재 한 번, 태풍 한 번에도 생산에 차질이 생긴다. 특정 공장의 불운은 전 세계 제조업의 불운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이 돌발적이라 여겨서는 곤란하다. 미디어에서는 갑작스러운 사고나 자연재해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설명하지만 예전에도 그런 사고들은 있었다. 단지 지금은 국제분업체계가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방식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일본 기업이 특정 원료를 한국에 납품하지 않는 방식으로 겁을 주었다. 수년이 지나 극일(克日)을 했다며 한국 언론에서 자찬을 하고 있지만 이제 겨우 우리는 출발선에 서 있을 뿐이다. 온 국력을 기울여 분업체계의 하위 파트너 지위를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머잖아 또 조폭 같은 놈들이 등장할 게 분명하다.     


쿼드 동맹국과 같이 무력을 앞세운 집단이 등장하여 힘자랑을 하는 것을 보면 지금 세계는 1차 세계대전 직전과 유사한 그림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국가 간 경제적 상호관계가 적대국간에도 밀접해서 전쟁 같은 것은 나지 않을 거라는 사람도 많겠지만 사실 1차대전 전야에도 그런 추측이 나왔다. 20세기 초반에도 영국은 독일과 살벌한 적대관계였지만 한편으로 영국은 독일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고 한다. 다들 경제적인 범주로만 생각하다 보니 세상만사가 계속 이렇게 굴러갈 것으로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는 전혀 다르다. 국제분업체계의 동요는 일시적이지 않으며 향후에도 심하게 흔들리다가 일순간 마비 증상이 오게 될 것이다. 당장의 전쟁이 나지 않더라도 국제분업의 동요는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국내에서 조달해야 하는 날이 오게 된다.     


그래서 내핍이라는 것이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하게 된다.     


얼마 전 방문했던 백반집이 떠오른다. 가게 간판은 비바람에 씻겨져 낡아 빠졌고 입구 문짝도 거적으로 덮여 있는데 치울 수가 없단다. 벽면 메뉴판에 적인 음식 가격도 사인펜으로 덕지덕지 때워져 있다. 그래도 작년엔 장사가 잘 됐다고 하였다. 내가 부가세 신고 내역을 보니까 19년보다 20년 반기 매출이 최소 1천만원은 뛰었다. 가게를 부티나게 바꿔놓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저렴한 식사를 위해 허름한 식당을 이용하는 것이 이상할 게 없다. 가게의 겉만 보면 정말 말이 아닌데 고객은 늘어난다. 물론 가장 기본이 되는 음식의 질이 좋기 때문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필수적인 지출만 한다는 사장님의 그 정신이 고객들에게도 전달된 것이 아닐까. 

    

바짝 허리띠를 졸라맬 때가 되었다. 지금은 반도체 하나가 없어서 대기업이 영향을 받게 되었지만 며칠 있다가 곡식이나 화학제품 같은 것이 태풍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상황에 내몰려서 울지 말고 지금 당장 우리가 스스로 챙겨야 할 것은 챙겨야 한다. 국민경제도 그렇고 자영업 소상공인도 그렇다. 전대미문의 폭풍이 와도 굳건하게 우리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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