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혼자 걷는 길 -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닿은 푸짐한 저녁식사의 지트
GR65 St. come d'olt - Fonteilles(Golinhac) 28.7km
오늘 지트에서 조식을 신청한 사람은 나뿐인 듯하다. 부엌에 가 보니 1인분의 조식이 정성스럽게 차려져 있다. 지트 주인아주머니가 GR길 타는 법을 설명해 주신다. 일주일 넘게 걸으면서 는 건 위장의 크기. 예전에는 배부르다는 느낌이 들면 멈췄는데, 길을 걸으면서는 배부르다는 느낌이 들면 조금 쉰 뒤 그야말로 식도 끝까지 채워 밀어 넣는다. 이렇게 먹고 먹어도 배가 꺼지니 방도가 없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자. 그 짧은 사이 내 길의 모토가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때문에 길 곳곳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를 볼 수 있다. 가끔 gr마크 대신 이 유네스코 마크만 있는 곳도 있다. 가령 꽁동 condom 이라든가..
생콤돌트를 빠져나오는 길
생콤돌트를 빠져나올 때 롯 강을 건넌다
괜히 아쉬워 돌아보는 생콤돌트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출발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롯 강을 따라 한적한 강가를 걷는다. 나와 보폭과 속도가 비슷한 아저씨가 하나 있어 인사를 나눈다. 브장송에서 왔단다. 그 아저씨는 짧은 영어로 간단히 질문을 하고, 내 이름이 도저히 외워지지 않았는지 나를 킴으로 부른다. 실은 나도 그 아저씨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꽤 자주 무슈 브장송이라고 불렀으니까. 무슈 브장송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이어 나간다.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비가 쏟아진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예쁘고 규모가 훨씬 큰 에스팔리옹에 도착한다.
생콤돌트보다 훨씬 크고 북적였던 에스팔리옹. 여기서 묵어도 좋았을 뻔했다.
에스팔리옹에는 차가 많이 다닌다. 차가 많이 다니면 이제 대도시같이 느껴진다.
에스팔리옹에는 지트도 훨씬 많아 보인다. 각각의 지트에서 길을 시작하는 순례자들이 나갈 채비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무슈 브장송은 내가 우비를 쓰는 도중에 벌써 사라져 버린 듯했다. 강을 따라서 난 마을 외곽으로 빠지는 길을 지나, 숨 가쁜 오르막길이 시작하기 바로 전 엘로디를 만난다. 엘로디 걸음이 느려서 항상 먼저 출발해야 한다며 나보다 한 시간은 먼저 출발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따라잡은 셈. 엘로디와 한동안 함께 걷다가 보폭도 속도도 맞지 않아 내가 조금 속도를 내겠다며 이따 보자 인사한다. 에스팔리옹을 지나 죽을 것 같은 오르막 내리막을 만난다. 정말 죽겠다. 사진 찍을 정신조차 들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평지가 나타난다. 마침 성당과 공동묘지도 보이겠다, 저기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신나게 걷는다.
스페인의 공동묘지에서는 많이 그러지 않았지만, 적어도 프랑스 안에서 마을 외곽에는 항상 성당이 있었다. 그 성당 안에는 꼭 공동묘지가 있었고, 먹을 수 있는 물 eau potable 이 있다. 그리고 공동묘지 근처에는 가족들이 쉴 수 있도록 의자가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잘 모르고 그냥 eau potable 마크가 있으면 무조건 물을 보충하는 식으로 길을 이어 왔는데, 어제 지트 주인과 함께 묵었던 할머니가 대화 나누는 것을 엘로디가 통역해 주어서 알았다. 그 후에는 꼭 공동묘지를 보면 쉬었고, 공동묘지는 나에게 있어서 프랑스 안에서의 순례길 쉼터가 된다.
공동묘지 앞 테이블이 딸린 벤치에서 들판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점심식사를 한다. 나스비날에서 산 복숭아 잼을 바게트에 발라 햄을 끼워 넣어 먹는다. 단짠의 아름다운 조화이다. 이때 은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주 만나던 키 작고 단단해 보이는 여자가 다가온다. 그 여자도 벤치에 앉아 점심식사를 준비한다. 독일어로 된 GR설명서를 보고 있길래 독일인이냐 물었다. 스위스에서 왔단다. 원래 하루에 30~40km씩 걷고 있는데 무리했는지 다리가 아파 에스땅까지 간다 한다. 에스땅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녀의 표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걱정이 된다. 무사히 길을 마치길 바란다며 서로 축복하고 길을 이어간다.
성당+공동묘지 앞 벤치에서 식사를 마치고 마을로 향하던 들판. 쨍하고 아름답지만 비 오고 난 뒤라 무척이나 추웠다.
한적한 국도변의 벤치. 딱히 버스가 다니진 않지만 그냥 벤치가 곳곳에 놓여있다.
마을을 하나 지나고, 숲 사이로 이리저리 이어지다 국도를 따라 걸으니 아름다운 성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
에스탱이다.
에스탱 ESTAING 마을 안내표지판 아래의 GR 마크.
아름다운 성과 그를 둘러싼 마을.
에스탱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느낌이다. 내 환상 속의 프랑스 이미지를 충족시켜줬던 마을
프랑스의 예쁜 마을 표지판.
마을로 진입하는 다리 위에서 한 컷 찍는다.
프랑스의 예쁜 마을, 에스탱 ESTAING 에 도착하니 진심으로 정말 예뻐서 기분이 좋아진다. 비는 또 언제 내렸냐는 듯 하늘이 쨍하고 아름답다. 중세 기사가 당장이라도 말을 타고 나올 것 같은 마을. 순간 마음이 바뀌어 여기 머물고 싶었지만 내일 꽁끄를 가야 하니 마음을 다시 먹는다. 성당을 둘러본 뒤 먹을 거 파는데 없나 헤매다 오늘이 토요일인 것을 깨닫는다. 모든 슈퍼마켓이 장사를 안 한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레스토랑 빼고 모두 닫았다. 쏘그 근처에서 느꼈던 열렬한 배고픔 때문에 먹을 걸 많이 쟁여 둬서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맥주나 콜라 한 캔 사서 마시고 싶었는데.
에스탱 성당 안
에스탱 성당 입구.
르퓌에도 있던, 중세 시절의 옷을 파는 상점이 곳곳에 있었다. 마네킹과 의상의 조화가 너무 신기해서 찍은 사진.
만약 리아네 집_내가 오랫동안 상상해 온 이야기가 있다_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고 찍은 사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을 어귀의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그 때 "킴!" 하는 소리가 들려 그쪽을 보니 브장송 아저씨이다. 정말 감정표현이라곤 1g도 없던 브장송 아저씨와 적당히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그때까지만 해도 브장송 아저씨가 어디 묵는지도 몰랐다. 아저씨한테 어디 가냐고 물으니 골리냑 근처라고. 나는 그때 마을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미암 미암 도도를 꺼내려하니 아저씨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하여 그만둔다. 맥주가 나온다. 생맥주가 온몸의 세포를 일깨우는 느낌이다. 비가 가시고 내리는 직사광선은 정수리를 활활 태우는 느낌이지만 힘을 내어 다시 다리를 움직인다.
에스팔리옹을 나오는데 순례자 느낌을 낸 의상을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 무리 스무 명 정도가 지나간다. 르퓌부터 꽁끄까지는 짧게 관광식으로 트레킹을 온 분들이 많았는데, 그 단체 중 하나인 듯하다. 그들은 아시안 순례자 아가씨가 신기해 보였나 보다. 그중 한 분이 미소 지으며 다가와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 프랑스어가 전혀 불가능했던 나. 이쯤 되니 짧은 프랑스어로 "나는 남한에서 온 소아라고 해. 북한은 아니란다!^^ 나는 르퓌에서부터 생쟉까지 걸어."가 자동 재생된다. 그러자 그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동시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으아... 가끔 프랑스 분들이 동시에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시작하면 어찌할 줄 몰라 당황스럽다. 영어가 가능하셨던 그 한 분은 무사히 길을 완주하길 바란다면서 자신들의 기도도 가져가 달라고 한 뒤 인사를 한다.
또 숨 가쁜 오르막이 날 환영한다. 오르막 싫다. 투덜거리며 간신히 평화로운 언덕길에 오르고 약간 기운이 빠질 때쯤 폰테이으에 도착한다. 폰테이으에는 이 지트와 작은 농장들밖에 없는 듯 보인다. 작은 마을. 지트에 들어서니 영어를 정말 하나도 못하지만 정만은 넘쳐나는 주인 부부가 세상 따뜻하게 날 환영해준다. 배불뚝이 주인아저씨가 엄청난 환영인사를 했는데 정말 하나도 알아듣질 못해서 죄송하다.
이 날 묵은 숙소가 좀 다르니까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GR65를 걸으며 만난 숙소의 유형은 크게 3가지가 있었습니다.
1. 지트 Gîte
2. 셩브흐도트 Chambre d'hote
3. 호텔 Hotel
가격대는 지트가 1박에 30~40유로 정도(DP Demi pension 드미팡시옹 기준 ; 숙박, 석식, 조식 포함)
셩브흐도트는 40~50유로 정도
호텔은 50~ 정도입니다.
지트는 스페인의 좋은 알베르게 정도 상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일반 민박. 2인실부터 다인실까지 많은 유형이 있고요.
셩브흐도트는 지트보다 좀 더 좋은 느낌의 민박. 개인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호텔은 여러분이 아시는 그 호텔입니다. 다만 프랑스 시골길이다 보니 시골 모텔 정도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지트를 선호하였고요, 이유는 주인과 어울리는 시간이 좀 더 많아서였습니다. 그리고 예산 문제도 있겠고요. 이 날 셩브흐도트를 묵은 이유는 생콤 돌트에서 꽁끄까지 보통 넉넉잡아 하루 10km 20km 내외씩 해서 3일 잡고 가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이틀을 잡은 터라 중간 지점이 애매했기 때문입니다. 셩브흐도트를 묵기는 비싸 보이고, 대신 폰테이으 셩브흐도트에 딸린 모빌홈 드미팡시옹 가격이 그나마 지불 가능한 선에서 적당히(?) 비싸서 폰테이으에서 묵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내가 묵은 곳은 셩브흐도트에 딸린 모빌홈. 모빌홈이란 것은 도착해보니 컨테이너 가건물로 만든 민박. 안에 시설 자체는 있을 것은 다 있다. 외풍이 세지만 히터가 정말 빵빵하게 나왔다. 들어가 보니 이미 엘로디는 샤워 중이다. 운 좋게 각 방에 화장실이 하나씩 딸려 있어서 여유롭게 목욕을 한다. 폰테이으가 워낙 높으니 이상하게 LTE가 빵빵 잘 터진다. 덕분에 신나게 유튜브 영상으로 시간을 때운다.
이런 풍경이 보이는 마을(이라고 하기엔 몇 가구 되지 않는다), 폰테이으. 고지대인만큼 춥고 바람이 엄청나다!
저기 보이는 건물이 셩브흐도트, 오른쪽의 가건물이 모빌홈의 일부이다.
엘로디랑 무사히 도착함을 축하한다. 저녁시간이 다가와 셩브흐도트 건물로 간다. 알고 보니 브장송 아저씨가 셩브흐도트에 묵고 있었다. 뭐야, 킴 나와 같은 숙소였네? 브장송 아저씨가 전혀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기쁘다고 말한다.
저녁식사가 시작된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저녁식사 풀코스를 만끽한다. 내가 엘로디에게 "너희 원래 이렇게 먹니...?" 하고 물으니 이렇게까지 먹진 않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한동안 손님들이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세 명이나 와서 정말 기쁘다는 지트 주인아저씨. 분명히 사모님 포함 5인분만 했어도 되는데 딱 봐도 10인분은 넘어 보인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대접의 음식들...
자신들의 자랑?이라고 하는 오브학 풀(?!)로 만든 수프. 두 번 먹었다. 한 번 더 권했으나 거절. 남은 것은 거절 못한 가엾은 브장송 아저씨가 먹었다.
쌀과 토마토와 무엇... 들이 들어있던 요리. 후에 까르푸나 다른 마트에서 이런 조리식품을 파는 것을 보았는데, 이 곳에서 먹었던 건 내용물의 차원이 달랐다.
꾸덕한 치즈가 일품이었던 라자냐
고기 갈빗대, 토마토와 쌀, 치즈 라자냐 모둠. 저렇게 세 번은 더 먹었다.
다양한 치즈가 가득했던 플레이트. 이건 좀 그립다. 프랑스 GR 순례길에서 내가 느낀 큰 행복 중 하나는 정말 다양한 치즈를 맛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농장이나 집마다 다 자신들만의 레시피로 치즈를 발효해 먹는 경우가 많아 즐거웠다. 마치 누구네 집 김치는 무슨 맛, 누구 엄마네 집 김치는 무슨 맛 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
디저트가 또 나올 줄은 몰랐지...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어서 남겨둔 사진 하나. 예전에 실제로 쓰던 톱이란다.
한참 동안이나 지트 사장님의 자랑을 듣는다.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는지 수많은 사진들을 보여주신다. 사진의 날짜들이 90년대인 것이 약간 신경 쓰였지만. 나와 엘로디의 표정에 피곤함이 가득해 보였는지 브장송 아저씨가 적당히 끊어주신다. 드디어 두 시간 반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빌홈으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내일은 내가 그리도 그리던 꽁끄에 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