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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asel Aug 31. 2021

스털링(Stirling)

스털링 성과 마리 드 기즈 공주, 그리고 수잔

2018년 8월.


스터링 올드 타운


스털링 당일치기 여행 


글래스고에서 근 1년을 함께 지낸 같은 수잔이 며칠 전 공부를 마치고 브라질로 떠났다. 수잔은 중국인 유학생으로, 나랑 다른 학교에서 다른 공부를 했지만 기숙사의 옆 방에서 묵으며 나와 함께 유학생활을 함께 한 친구다. 1년을 함께 지내며 우리는 언제나 '가까운 곳으로 여행 가자, 하루 자고 밤새 내리 떠들자'며 재잘거리곤 했건만. 궂은 날씨로 하이랜드와 호숫가, 산은 모두 포기하고 우리는 결국 가까운 스털링으로 성, 스털링 캐슬을 보러 떠나게 되었다. 성을 보자는 것은 수잔의 아이디어였는데, 수잔은 왕과 왕비가 사는 호사스럽고 아기자기한 그런 궁전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6년 전, 스털링 성의 그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사뭇 그 기대가 깨질까 염려스러웠는데, 그래도 우리의 함께했던 1년을 기념하기에는 그 나름 적합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스털링은 글래스고와 에든버러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로, 스코틀랜드의 역사에서는 기념비적인 도시다. 엘리자베스 1세와 마찬가지로 여왕의 자격으로 스코틀랜드를 다스렸던 메리(Mary, Queen of Scot)와도 연관이 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여러 전투들이 스털링 근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투어 상품에는 종종 스털링도 포함이 된다. 나는 2012년 영국 여행을 하면서 에든버러에서 시작하는 성배 투어(Holy Grail Tour)에 참가했었는데, 그때 짧게나마 스털링 성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성만 보고 도시를 둘러볼 기회가 없어, 나로서도 스털링의 곳곳을 훑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털링에 가는 날은 흐렸다. 도시는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 비하면 아주 작았고, 올드 타운을 올라가는 길목에는 안 그래도 스산한 날씨 덕에 음울한 도시의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블러디 스코틀랜드'라는 탐정 소설 공모전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교회의 아치 아래에 있는 작은 스테인드 글라스


성으로 향하는 올드타운에는 스털링 성에 다음가는 볼거리인 홀리루드 교회(Holy Rude Church)가 있다. 16세기 사람인 제임스 6세가 대관식을 치른 교회라고 하니, 그 역사가 대단한 곳이다. 번쩍거리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애비(Westmister Abbey)와 비교하면 아주 작고 소박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애비와 이곳, 홀리루드 교회가 영국 섬 전체에서 공식적으로 대관식이 이루어진 두 곳의 교회라고 한다. 교회의 크기는 작지만, 천장이 아주 높았는데 특히 가장 높은 아치의 꼭대기에 아주 작은 스테인드글라스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작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천사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들에게로 전달하는 전령으로 여겨진다. 즉 신의 말씀을 전하는, 가장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천사다. 
  


관광책자에 소개될 때의 스털링 성 이미지, 출처는 Daily Record (www.dailyrecord.co.uk)
스털링 성 앞의 아이스크림 트럭. 너무 추워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원래의 목적이 '성'을 보기 위한 하루 반나절 일정의 여행이었으므로, 우리는 홀리루드 교회를 둘러보고 곧장 스털링 성으로 갔다. 우리는 시간의 대부분을 성을 둘러보는 데 썼는데, 막상 집에 와서 카메라를 뒤져보니 성 안에서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다. 이는 아마 비에 젖은 스털링 성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운 성과 다르게 너무나 침울해 보여 사진을 찍을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털링 성은 내가 6년 전에 보았던 그대로 스산했고, 날이 흐려(언제나 그렇듯) 성 내부의 정원과 정원의 조각들은 기괴하고 어두운 마법에 걸려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내판에는 이 성이 스코틀랜드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건물이며, 스코틀랜드의 역대 중요한 왕과 왕비, 여왕이 살았던 곳이라는 문구들이 적혀 있었지만 현재의 쓸쓸한 모습으로 르네상스를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같은 궁전을 상상했다는 수잔은 물론 실망했다. 가뜩이나 마지막 여행이라며 배꼽이 보이는 얇은 티에 점퍼만 걸치고 나온 수잔은 궁전 안에서도 비에 젖은 생쥐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추워서 집에 얼른 가자는 걸 혀를 끌끌 차다가도, 멋을 부리고 사진을 찍고 싶었다는 그녀의 다소 귀여운 발상에 난 그냥 웃고 말았다.

6년 전, 수잔보다 조금 더 어렸을 적 20대의 나는 스털링 성에 와서 이곳에 살았다는 프랑스의 공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스털링 성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와 연관이 깊은 성인데, 그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어머니가 바로 프랑스에서 건너온 공주 마리 드 기즈(
Marie de Guise)였다. 6년 전, 스코틀랜드의 역사 따위는 관심도 없었지만 성에 적힌 안내문에서 프랑스 공주가 이곳으로 시집와 살았다는 것을 보고 난 뭐랄까,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 생활 같은 것을 상상했던 것 같다. 수잔이 작고 스산한 스털링 성의 모습에 실망했듯,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프랑스 땅에서 유럽의 변방 북쪽 끝으로, 1년 내리 춥고 비가 오는 땅으로 온 공주는 얼마나 낙담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16세기의 공주를 동정하는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6년이 흐른 후 예상치 못하게 스코틀랜드에서 1년을 보낸 후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때 그녀에 대한 나의 감회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마침 궁전 내의 가이드가 있어 그녀에 대한 설명과, 궁전 벽을 장식한 유니콘 태피스트리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자면 마리 드 기즈는 자발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6년 전에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마리 드 기즈라는 공주는 울며불며 팔려오듯 시집을 온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녀는 프랑스에서도 막대한 재산을 가진 집안의 공주로 영국 국왕 헨리 8세(앤 불린을 포함한 5명의 왕비로 유명한 그!)도 탐내던 정략결혼 상대였으나, 과감하게도 헨리 8세의 청혼을 세 번이나 거절했다. 대신 선택한 것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인데, 제임스 5세는 그 당시 군주로서는 파격적으로 결혼 전에 그녀에게 스코틀랜드의 생활은 프랑스에서의 그것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왕비가 되었을 때 어떻게 그녀와 미래를 꾸려나가고 싶은지를 적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역시 물론 정략결혼이었겠지만, 조금이나마 그녀의 상황을 배려하는 듯한 제임스 5세 쪽이 마리 드 기즈의 큰 키를 칭찬하면서 '가장 바람직한 키'라며 그녀의 외모를 품평한 헨리 8세보다 조금 더 로맨틱하게 들렸다. 그리고 헨리 8세의 여인들이 모두 최후가 불행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형벌, 출산 중 사망, 성에 고립, 파혼, 이혼...) 마리 드 기즈의 선택은 옳았다. 


하지만 공주는 프랑스 사람이었고, 가톨릭 신자였다. 어쨌거나 자발적인 의지라고는 하나 그녀는 외지에 뚝 떨어진 이방인이었을 테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어를 배우고, 낯선 생활 방식을 익히고,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궁전의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정치적인 감각과 인내심, 그리고 결단력이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내가 만난 여성 가이드는, 그녀가 일반 대중에게 그냥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어머니로만 알려져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 힘든 일은 그녀는 '너무나 훌륭하게(exceptionally well)'하게 해냈다면서. 그리고 마리 드 기즈와 제임스 5세의 결혼을 기념하는 태피스트리에 대해, 왜 하필이면 유니콘이 기념비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유니콘은 단지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아니라 중동 지방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보편적 상징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기에 따라, 자가 치유 능력으로 죽음에서도 부활하는 유니콘을 부활한 예수로, 혹은 궁극적인 사랑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사냥을 당한 유니콘은 목숨을 잃지만, 곧 다시 부활하고, 그 유니콘을 가둔 정원에서는 풍요로운 과실이 맺힌다고 했다. 요컨대, 유니콘 태피스트리는, 메리 드 기즈와 제임스 5세의 결혼과 그 결혼생활의 장소인 스털링 성을 상징하는 종교와 정치, 문화에 관한 다양한 상징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왕비의 내실, 복구를 한 모습이다. 사진 출처는 https://blog.engineshed.scot/2017/02/03/181/


궁극적인 사랑도, 부활도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는 더 이상 마리 드 기즈가 불쌍하고 가련한 공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나 같은 이방인 여자였겠지. 물론 그녀는 프랑스 공주였고, 나야 더 먼 땅에서 날아온 그저 동양인 유학생이지만. 그래도 익셉셔널리 웰(exceptionally well) 하게 이 땅에서 살아남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이방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쩐지 내게 희망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삶이 행복했을지 불행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그녀는 그녀의 의지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무엇으로 향하는 길이었든 간에. 죽음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순간들과, 환희로 다가오는 부활의 순간을 드물게 경험하면서. 


가이드의 설명에 홀딱 빠져있는 나 때문에 수잔은 지루해했다. 유니콘에 대한 설명까지 다 듣고 나서 궁전을 빠져나오자 수잔은 아웃렛에 가서 외투를 하나 사야겠다고 했다. 뭐든 걸쳐야지 너무 춥다면서. 하지만 성을 빠져나가기 전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왕과 왕비가 앉았던 접대용 홀에 앉아 기념사진을 남겼다. 음산하기 짝이 없는 스털링 성은 수잔의 기대와는 다른 곳이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그 옛날 왕족들만 앉을 수 있었던 등이 높은 의자에 앉아 우리의 마지막 여행을 기록했다. 



이번 여행의 동행인인 수잔은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가정환경이 일반적인 중국 친구들과는 또 다르다. 부모님은 수잔이 어릴 적 브라질로 이민을 갔고, 두 동생들은 브라질에서 태어나 외양은 중국인이지만 서류 상으로는 브라질 사람이라고 했다. 수잔의 부모님은 처음에는 수잔도 브라질로 데리고 갔지만 어린 수잔이 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외로워하자 다시 수잔을 중국의 조부모님 댁에 맡겼다. 그래서 수잔은 늘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고 늘 정착할 만하면 어딘가로 떠나야 하고, 친구들이며 가족들과 매번 이별해야 하는 자신의 삶이 싫다며 이제는 어디든 정착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어디든 발을 붙이고 싶어 했던 수잔과 어디든 여기가 아니면 좋다는 나. 유학이라는 명분 이외에는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가 너무나 달랐던 둘은 그래도 낯선 외지에서 만나 1년을 함께 보냈다. 떠나고 싶다는 마음에 찾아온 이곳에서, 그래도 낯선 동양 여자로 지내는 데 있어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있다는 게 돌이켜보면 내게는 큰 위로였던 것 같다. 나보다 어리고, 한국의 갸름한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에게 의지하는 수잔이 있어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익숙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제 수잔은 떠나고 없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로 가든, 어디에서 정착을 하든, 부디 행복했으면. 그래서 언젠가는 그녀가 그녀만의 성을 지을 수 있기를. 우리는 프랑스의 공주가 아니며 정략결혼으로 스코틀랜드에 정착하는 일 따위는 없겠지만, 나는 어디를 가든 그녀가 스털링 성의 메리 드 기즈처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스털링 성과 스코틀랜드에서의 시간들을 웃으며 다시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코틀랜드식 영어가 얼마나 알아듣기 어려운지, 날씨가 얼마나 궂었는지, 우리가 그 와중에 어떻게 밥을 해 먹었는지... 그런 소소한 것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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