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혼자 걷는 길 - 영혼이 자유로운 이들의 기부제 지트
오늘은 조금 작정하고 많이 걷기로 한 날. 6시 30분 조식을 위해서 조금 일찍 일어났다. 마리엣을 깨울까봐 짐을 다 들고 복도로 나와 가방정리를 했는데, 건너편 방에서 자던 두 명의 소피를 깨운것같다. 왠지 모를 미안함이 든다.
조식을 가득 담아와 열심히 먹고 있는데 알랭 3인방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온다. 오늘은 30km정도라 그들은 6~7km정도를 차로 앞서 간다음 걷기 시작할거라고 함께하지 않겠냐고 묻길래, 나는 최대한 내 힘으로 걸어보겠다 하고 감사를 표한다. 식사를 마무리 할 때 쯤, 더욱 많은 순례자들이 식당을 채운다.
쏘그를 뒤로 하고 걸어가는 들판. 매일 아침 보았던 영롱하게 빛나는 아침이슬이 아직도 생생하다.
해가 뜨는 순간의 즐거움. 하지만 곧 이 즐거움은 더위를 향한 짜증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아직 동이 트기 전, 걸음을 재촉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는데 앞에 가는 커플이 있길래 자세히 보니 순례 첫날 만났던 미국에서 온 매튜와 마리다. 반갑게 인사한 뒤 매튜 마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아침길을 열었다. 어제부터 마리를 괴롭히던 뒤꿈치의 작은 물집은 오늘도 여전히 마리를 괴롭히는 모양이다. 마리는 그닥 속도를 낼 수 없었고, 나는 그들과 안녕했다.
중간에 잠깐 비를 피하던 마을 쉼터. 저 멀리 남색 옷을 입은 사람이 로렌조이다. 이 앞의 꽃보라색 수건을 걸친 이는 매일같이 만나던 분인데, 결국 서로 통성명을 하지 못하고 다시 만나지 못했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한동한 오롯이 나 혼자 걷는 길이 이어진다. 확실히 이 지역은 해발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너무 춥다. 걷는 속도가 비슷한 두 명의 소피들과 길을 함께 잃어버렸던 로렌조, 그리고 이름을 모르겠는데 나만 보면 곤니치와 하면서 신나게 날아다니는 프랑스 할배 3인방과 계속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그들이 일본어로 대화를 시도했을 때 일본어로 답해 준게 실수였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구사하는 일본어에 내가 답변하자 굉장히 감동하여 그 뒤로도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길 자체의 난이도는 높지 않았지만 이틀정도 걷고 돌아가는 이들도 많아 상대적으로 길이 한가해진 느낌이다.
한동안 GR마크가 안보여서 불안하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행복해진 바람에 찍은 사진. GR마크는 안보여서 불안할 때 쯤 하나씩 볼 수 있다. 프랑스길의 노란 화살표가 어디에나 자주 볼 수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동안 이어지던 숲길.
생 로크 성당을 지나는데 한국인 아니면 일본인으로 보이는 분을 뵈었다. 혹시 몰라 일본어로 '혹시 일본분이신가요?'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정중한 말을 건네봤다. 돌아오는 건 "저 한국사람인데..."
와!!!!!! 리옹 이후로 한국말을 한마디도 안했어서 입이 근질거렸던터라 반갑게 악수도 하고 인사했다. 이미 르퓌-산티아고 순례길을 경험하고 여러번 되 돌아 보셨다는 그야말로 카미노 숙련자. 생장에서 르퓌까지 하는 이번 여정이 마지막이라며 웃으신다.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고 헤어진 뒤 왠지 신나서 모터를 단 것처럼 열심히 걸었다.
미암미암도도에 나오는 십자가이다. 이걸 보고 얼마나 신났는지 소피들에게 막 이야기 했는데 소피들은 감흥이 없었다. 내가 얘기해 준 후에야 알아 챈 듯 했다.
생트 알방 바로 전에서 소피들을 만났는데 지쳤는지 제법 속도가 느려져 있다. 함께 길을 걷다 소피들은 자신들이 예약한 지트가 다른 방향에 있다며 인사한다. 그렇게 마을 어귀에서 헤어진 뒤 한참 마을 근처를 뱅뱅 돌며 헤맨다. 생트 알방에는 몹시 큰 종합병원이 있었다. 병원 안을 한참 걸어다녔다. 이런... 그렇게 헤매다가 다행히 순례자 목상이 있는 오늘의 숙소에 도착한다.
이 지트는 10년전에 순례를 했던, 영혼이 자유로워보이는 분들이 운영하는 기부제 지트. 반가운 웰컴 드링크로 따뜻한 차를 건네며 따숩게 맞아준 프랑소와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귀여운 손녀와 영상통화를 마치고 웰컴드링크로 따뜻한 티를 내 주었다. 그녀와 나는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길과 날씨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평화로운 인사 후 방에 들어가보니 체코에서 온 아가씨, 안나가 있었다. 서로 이 곳의 길을 걷게 된 계기를 묻자 같은 이유였다. 영적인 평화, 종교적 이유. 나는 일을 그만두고 왔다고 하니, 안나도 일 그만두고 왔다며 빙긋 웃는다.
내가 빨래를 널고 있는데 어제 같은 지트에서 같이 식사를 했던 미국인 로렌스와 조쉬가 들어온다. 그러더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한다. 어떻게 왔긴 걸어왔지 하고 웃으니 자기들은 너무 힘들어서 택시를 탔다 한다. 그러더니 자신들이 스페인 프랑스길을 걸었을 때도 한국인들은 날아다니는 것 같이 걸어서 놀랐는데, 너도 날아다니느냐고 신기해했다. 그러면서 또 묻는다. 너 진짜 택시 탄거 아니야? 웃음이 터진다. 쨍 한 오후 볕, 차가워진 공기. 바람에 나부끼던 빨래와 그들의 웃음소리.
빨래를 널고 오니 정말 거짓말같이 이 지트에 필립이 들어온다. 필립 역시 어제 함께 식사를 했던 순례자. 이 마을은 쏘그에서 오기에는 꽤 먼 거리인데도 같은 테이블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던 이들이 셋이나 같은 숙소에 묵게 되었다. 그래, 순례길은 끝없는 우연의 축적이지. 새삼 깨닫는다.
오늘은 좀 피곤했는지 자꾸 짐을 놓고다닌다. 샤워 하러 가는데 상의를 두고 가서 방에 다녀오고, 또 이번엔 수건을 잊어 또 다녀오니 필립이 거실 소파에 앉아 날 웃으며 바라본다. “너 지금 피곤한게 틀림없어!” 라며 엄청 웃는다. 그만 웃어요 나쁜 아저씨야 하고 나도 비실비실 웃는다. 덕분에 fatigue라는 단어를 배웠다 하하.
오늘의 저녁식사는 묘하게 어제 저녁 식사를 함께 한 미국인 로렌스와 조쉬, 리옹 근처 사는 필립, 나, 그리고 지트 주인 프랑소와즈가 함께했다. 안나는 왠일인지 함께 하지 않았다. 식사는 따수운 채소스프로 시작, 프랑소와즈가 직접 기른 채소로 만든 유기농 샐러드, 그리고 프랑소와즈의 남편이 따온 버섯이 엄청 많이 들어간 크림파스타였다. 디저트는 사과무스에 딸기잼 포인트 그리고 쿠키.
아마 샐러드를 먹고 있을 때 였던것 같다. 프랑소와즈의 남편이 들어왔다. 소그 근처의 산에서 버섯을 채취해왔다고 하며 보여주는데 무지막지하게 컸다. 큰 게 내 머리통 반만했으니까.
모두와 신나게 식사를 하고, 각자의 나라 이야기를 했다. 프랑소와즈와 그 남편은 나에게 프랑스에서 여행할 땐 좀 더 자신감을 갖고 당당한(?!) 태도를 가지라했다. 그들은 내가 하는 행동 몇가지를 얘기해줬다. 웃을때 입을 가리고 웃는다든가 두 손으로 받는다든가 반목례를 한다든가. 이 행동들은 실은 나는 스스로 전혀 눈치를 못채고 있던 행동들이라 조금 놀라웠다.
시끌시끌하고 긴 식사를 마치고 숙소비를 냈다. 여기는 기부제. 첫날 묵었던 지트의 사랑스러운 할아버지 알베가 기부제에 돈 너무 많이 내지 말고 30유로정도 내라고 말했던 현실적인 조언을 기억하고 30유로를 냈다.
방에 들어가 안나에게 저녁 여부를 물으니, 안나는 자기 하루 예산이 4유로고 프랑소와즈가 공짜로 있어도 된다 해서 여기 있을 수 있는거라 하였다. 자기는 주로 캠핑을 하는데, 그저 샤워가능여부를 물었는데 재워준다며. 프랑소와즈의 따뜻한 맘에 조금 감동한다. 안나는 그렇게 4유로를 내러 나갔다.
모레, 글피 묵을 숙소를 고민하고 10시즈음 잠들었다. 내일은 조금만 걸을거니까, 하며. 옆방 로렌스의 코골이 소리가 온 건물을 울렸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