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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팔룡 May 13. 2021

정의와 개념이 반대말이라고?

백전백승하는 최팔룡의 영업일기(16)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지 약 10년이 경과하였다. 일반적인 휴대전화 기능에 퍼스널 컴퓨터의 기능까지 포함하고 앱을 추가로 설치하여 확장성을 가지면 스마트폰이 된다. 스마트라고 해서 똑똑한 여러 기능을 포함한다고 해서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스마트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아이폰 전에도 휴대폰에 다양한 기능을 포함한 것들이 있었다. 피쳐폰이라 해도 소박하게나마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을 스마트폰이라 이름 붙이지는 않았다. 결국 운영체제를 탑재하여 사용자의 필요에 따른 앱을 설치해야 스마트폰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스마트폰의 개념을 필자 나름대로 정의해본 것이다. 그런데 이 스마트라는 외국어의 쓰임새가 점점 넓어지더니 요즘은 스마트 공장, 스마트 슈퍼까지 등장하였다. 스마트폰이 휴대폰의 수요를 획기적으로 넓혀서 소비시장의 기린아로 등장했으니까 스마트한 것, 똑똑한 것들에다 스마트라는 이름을 붙여서 또다시 영광을 맞이하겠다는 것 아닐까? 하지만 한번 재미를 봤다고 계속 뭔가 좋은 일이 또 생긴다는 보장은 없다. 약간의 자동화 설비, 약간의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보강하면 스마트 공장이 되고 이를 정부지원금으로 보전해서 장려한다는 모양새가 정말 어설퍼 보인다. 중소상인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 규모는 그대로 둔 채 스마트 슈퍼라는 무인점포를 확대하고 있지만 빈번한 도난사고를 보면 불안하기만 하다. 이런 게 정말 스마트라고? 스마트를 여기저기 갖다 쓴다고 될 일은 아닌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사람이 임의로 쓸 수 있는 것이라 변화무쌍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인간의 지적 체계에 혼란이 발생한다. 스마트라는 말을 살펴보는데 앞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 도구라 할 수 있는 정의와 개념의 뜻부터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     


정의(定意)와 개념(槪念)은 필자도 흔히 혼용해서 쓰지만 엄격히 보면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다. 수학에서는 흔히 개념에 앞서 정의가 먼저 등장한다. 삼각형은 꼭짓점이 3개이고 변이 3개인 도형을 말한다. 이런 것은 정의다. 정의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수학자들이 그렇게 정의하면 정의가 된다. 하지만 개념은 발전적으로 포착된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든지 빗변의 제곱은 다른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든지 하는 특징들은 추가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정의가 있고 나서 후차적으로 공부해서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 개념은 공부를 하면서 능동적으로 포착되는 것이다.     


반대로 개념이 발전하면서 정의가 확립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정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출시할 때에는 이미 그 개념을 발전시켜서 이런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라고 정의를 했겠지만 그 전에도 휴대폰을 스마트하게 만들어보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알람 기능, 라디오, TV 시청까지 가능하게 되었고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아이폰 이전에도 휴대폰의 기술적인 발전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기억을 해 본다. 부글부글 끓듯이 스마트폰의 개념은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아이폰이라고 정의한다. 컴퓨터처럼 운영체제를 사용하며 앱을 설치하여 확장성을 갖춘 휴대폰이라는 것이다. 개념보다 정의가 늦게 나왔다. 삼각형의 정의라는 것도 진지하게 따져보면 개념에 뒤따라 나왔는지도 모른다.     


정의와 개념은 이렇게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상승 발전하는 모델이다. 개념의 폭발적인 발전은 정의에서 마무리되고, 정의를 바로 세우면 개념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어떤 학자는 이런 것을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해서 거시적인 모델로 만들어 사회 변화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거창한 범위까지 보지 않더라도 이런 변화들은 흔히 목격된다. 일상적으로 정의와 개념은 보완적인 성격을 가지면서도 모순된다. 이 둘은 서로 형태를 바꿔가면서 서로의 자리를 차지하며 변화 발전하는데 이는 변증법적인 전화(轉化)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 선진국에서 그럴싸한 개념이 나오면 대단한 경전을 발견한 것처럼 싸구려로 베껴서 국가 정책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종종 나온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도 독일의 어떤 학자가 논문에 한 번 써먹어 본 것에 불과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글줄에 온통 도배를 하더니 요새는 장관이 국가 시책이라고 내세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에 불과하다. 이에 대비하자는 말은 통하지만 이런 것을 앞당기자고 하든지, 새로운 세상이 오니까 납작 엎드려야 한다는 식의 언사는 부적절하다. 어떤 글에서는 아예 ‘4차 혁명’이라는 이해될 수도 없이 우스운 단어까지 나왔다. 그럴싸한 마케팅 용어로는 몰라도 정의와 개념으로 포착되어 유효하게 사용할 수 없음이 밝혀진다.     


과학적인 결론과는 상반된 방역 조치로 애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소식을 계속 듣게 된다. 생명이 달린 문제에도 현실 타산이 안 되는 지경이다. 이런 마당에 정의와 개념 같은 논리적인 언어들은 아예 기대하기도 어렵다. 스마트, 4차 산업혁명에 백신만능까지 설익은 개념과 정의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결국 기본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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