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의 1515km 순례길

가기 전의 이야기

by 소아


숨을 쉬고 있는데도 호흡이 가쁘게 느껴졌다.

들숨 날숨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볼 정도였다.


좋은 사람들과 괜찮은 직장, 걱정 없는 행복해 보이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볕이 가득해 보이던 생활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차분히 찾아온 친구가 있었다. 이유 없이 찾아온 이 우울이란 친구는 나를 화로 가득 찬 귀신으로 만들어갔다. 욕지거리를 내뱉고, 신경질적으로 타이핑을 했다. 먼 곳에 있는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 음악을 몹시도 크게 틀어 놓고 악을 썼다. 이렇게 하면 좀 풀릴까. 그렇지 않았다.


꽤나 유행처럼 번져 이제는 많은 이들이 다녀온 산티아고 순례길.

대학 시절 끝무렵에 친구가 내게 알려준 이 길은

‘이런 나라도 이 길을 걷고 나면 조금은 온화해질 수 있을까?’
하는, 나에게는 작은 희망 같은 것이었다.

짧은 휴가를 받아 다녀온 100km. 스페인 내 산티아고 순례길의 갈래 중 하나인 프랑스길. 그 길 위에 있는 소도시 사리아 Sarria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까지의 3박 4일의 순례길은 나에게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선 이 길은 생각보다 엄청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리고 힘들다!! 사진에서만 보았던 아름답고 고요한 평원은 없었고, 예측할 수 없이 오락가락한 날씨와 산길이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길을 걷는다는 공통점만으로도 친구가 되고 서로 의지 하는 길. 나는 기적 비슷한 것을 조금 맛보고 왔다.




그 짧은 순례길 둘째 날, 차갑고 어둑한 아침 혼자 길을 떠나기 두려워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같은 알베르게에서 출발하려던 노부부가 있었다. 순례자들이라면 흔히 오가는 질문 중 하나. ‘오늘 어디까지 가니?’ 유난히 푸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들에게 나는 도움을 요청했다. 같이 걸어줘요 하고.

그들은 르 퓌 앙 블레 Le puy en velay부터 걸었다 했다. 처음 그 도시 이름을 들었을 땐 귀를 의심했다. 대체 어디 붙어있는 곳인지, 어디서부터 걸은 건지 감 조차 오지 않았다.
그 부부는 이미 걷기에 통달한 전문가. 순례길 초보였던 나에게 걷기 요령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 삔 발목을 살피며, 동이 트기 전의 새벽길을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며 길을 안내해주었다. 이 천사 같은 부부는 내 안에 그 도시 이름을 새겨두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코 앞의 기쁨의 언덕 Monte do gozo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네가 언젠가 꼭 그 르 퓌 Le puy부터 걸어 본다면 정말 좋을 거야!”

지나가듯 덕담같이 한 이야기였을 테다. 하지만 내 안에 자리 잡은 르 퓌 앙 블레 Le puy en velay는 어느 순간부터 조심스레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짧은 순례길의 마법 같은 치유효과(?)가 사라지고 우울감과 분노감에 잠기어 갈 때마다 그곳의 사진을 찾아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가자.





차근차근 비행기표를 끊고, 여행 계획을 짜고, 인수인계 파일들을 정리했다. 정든 이들, 월급과의 이별은 아쉬웠지만 그 공간에서 벗어나니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약을 먹지 않아도 화를 다스릴 수 있었다.

얼마간 나를 추스른 뒤 65리터짜리 배낭을 들쳐 메고 찾아간 프랑스 남부의 르 퓌 앙 블레 Le puy en velay.
그리고 그곳부터 차근차근 천오백여 km를 걸어 스페인 북서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에 닿았다.

르 퓌 앙 블레 - 프랑스 중부의 작은 도시. 10세기 말부터 흑성모상의 순례지로 유명한 이 도시는 카톨릭 신자들의 성지이다. 현재도 많은 프랑스 및 유럽 은퇴자들과 젊은이들이 레포츠 혹은 영적인 목적을 위해 찾아들고 있다. 나는 이 작은 도시부터 시작하여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에서 끝나는 GR65, 그리고 GR65와 이어지는 프랑스길을 걸어 두 달 동안 약 천 오백여 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쳤다.


다운로드.png 이미지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GR_65#/media/File:Stjacquescompostelle.png


나더러 이 길을 걷고 나니 사람들이 어떠냐고 물었다.

걷고 나서 어떠하다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나는

약을 먹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일출과 일몰을 보았다.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울었다.
사람이 좋아서 함께 별을 보았다.
사람이 싫어서 도망치기도 했다.
나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레온부터 엄마와 함께 한 카미노는
어떻게 보면 작은 전쟁 같기도,
즐거운 꿈같기도 한 시간이었다.

이 길을 걷기 전까지 나에게 행복이란 이런 것이었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좋은 선물을 받았을 때, 오랜만에 반가운 이를 만났을 때 느껴지는 순간적인 고양감.
하지만 이 길에서 나는 조금 다른 행복감을 느꼈다. 충만하다는 걸 감정으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감정의 모양이 조금 더 말랑말랑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길을 걷고 나는 온화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도를 깨우치지도 못했다. 아직도 불안하고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잠깐 숨을 돌리며 마주한 순간들과 사람들은 내 안의 반짝이는 양분으로 자리 잡아 조금 더 괜찮은 내가 될 수 있게 해 준다. 그 아름다운 기억들을 이렇게나마 기록해 보고자 한다.


진심으로 당신들과 함께 걸어서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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