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혼자 걷는 길 - 오몽 오브락과 알리고와 사람들
일어나 보니 6시.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난 모양이다. 사방에서 아직도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7시부터 조식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먼저 나가서 방명록을 살핀다. 그 때 프랑소와즈가 아침인사를 건넨다. 시간이 되자 프랑소와즈와 둘이 오붓하게 아침식사를 한다. 평화로운 커피 한사발과 거칠지만 고소한 바게뜨에 감동한다.
전봇대의 무심한 듯 꼼꼼한 GR마크.
어제 프랑소와즈가 예약을 도와 준 오몽오브학의 지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날씨도 무난하겠다, 길도 무난하다. 아마 오늘은 좀 이르게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약간 기대해본다.
길은 항상 반전을 준다. 일찍 도착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몸이 힘들어 도착이 늦고, 거리가 멀어 늦겠다 싶으면 몸 어딘가에서 호랑이기운(?)이 솟아나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기도 한다. 오늘도 그러했다. 몸은 무겁고 왠지 어딘가 아픈것같기도 하고...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내 템포대로 맞춰 걸어보자 맘먹고 재촉하던 발걸음을 느슨하게 해 본다.
매일같이 날이 흐리다가 비가 세차게 내리다가 해가 반짝 뜬다. 비가 내릴 때는 정말 가차없다.
날씨가 흐릿하다. 르 퓌부터 길을 시작한 이래로 단 한번도 하루종일 맑은 날이 없다. 오늘도 여지없이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사진을 찍고 싶지만 내리는 비가 너무 많아 카메라를 꺼내기 두렵다.
중간에 일드프랑스에서 왔다는 가족을 만난다. 내가 주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여행사에서 일하다 은퇴한 아버지. 취미가 사이클인데 크게 한 번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무릎 수술을 해 격한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단다. 때문인지 걸음도 느리다. 너는 내 걷기 속도 동지구나 하고 웃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내와 딸은 레이싱하는 것처럼 시속 5~6km로 걷는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시트콤처럼 잠시 화장실을 들렀다 오는 그의 아내와 딸이 바람처럼 슝 지나간다.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길이 미끄럽다. 주르륵 두어번 미끄러진다.
8시쯤 출발한 길은 12시 언저리에 끝난다. 오몽오브락은 관광객들이 꽤 많아보인다. 낙농업이 유명한 오브락 지역에 왔으니, 꼭 이 지역의 유명 요리인 알리고와 트뤼파드를 먹어보겠다고 결심한다. 지나가는 레스토랑마다 메뉴판에 알리고가 크게 적혀있다.
어제 프랑소와즈가 예약을 도와준 숙소에 도착해보니 내가 1등이다. 무리도 아니다. 가장 적은 거리를 걸은 날이니까. 운 좋게도 지트 주인이 청소를 마친 참이다. 엄청나게 에너지 넘치는 주인은 민트향 웰컴드링크를 내어 주며 몸을 편안히 하라 한다. 그러면서 오늘 여자 혼자 묵는 사람은 너뿐이라 2인실을 혼자 쓸 수 있어~ 하고 찐하게 윙크를 한다. 영어가 굉장히 능숙한 그녀는 순례길을 아주 일부만 걸어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곳 말고도 다른 곳 하나 더 지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거기다가 본래 직업은 마사지사라고 한다. 매일 매일 바쁘게 일하고 있단다. 매일 순례자들을 보면 여행하고 싶지 않아?라고 물으니 하고싶어! 하지만 나는 나의 일을 즐기고 있으니 좀 더 나중에 해 볼 생각이야- 하며 한 번 더 윙크.
지트 주인은 길 건너 레스토랑에 가면 순례자 메뉴로 조금 할인된 가격의 알리고 메뉴를 맛 볼 수 있다 하며 추천한다. 그리고 깔끔한 자신의 지트 주방과 시설들을 보여준다. 확실히 어제 지트와는 다른 깔끔함과 최신식 인테리어를 자랑한다. 지트 주인은 부랴부랴 다른 곳에 있는 제 2의 지트를 청소하러 가야한다며 부랴부랴 길을 나선다. 나서면서 뒤에 오는 사람들한테 설명을 해 주란다(!!!!!). 비용은 봉투에, 각자 묵을 방 호수는 자신이 종이에 적어놨다며 자신이 프랑스어와 영어로 써 놨지만 혹시라도 모르니 또 설명 해 달란다. 알았다고 하지만 왠지 불안감이 든다.
깔끔한 주방. 있을 건 다 있습니다.
진짜 깨끗한 화장실. 지트 주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각종 정보를 확인 할 수 있는 전단지들. 여기서 다른 순례자들과 수다를 떤다.
내가 혼자 묵을(수 있을 줄 알았던) 방. 프랑스 내 순례길들은 생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층 침대이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베드버그 그림자도 못보았다. 오히려 이 곳은 베드버그를 심하게 경계한다. 혹시라도 바닥에 두어 베드버그가 옮겨졌을 지 모를 가방을 분리하여 보관하고 방지 스프레이를 엄청 뿌리곤 한다.
그래, 일부러 적게 걸어 이 마을에 머무른 것은 오브락 지역의 알리고 Aligot 를 맛보기 위함이 아니던가.
나는 길을 건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직 점심시간의 끝자락. 심란하게도 그 레스토랑은 이 마을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이라 다들 관광 하러 온 노부부들뿐이었다. 그 곳에 파란 바람막이로 꽁꽁 싸맨, 얼굴이 새카맣게 타서 베트남인인지 중국인인지 구별도 안되는 내가 들어가니 모두가 이목을 집중했다. 그래, 뭐 이제 익숙하다. 안그래도 혼자 다니는 여행자는 주목받기 마련인데, 이 지역에서 나는 더더욱 주목 받기 쉬웠다.
다행히 영어를 정말 '조금' 할 수 있는 직원이 있어 알리고가 있는 메뉴를 주문한다. 알리고와 소시지, 샐러드가 함께 나왔다.
소시지와 샐러드는 예상 가능한 맛. 알리고는 감자를 으깨 치즈와 믹스한 음식. 껌처럼 쫙쫙 늘어나는 건 아니지만 치즈의 쫄깃한 질감이 생생히 느껴질 만큼 찰지다. 입에 넣자 고소한 감자와 치즈의 풍미가 가득하다. 내가 소시지와 알리고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자 건너편 노부부가 몹시도 흐뭇하게 웃으며 본다. 알리고는 진짜 맛있는데, 내 위는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30퍼센트정도 남기고 만다. 아깝다.
소시지와 샐러드.
그리고 알리고!
식사를 마치고 포만감을 즐기고 있을 때 건너편 노부부가 나가며 순례자냐 묻는다. 내가 들고있던 미암미암도도가 날 한층 더 순례자처럼 보이게 한 모양이다. 그렇다, 생쟉(saint jacques de compostelle = santiago de compostela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간다하니 봉 슈망! 하고 인사 해 주며, 부디 즐겁게 무사히 생쟉까지 가길 바란다며 인사해준다.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나는 프랑스어가 불가능한 외국인 순례자. 그러므로 관광안내소의 도움을 받으러 간다. 미암미암도도는 관광안내소가 어느 마을에 위치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상세히 알려준다. 특히 GR65 길 위의 관광안내소들은 정말 잘 갖춰져 있어 굉장히 이용하기에 편리했다. 스페인 프랑스길의 관광안내소들이 많이들 닫혀있던 것을 떠올리면 조금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대신 스페인은 수많은 바, 레스토랑이 열려있으니 오히려 '즐기고 놀기'에는 더 좋다고 할 수 있을지도. 알베르게 수도 월등히 많고.) 그리고 이 관광안내소들, 하나같이 정말 친절하고 영어가 수월하다. 관광안내소에 방문하여 내일과 모레 숙소 예약 도움을 받는다.
관광안내소를 다녀 와서 후련한 마음으로 찍은 오몽오브락의 성당.
숙소에 돌아가 보니 한 청년이 공용 공간에 앉아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스위스에서 온 안드레란다. 내가 돈을 어디에 넣어 두면 되는 지 알려준다. 그 때 다른 순례자들 그룹도 들어온다. 프랑스어가 조금 가능한 안드레가 돈을 어떻게 내는지 전달해 주는데, 한참이야기를 다 한 뒤 지트 주인이 적어 놓은 종이를 보고 모두 기뻐한다. 난 왜 그 종이를 먼저 알려주지 않았는가...
그 때 프랑스 청년 막샬이 들어온다. 자신은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지트 주인이 전화를 받지 않아 곤란한 상황이라고. 다른 지트들은 모두 꽉 찼단다. 예약자들이 배정받은 방 표를 보자 비어있는 침대가 내가 묵는 방 하나밖에 없다. 내가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방을 예약한 게 아니라 침대를 예약한 거니까. 라고 얘기하니 막샬은 자신때문에 편하게 묵을 수 있는 공간이 불편해지지 않겠냐며 미안해한다. 전혀 그럴 것 없어, 그런 게 순례길이니까.
빠리에서 왔다는 멋쟁이 막샬. 멋 부린 순례자인게 신기한 건 둘째 치고, 정말 어마어마한 물집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트 주인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막샬의 발을 보니 어디 가고 말고 할 상태 아니었다. 막샬의 양쪽 발에는 내 손바닥만한 물집이 잡혀있다. 그렇게 물집이 넓고 크게 잡힌 건 처음 보았다. 막샬에게 내 반짇고리 키트를 빌려준다. 혹시라도 물집을 터뜨리려고 한다면 쓰렴. 막샬은 감사하다며 받아 가, 내가 묵는 방의 소파에 앉아 물집 터뜨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심심했던 안드레는 방문에 기대 서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다며 훈수를 둔다.
5시 반즈음, 이른 저녁을 위해 지트 앞 마트에서 사 온 퀴노아 샐러드, 라면스프를 끓여 국물로 먹는다. 실은 요 며칠 매운 것이 너무 먹고 싶었다. 나의 매운 음식 욕구를 짧게라도 해소시켜줬던 비밀의 무기는 바로 라면국물이다. 라면국물을 마시고 있으니 막샬과 안드레가 토끼눈을 하고 구경한다. 무슨 스프인데 이렇게나 매운 향이 나니? 하고 막샬이 신기하게 묻는다. 내가 한국 라멘 스프야라고 답하니 시도해 보고싶지만 너무 빨간 색이라 두렵다며 포기한다.
그 때 지트 주인이 들어와 모두에게 한 번 더 웰컴드링크를 대접한다. 그리고 인사. 내 지트에 온 것을 환영해. 그 뒤 자신의 다른 지트 홍보 멘트와 GR65의 연계 지트들 홍보까지 잊지 않는다. 그리고 알리고를 아직도 못 먹어 본 이들이라면 지금 나와 함께 레스토랑으로 가자!하고 순례자들을 안내하려고 하는 그 때, 늦은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난다. 익숙한 목소리이다! 신발을 벗는 0층에 내려가 본다. 이 목소리는 설마 알랭?! 베르나르!!!
내려가 보니 첫 날 콩브리오에서 함께 묵었던 알랭과 베르나르다! 분명히 알랭, 베르나르, 꺄트린 3인방이어야 할 터. 캬트린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익숙지 않은 비즈를 나누고 캬트린의 안부를 묻는다. 알랭이 슬픈 표정으로 꺄트린이 화장실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응급실에 가서 확인해 보니 골절이라고. 꺄트린은 애석하게도 길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며, 알랭과 베르나르에게 계속 길을 이어 가라 했다고 한다. 길을 계속 이어가고 있지만 알랭과 베르나르는 너무나 슬픈 표정으로 신발의 흙을 가만히 털고, 신문지를 구겨 넣고 있었다.
지친 표정의 알랭과 베르나르는 일단 뭔가를 먹어야겠다며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순례자 무리에 합류한다. 나는 지트 공용공간의 팔걸이가 큰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스위스 청년 안드레는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무난한 크림파스타로 저녁을 때운 그는 왜 이 길을 걷게 되었는가라는 모든 순례자의 공통 대화주제를 나에게 건넨다.
안드레는 스위스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하는데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이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맞는 지 모르겠어서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길을 걷는다 했다. 나도 길을 잃어서 이 길을 걸어, 하고 답하자 안드레가 웃는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 길을 잃어버려서 온 것 같아.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북쪽길을 걸을 예정이라 생장에 다다르면 이룬으로 넘어갈 거란다. 그러면서 나의 길을 묻는다. 나는 프랑스길로 가서 엄마와 레온부터 걸을거야. 그러니 안드레가 또 웃으며, 우리 서로의 부모님과 걷는 길이 평화롭길 기도해주자 한다. 부모님과 같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고 행복한 일이지만 부디 싸우지 않아야 할텐데 말야. 안그래? 안드레의 익살 섞인 농담에 나도 웃음이 터진다.
분명히 길은 적게 걸었는데 몸이 노곤하다. 10시쯤 일찍 잠든다. 잠들기 전 막샬이 화장실의 라디에이터에 빨래 널어놓은 걸 보고 나도 얼른 가서 그 옆에 넌다. 10시 반이 훌쩍 넘게 들어온 막샬의 움직임에 조금 깨다 다시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잔다. 공기가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