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혼자 걷는 길 - 공포 가득한 숲, 너른 목장을 가로질러 생콤돌트로
오늘은 많이 걷기로 작정한 날이다. 날짜를 착각해 꽁끄의 수도원 지트 예약을 하루 당겨서 했기 때문이다. 예약을 새로 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많이 걷기로 했다. 이런 날은 이상하게도 눈이 빨리 떠진다. 5시 10분에 눈이 떠져 뒤척이다 30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같은 방에서 주무시는 다른 분들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방을 질질 끌고 나와 식당에서 짐을 싼다. 신발은 아직 촉촉하다. 어제 남긴 알리고와 바게뜨로 아침식사를 마친 뒤 출발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6시 반이다.
유난히 높은 하늘, 동그마니 높이 떠 오른 달이 아름답다.
나스비날을 뒤로하고 길을 걷는다. 확실히 큰 마을이라 나오는 길에 가로등이 잘 되어있다.
출발하고 30분 뒤, 나는 일찍 출발하기로 한 내 결정을 절절히 후회하고 만다. 나스비날 마을이 끝나면 바로 숲길이 이어지는데, 그 길이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 한 가운데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쪽만 끼고 있던 이어폰도 빼 버린다. 혹시라도 뭔가, 가령 여우라든가 들개 같은 게 튀어나왔을 때 반응속도를 빨리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바로 숲으로 진입하는데 너무 무섭다. 이 숲은 까마귀 떼의 아지트인가 보다. 내가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까마귀 한 마리가 울어대더니 숲길 중간에는 까마귀들이 사방에서 까악까악 울어댄다. 길이 하나여서 망정이지, 크지도 않은 GR 마크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헤드랜턴을 꺼내 비추어 보지만 두려움이 가득 찬 마음에서는 그렇게 잘 보이던 마크 하나 찾는 것도 몹시 어렵다.
두려움에 벌벌 떨며 빨리 걷다 보니 갑작스레 숲길이 끝난다. 어슴푸레한 아침 하늘과 뻥 뚫린 듯 펼쳐진 언덕들, 그리고 안내표시가 보인다. 오토바이, 동물을 소지한 자, 자전거 순례자 등은 지나갈 수 없단다. 드넓은 사유 목장 내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시작되었다. 소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장치해 놓은 나무 목담을 지난다.
여기서부터는 소들의 세상이다.
이게 길이다. 사진으로 보면 그냥 들판같은데, 저 돌담 따라 쭉 길이 있고 GR마크고 곳곳에 그려져있다.
중간중간 이렇게 문을 스스로 열고 지나가야 한다. 사유지이지만 GR길의 일부들이다. 행여라도 순례자들이 길을 잃을까 문에도 GR마크를 그려 두었다. 소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문을 꼭 닫아주어야 한다.
돌담에 무심히, 하지만 뚜렷하게 그려진 GR마크. 오른쪽에 길이 보이는데, 그냥 진흙길처럼 보이지만 진흙물이 고여서 곱게 보이는 것이다. 발이 철벅철벅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해가 뜨기 바로 직전, 살짝 어두워지는 느낌이 든다. 동트는 시간에 고원으로 진입한다. 그때 등 뒤에서 강한 햇살이 비추어옴을 느낀다. 뒤돌아보니 해가 뜨기 시작했다. 그 너른 언덕에 인간은 나 혼자뿐이다. 소들은 무심히 저 멀리서 풀을 뜯는다. 해는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자신의 궤적을 따라간다. 말로 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이다.
목장 안이니만큼 길이 길이 아닌 느낌이다. 트랙터가 지나간 자리를 사람들이 지나가서 길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몹시도 질척이고 소똥과 흙이 구별되기 어려울 정도의 진흙길이다. 정신은 명상하듯 맑고 명료하지만 길을 걷는 내 발은 야생과의 사투. 어제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발이 푹푹 들어간다.
갑자기 그림자가 길어진다. 강렬한 노란빛이 비치어온다.
일출을 만끽한다.
이 너른 공간에 나, 소, 소똥, 그리고 태양.
너른 목장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는 소들과 키다리 아저씨가 된 내 그림자.
추운데 뜨거운 햇살이 갑자기 비추어서일까. 급작스럽게 짙은 안개가 불어오기 시작한다. 만약 사후세계가 있어서, 내가 그곳으로 돌아갈 때 이런 느낌의 길을 지난다면 참 좋겠다 생각한다. 안개가 자욱이 낀 숲을 지난다. 이 숲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길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데 GR 사인이 애매하게 되어있어서 '정말 소들만을 위한 강'까지 내려오고 말았다. 소 떼 사이를 지나가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다. 가면 갈수록 발이 푹푹 들어간다. 더더욱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돌아간다. 다행히 금방 사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그 뒤에도 사유지를 계속 지나야 한다. 사유지 간 설치된 문을 열고 잠그고를 반복한다. 내가 길을 잃어버려서 시간을 지체했으니 한 두 명은 만나겠지, 하지만 오전 10시가 넘도록 사람 그림자 하나 보질 못한다.
안개 사이로 보는 태양. 숲 너머는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조금 가셨다. 드라마틱한 햇살의 연출이 근사하다.
정말 행복했던 길이다. 아주 오래된 돌담 옆으로 난 순례길, 그리고 목장.
길에서 본 언덕.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다. 오른쪽 끄트머리에 내가 문을 열고 닫고 나온 담장이 보인다.
평화로웠던 목장 안에서의 길이 끝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와 이제는 수확이 끝난 밭을 지나가 마을로 향한다. 큰길을 건넌다. 트럭이 한 두대 지나간다. 잠시 지나온 순간들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지고, 이제 현실의 길을 걷는 느낌이다. 해가 중천에 떠 오르니 슬슬 추위가 가시고 더위가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마을에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금요일이라 드라이브하거나 여행 나온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금~일 주말에는 짐을 가벼이 하고 자전거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마을을 지나 국도 옆으로 난 길을 걷는다. 사람들이 저기 순례자야-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걸 몇 번 본다.
국도 옆으로 난 길을 걷는다. 슬슬 고도가 낮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한동안 적은 오르막+많은 내리막을 걷는다.
생 셸리 오브락 가기 전. 아름다운 풍광과 고통스러운 내리막길 직전.
오늘 여정의 중간 지점인 생셸리오브락 가는 길은 가히 괴로울 정도의 내리막이었다. 그동안 무릎보호대는 선천적으로 조금 약한 오른쪽만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왼쪽 무릎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삐걱거리다 못해 순간순간 고통이 밀려온다. 안 되겠다, 양 쪽 무릎보호대를 차고야 만다. 자주 접질리는 내 발목때문에 양쪽 발목보호대에 양쪽 무릎보호대까지 하니 내 꼴이 가관이다. 무릎 마사지를 하니 오후 되어서야 나타나기 시작한 순례자들이 지나가며 걱정을 해 준다. 아무래도 오늘 조금 먼 거리를 걷다 보니 못 보던 분들도 많다.
예쁘고 아름다운 생셸리오브락에 도착했다.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순례자 목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만났다. 나는 누가 봐도 순례자 행색. 그 관광객들 중 한 명이 너무 반갑게 니하오~라고 인사한다. 뭔가 나에게 인사하면서 순례 관련된 질문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무릎도 아프고 화장실도 급한데 니하오 하는 인사를 들으니 괜히 기분이 상한다. 이미 내 눈썹은 시옷 모양으로 찡그러져있다. 니하오만 할 줄 알고 영어를 못하던 그녀, 그녀의 일행이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어디까지 가는지 영어로 묻는다. 적당히 대답하고 길을 이어간다.
많은 프랑스인들은 내가 지나가면 니하오, 곤니찌와 하고 인사한다. 안녕하세요는 들어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나도 외국인이 있으면 헬로- 하고 인사하지 봉쥬-나 구텐탁하고 인사하진 않지. 그리고 프랑스 내에는 중국인들이 정말 정말 많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동양인 하면 중국인 이리라. 내가 중국인이었더라면 니하오 하는 인사가 반가웠을까.
생셸리오브락의 공용화장실에 들러 볼 일을 본다. GR65 길에서는 바를 찾기 쉽지 않았다. 어렵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때문에 종종 마을 공용 화장실이나 성당에 딸린 화장실을 이용하곤 한다. 우리나라 공용화장실들처럼 상향평준화되어있진 않지만 이용 가능한 정도이다.
내일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다. 관광안내소로 가 예약 도움을 요청한다. 친절한 직원이 예약 도와줘서 신이 난다. 아마 볼 일은 다 봐서 해방감에 마음이 후련해진 것이리라. 생셸리오브락을 뒤로하고 순례자 다리에서 바게뜨 뜯어먹으니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부지런하게 생콤돌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생셸리오브락의 순례자 다리. 마을 어귀에는 꼭 공동묘지를 볼 수 있는데, 저 다리를 건너면 공동묘지가 하나 있다.
다리를 건너기 전 본 예쁜 집.
오브락고원에서 내려가는 길이다 보니 잔인한 자갈 내리막이 내 무릎을 괴롭힌다. 중간에 잠깐 나온 쉼터에서 쉬고 싶으나 그 사이 내리는 비에 뒤집어쓴 우비가 걸리적거려 엉덩이만 살짝 걸터앉아 쉰다. 배에서는 천둥 같은 소리가 난다. 배고파 죽겠다. 스니커즈 하나를 순식간에 흡입해도 배고파 죽겠다. 그렇게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갑자기 진짜 예쁜 수도원 하나가 내 눈 앞에 딱 하고 나타난다. 그 유명한 생콤돌트의 수도원이다. 내가 예약에 실패했던 곳이다.
아름다운 수도원
이 길을 걷다 보면, '프랑스의 예쁜 마을'이라는 표창을 받은 마을을 많이 지나가게 된다. 생콤돌트도 그 중 하나.
오늘 길이 너무 힘들었다. 무릎이 아프다. 벌써 오후 4시 반을 넘었다. 지트를 찾는데 생각보다 찾기 어렵다. 30분을 넘게 같은 자리에서 헤맨다. 보통 자그마한 간판 같은 것이 있는데. 지도를 아무리 보아도 내가 서 있는 곳이 그곳이란다. 누가 봐도 평범한 프랑스 지방 단독주택. 그때 차고에 있던 아저씨가 나온다. 아저씨가 아내분을 부르고, 당신이 소아-냐며 반긴다. 내가 소아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들에겐 너무 이국적인 이름이었던 모양인지 내가 예약한 모든 지트에서는 나를 알아보는 기적이 있었다.
단독주택의 1층과 2층은 서로 입구가 달랐다. 1층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사는 곳. 그녀는 나를 2층으로 안내한다. 오늘 세명이 묵는다고. 내가 프랑스어를 못하니 나에게 2인실 하나를 준다. 독방 만세! 영어를 못했지만 그동안 내가 주워들은 프랑스 단어와 숫자로 중요한 정보 공유는 가능했다. 절대 급하지 않게 꼼꼼히 정보들을 일러주는, 친절한 주인. '진짜' 프랑스 가정집에서 머무는 만족스러운 경험이다.
사진이 주방밖에 남아있질 않네. 이 지트는 아침식사는 제공하지만 저녁은 제공하지 않는다. 있을 건 다 있는, 예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주방이다.
스치듯 보아도 예쁘다.
집 담벼락의 꽃화분을 정성 들여 키운다.
저녁거리와 내일 점심거리를 살 겸, 구경할 겸 동네 한 바퀴를 구경한다. 아기자기하고 정말 예쁘다. 상상 속의 프랑스 이미지는 파리나 리옹이 아닌 오히려 순례길에서 더욱 충족시킨다. 주말이라 그런지 이 마을에 관광 온 사람들이 많다. 관광객들의 시선, 동네 사람들 시선은 이상하게 나에게 쏠린다. 이 마을 자체에 동양인이 많이 없는 모양이다. 작은 슈퍼마켓에서는 마땅한 것이 없어서 간단한 것만 산다. 이 슈퍼마켓의 바게트는 도저히 살 만한 퀄리티가 아니다.
길거리를 가득 채운 고소한 빵 냄새에 이끌려 빵집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어느 친절한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치즈빵과 쏘씨쏭 들은 페스트리를 구매한다. 아들과 딸을 데리고 저녁 식사할 것을 사러 온 아주머니는 유창한 영어로 어디서 왔는지,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걷고 있는지 물어본다. 한국은 삼성이나 엘지가 있는, 기술이 발전한 나라가 아니냐며(이 정도만 알고 계셔도 뛸 듯이 기쁘다) 프랑스는 조금 재미없고 지루하지 않냐고 하신다. 그게 매력이다, 하고 대답하니 크게 웃으신다. 호탕한 아주머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은 내 눈이 신기한지 세상 똘망하게 내 눈을 바라본다. 봉쥬- 하고 인사하니 부끄러워하며 엄마 뒤에 숨는다. 귀엽다.
생콤돌트 마을
성당 지붕이 특이해서 기억이 남는다.
지트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아까 슈퍼에서 스프를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 옆에서 스프를 샀던 할머니가 다른 방에 묵는 분이셨다. 할머니는 영어를 하진 못하셨지만 뭔가 말씀을 내게 길~게 하셨다. 그 뒤 스프를 3인분 끓여 나,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 방에 묵는 젊은 친구 몫으로 나누어주셨다. 덕분에 세 명이서 함께 오붓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매일 맥시멈 20km정도씩 걷는다는 할머니, 그리고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인 엘로디와 통성명을 한다. 엘로디는 나와 같이 모레 꽁끄의 수도원 지트에서 묵을 예정. 엘로디는 주로 지트 예약을 하지 않으며 다닌다고 했다. 내가 꽁끄 가는 중간 지점이 애매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더불어 내가 내일 묵을 곳이 꽁끄까지의 중간지점이라는 것, 그 지트의 정보 등을 알려주었다. 엘로디는 내 생각이 꽤 괜찮아 보였는지 내일 같은 셩브흐도트 겸 모빌홈 지트에 묵기로 결정한다.
방으로 돌아와 빨래가 말랐는지 확인한다. 순례길을 걸으며 처음 이용하는 독방이다. 원래 2인실이지만 운이 좋았다. 가끔 피로도 풀 겸 이용해보아야겠다. 혼자 있으니 굳이 밖에 나가 맨소래담 마사지를 하지 않아도 되고, 방에서 맘껏 한다. 평소에는 맨소래담 냄새가 너무 강해 밖에 나가서 했었는데 말이다. 눈치 보지 않고 요가도 자유롭게 한다. 좋아하는 영상들도 낄낄대며 본다.
마을에서는 조용히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달이 높이 떠 올라 달빛에 생긴 커튼 그림자가 방을 채울 때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