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껴 본 적 없는 평화

3. 혼자 걷는 길 -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by 소아

9월 11일 월요일

GR65 Combriaux - Saugues 17.4km



어제 함께했던 알랭 3인방이 함께 9시에 출발하자 하여 흔쾌히 오케이 했다. 길도 길지 아니하겠다, 상큼하게 같이 지트를 나선다. 자욱이 안개가 낀 아침, 예상치 못한 추위가 발을 동동 구르게 한다. 알프레드는 문 밖까지 나와 배웅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거든 언제든 마음 쓰지 말고 전화하라며 미암 미암 도도의 자신의 전화번호를 기억해 달라고 한다. 내가 알프레드에게서 배운 '일 페 프와!'를 연발해주니 세상 해맑게 웃는다. 추우니 조심하라고 진짜 할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배웅해준다. 난 할아버지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만약 할아버지가 있다면 이 분 같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사진을 찍지 않은 것이 아직도 후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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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시작하고 난 뒤 첫 번째로 만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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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흔적만 남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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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의 당나귀? 두 마리!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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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 부끄러움 다 내 것으로 만든 작은 성당.


길을 시작하자마자 가벼운 오르막길이 우리를 환영한다. 어제 후반보다는 확실히 리드미컬한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된다. 가다가 작은 소성당을 만난다. 당나귀도 만나고. 한 천주교 단체 사람들(형광색 띠를 두르고 있어서 엄청 눈에 띄는 분들이다)이 미사 드리는 거 구경하다가 가방으로 의자 쳐서 넘어뜨려서 엄청난 소리를 내 버렸다. 온 세상 부끄러움은 다 내 거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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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있어서 찍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이런 앤티크 한 차를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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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들어진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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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풍경. 포인트는 저 산등성이에서 이 사진을 찍는 위치까지 내려온 뒤 저 산등성이만 한 높이의 건너편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르막 내리막 환상의 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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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들른 성당. 알랭 무리와 떨어져 나와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monistrol d'allier 지나서 오르막을 오르는데 와 나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혼자 조용히 기도를 드리겠다고 알랭 무리와 떨어진 뒤라 그야말로 나 홀로 길 찾기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힘이 부치는 기분이 든다. 소나기도 자꾸 머리를 아프게 때리고... 고어텍스 점퍼로도 방어할 수 없는 정도의 비가 날 괴롭힌다. 중간 어디에선가 길도 한번 잃어버려서 헤매고 있는데 뒤에서 나만 보고 따라오던 프랑스의 덩치 큰 아저씨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본다. 로렌조라고 한다. 비는 금세 그치고 해가 쨍하니 비추어 우리를 다른 느낌으로 괴롭힌다. 로렌조와 나는 구글맵과 미암 미암 도도를 갖고 씨름하다 결국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다행히 길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빠졌어야 했을 길목에 다른 이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열심히 GR 마크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덕분에 로렌조랑도 이름 트고 했으니 좋은 게 좋은 것 이리라.

가다가 길가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누룽지와 쏘씨쏭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닭을 하도 풀어놓고 키워서, 닭들이 뭐 먹으면 쪼르르 온다. 그것들은 내가 흘린 누룽지 조각을 한번 맛만 보고 가버렸다. 소중한 누룽지를 나누어 줬는데 이리도 차갑다니.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보며 산등성이에서 먹는 점심은 묘하게 한국을 떠올리게 했다. 이런 평화로움을 대체 내가 느껴보긴 한 걸까. 아니, 애초에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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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길가에 앉아 점심을 먹다 찍은 사진. 이 사진으로 전 직장의 선배에게 보내 안부를 전하였다.


정말 우습게도, 한 시간마다 한 번씩 격한 배고픔이 몰려왔다. 내가 가진 음식들은 턱없이 부족했고, 배는 계속 먹을 걸 달라고 아우성쳤다. 슈퍼마켓이든 시장이든 작은 구멍가게든 뭐든 보였으면 좋으련만 이 프랑스 시골길에 있을 리가 없어 보였다. 마트를 발견하면 무조건 식량을 잔뜩 비축하리라 하고 마음을 새롭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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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그를 들어가기 전 볼 수 있는 나름 유명한 조형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오늘의 걷기는 언제나 그러하듯 갑자기 마을이 슝 나타나서 끝났다. 중간에 다시 알랭 3인방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마을에 입성했다. 그들은 나에게 카페에서 쇼콜라쇼를 대접해주었다. 프랑스에 온 손님이라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내가 예약한 지트는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고, 시설은 유스호스텔 같은 느낌이었다. 어제 묵었던 곳과는 상반되는 곳이었다. 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문득 깨달은 것이 폰을 아까 카페에 두고 왔다는 것. 등골이 서늘했다. 돈은 잃어버려도 카드랑 폰은 절대 안 된다! 그 짧은 거리를 내달려 허겁지겁 카페로 가보니 폰은 화장실 내가 놓았던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헐레벌떡 달려온 동양인이 세상 만물 다 얻은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핸드폰을 들고 나오자 카페 주인이 환하게 웃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까르푸에 가서 음식을 좀 많이 샀다. 정말 많이 샀다. 초콜릿 바 6개 묶음에 바나나, 사과, 큰 크로와상까지. 배곯아서 길에서 쓰러지느니 건강한 돼지가 되리라.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비가 내리고 너무 추워진다. 순례 시작하고 비가 아니 오는 날이 없다. 이쪽 날씨는 원래 이런 걸까. 샤워도 마치고 양말과 속옷도 빨아 넌 뒤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책을 읽으며 방에서 노닥거리는데 네덜란드에서 온 마리엣이 방에 들어왔다.
마리엣도 나와 같은 날에 르퓌에서 시작했단다. 그러더니 일요일의 성당에서 나를 보았었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프랑스어를 되게 잘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건 하필이면 옆에서 날 대변해주던 성당 직원이 말했던 것을 내가 말한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요가하는 것을 굉장히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요즘 자기네 나라에는 막 도입이 되고 있다며 여러 효과들을 물어보았다. 또 어쩌다 이 길을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에게 몇 가지 프랑스어 단어를 알려주었다. 난 정말 지트(gite) 발음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많은 프랑스인들과 프랑스어 구사자들의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마리엣 이후에도 수많은 프랑스인과 프랑스어 구사자들의 개인 레슨을 받았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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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호스텔 같던 지트의 침대. 마리엣은 낭만이 없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놨지만 나는 만족스러웠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간다. 메뉴는 전채 샐러드와 본식 밥, 닭 요리. 밥을 몹시도 먹고 싶었는데! 비록 인도 쌀일지언정 밥은 밥이다!!!! 내가 우와 밥이다 하고 너무 좋아하니 같은 테이블의 사람들 엄청 웃는다. 참나... 너희가 바게트 못 먹는 거랑 비슷한 거라니까?! 하고 웃으며 항변한다. 리옹 근처에서 왔다는 필립, 미국 올랜도에서 왔다는 로렌스와 조쉬, 프랑스 동북부에서 왔다는 마른 소피와 통통한 소피 그리고 나 이렇게 6명은 시끌시끌 식사를 시작한다. 어제 같은 지트에서 묵었던 알랭이 찾아와 화이트 와인을 주고 가서 나만 화이트 와인 후 식사로 제공되는 레드 와인까지 맛봤다.

식사 중, 와인이 조금 남았길래 내 잔에 다 따라버리고 새 와인을 가져오는데 필립과 소피들이 싱글싱글 날 향해 웃는 게 아닌가. 내가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물어보자 통통한 소피 왈, 미혼의 처녀가 와인을 끝내면 올해 안에 결혼한다고 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이런 젠장! 내가 “안돼!!!!!”하고 괴로워하니 모두가 즐거워한다. 이 나쁜 사람들! 프랑스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며 웃는 걸 처음 보는 것 같다. 제일 즐거워하던 이 두 소피들은 그녀들이 걸음을 마무리한 나스비날에 닿을 때까지 얼굴을 볼 때마다 놀렸다. “결혼식 하면 한국으로 초대해줘~!”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든다. 화장실을 자주 간다는 마리엣이 미리 사과를 한다. 그럴 필요 없어요, 마리엣. 뜬금없이 새벽 1시에 깬 것 말고는 푹 잤다. 꿈도 꾸지 않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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