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혼자 걷는 길 - 바라던 풍경 안에 내가 존재하는 희열
9월 5일 인천을 떠나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이틀간의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리옹에 도착했다. 르 퓌에 가는 방법은 파리에서 생테티엔으로 가 TER로 갈아타거나, 리옹에서 TER로 갈아타는 방법이 있다. 나는 리옹이라는 도시가 궁금해 한 번쯤은 와 보고 싶어 리옹을 선택했다.
그렇게 리옹을 둘러보고 잠든 다음날 새벽, 겨드랑이 부분이 너무 가려워서 잠깐 깼다. 설마 베드벅일까 하고 너무 놀라서 화장실에 가 확인했는데 일단 물린 자국은 베드벅같은 느낌은 아니라 안심한다. 유럽 여행에서 소매치기만큼이나 두려운 여행자의 적, 베드벅. 아니길 기도하며 다시 누웠는데 애애애앵~ 하는 모깃소리가 들린다. 모기였다니. 짜증 나면서도 반가운 이상한 느낌이다.
이내 '알라아아~~~~'하는 누군가의 폰 알람이 울리는 바람에 그 소리에 깨어나 5시부터 뒤척인다. 접근 10m 반경부터 알 수 있던 체취가 심상치 않은, 히피 스타일의 패션을 자랑하던 이의 알람이다.
7시 조식을 1등으로 먹는다. 친절한 직원의 따끈한 핫케이크에 마음이 녹는다. 짐을 마저 싼 뒤 노닥거리다 출발한다. 아침에 추적거리는 비가 내려서 역사로 걸어가는 길이 조금 우울해 보인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등산 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쓴다. 제법 많이 내리는 비에 약간 우울할지언정 두근거리는 마음은 누를 수 없다. 르퓌로 향하는 열차를 타는 나는 누가 봐도 순례자로 보이는 행색. 열차를 타고 생테티엔 역에서 버스로 갈아탄 뒤 르퓌로 이동한다.
(내가 여행을 했던 2017년 9월에는 생테티엔에서 르 퓌로 가는 노선이 공사 중이라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현재는 TER를 탈 수 있다고 한다.)
생테티엔으로 향하는 기차. 깨끗하고 작았다. 쾌적했다.
생테티엔에서 르퓌로 향하는 버스 환승. 큰 배낭을 멘 순례자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테티엔 역.
르퓌 역.
이제 순례자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순례를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어 두근두근했다.
차가 밀려서 불안 불안하긴 했었다. 주말이라 관광객뿐만 아니라 오늘 시작하는 순례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불안한 예감은 적중한다.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성당 소속 지트를 전부 예약해서 자리가 없단다. 관광안내소 직원분이 안타까워하며 GR65 초입새에 있는 마을 외곽 지트를 예약해 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이야..... 관광안내소 직원분은 친절하게도 오늘과 내일의 지트 예약을 도와주고 지-트 발음도 가르쳐준다. 후에 깨달았지만 많은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가르쳐주는데 굉장히 적극적이다.
관광안내소. 나는 안내서를 파리에 있는 프낙 fnac에서 샀지만 여기야말로 모든 순례길 안내서가 총망라되어있다.
첫째 날 숙소
첫째 날 숙소 실내 모습.
지트 예약 도움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광장에서 잠깐 노닥대다 만난 아저씨가 있다. 독일에서 왔다는 그는 엑셀로 빽빽하게 정리한 여행 일정표와 지도를 보고 있었다. “너도 순례를 시작하니?” “응! 너도 그렇구나!” “길에서 보면 인사하자!”하고 아주 평범한 인사를 나눈다. 그 후 예약한 지트에 들어가는데 그 아저씨가 나오고 있다. 놀라움, 반가움에 인사를 또 나눈다. 알고 보니 심지어 같은 방, 옆 침대. 순례길의 좁은 세상이 시작되었다.
지트에 짐을 두고 마을 구경을 시작한다. 꿈에 그리던 노트르담 드 르퓌에서 검은 성모상을 본다. 북적이지만 고요한 평화가 느껴진다. 작지만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성당, 그 안의 생작(야고보 성인의 프랑스어 이름) 성상에 초를 봉헌하고 기도한다. 모든 순례자들의 성인이자 보호자이신 야고보 성인이시여, 부디 무사히 이 길을 끝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르퓌의 검은 성모상. 많은 관광객들이 이 성모님을 보러 르퓌를 찾아온다.
순례자들의 보호 성인이신 야고보 성인.
순례자 여권을 구매하기 위해 성당 바로 안에 있는 기념품샵에 들어간다. 순례자 여권을 사기 위해서는 노란 카드에 이름 국적 주소 등등 여러 정보를 기재해야 한단다. 또 다른 순례자의 도움을 받아 칸을 다 채우고 직원분께 드린다. 조가비 3.5유로에 순례자 여권 5유로. 이것저것 설명해주시는데 속사포 같은 프랑스어. 주위에 있던 모든 프랑스인들이 각자 아는 영어 단어를 모아주기 시작했다. 간간이 알아들은 내용으로는 ‘매일 묵는 곳에서 도장을 찍어야 한다, 내일 7시에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있다’였다. 다행히도 모르는 내용은 없었다.
성모자상이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길
근엄하게 날 보고 있는 붉은 성모자상 입장권 판매 아저씨.
르퓌의 상징이라 할 수 붉은 성모상을 보러 올라간다. 우박이 섞인 소나기가 갑자기 내 머리를 때린다. 겨우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가 가로로 내리는 풍경을 보니 갑자기 순례길의 미래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나니 갑자기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무슨 날씨가 이래!!! 하고 폭소를 터뜨린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도 우박을 맞았다.
풍경은 아름다웠으나 우박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사람들이 다 비와 우박을 피해 도망가서 사진 찍기에 좋았다.
자욱이 안개가 끼인 시내를 내려다보는 성모자상.
비+우박 때문에 포기하려고 했던 성 미셸 성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항상 그리던 장소. 원했던 이미지. 내가 바라던 풍경 안에 내가 존재하는 희열을 맛봤다. 신기할 정도로 하늘이 맑고 파랗게 개어서 완벽한 풍경을 선물 받았다. 감사 기도가 절로 나온다. 조용한 성소 안에서 무사히 순례를 마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성 미셸 성소로 이동하는 길. 저 멀리 판타지의 한 장면 같은 성소의 모습이 보인다.
생 미셸 성소에서 본 르퓌 전경. 그림 같은 마을 모습이다.
판타지의 한 장면 같은.
르퓌는 렌틸콩과 레이스가 유명하다. 성 미셸 성소에서 시내로 돌아가려는 길에 어느 레이스 샵에 들어간다. 아니 이건 빨려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두 할머니가 날 데리고 레이스 만드는 것을 보여주시고 하나하나 설명해주시기 시작한다. 무료했던 두 분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예쁜지(?!), 이 레이스가 얼마나 섬세하고 예쁜 것인지 이야기하셨다. 덕분에 보 beau , 벨레 belle , 마늬픽 magnifique 등의 단어를 배웠다. 안 그래도 예쁜 공예품 보면 환장하는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맘 같아서는 몹시 아름다운 테이블보를 업어왔겠지만 짐 무게를 늘릴 수 없으니 컵 받침 우리 가족 5명분을 샀다. 비에 젖지 말라고 창고 저편에 숨어있던 비닐을 꺼내 거기에 담아주시고 봉 슈망 Bon chemin! 하고 인사까지 해 주신다.
르퓌에 가면 엄청 많이 볼 수 있는 레이스 샵.
무료했던 주인 할머니는 시범까지 보여주신다.
미친 척 기념품도 샀겠다, 저녁은 꼭 여기서 유명한 걸 먹어보고 싶다. 렌틸콩 요리를 먹을 거야. 관광지 중심가의 음식점은 왠지 마음이 가지 않는다. 때문에 외곽의 가정집들과 대성당 가는 길목 사이의 식당에 들어갔다. 아직 오픈 안 했길래 20분을 기다린다. 7시 땡 하고 바로 주문!
오늘의 메뉴나 오늘의 접시?를 추천한다 하길래 (이 대화를 하기까지 그들의 이상한 영어 × 이상한 내 불어 단어 ×구글 번역기의 대 환장 콜라보레이션이 있었다) 오늘의 접시라는 렌틸콩이 곁들여진 소시지를 주문했다. 하우스 와인 한잔도 주문. 맛이 제법 괜찮다! 잘게 썬 베이컨과 렌틸콩 볶아, 익힌 소시지와 샐러드를 함께 낸 성공적인 메뉴 선택이었다. 내친김에 디저트로 3종류 치즈를 주문한다. 우선 치즈 맛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구나 하고 놀라고, 처음 먹어본 꺙탈 치즈에 몹시도 감동했다.
비주얼은 좀 그런데... 맛있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동네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동네 터줏대감으로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은 내가 먹는걸 흥미롭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때 이 레스토랑 주인 내외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온다. 아이들이 신나게 부모님과 비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내가 다 흐뭇하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그림도 그린다. 내일 6시 반 조식을 먹고 7시 미사 드리자 순례자 축성도 받고 오자 생각한다. 감사기도가 절로 나온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길을 걷도록 맘먹게 해주셔서, 또 여기까지 아무 탈 없이 다다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제 가는 길을 비추시어 제가 길을 잃지 않고 그곳에 다다르게 해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