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카마두르는 아름답지만

13. 당신과 걷는 길 - 개저씨와 쟝과 라면 국물 논쟁

by 소아

9월 20일 수요일

Figeac - Rocamadour 기차 이동


~ 이어서 ~


관광안내소 직원에게 지트 예약 부탁을 하고 저녁과 내일 아침거리를 사러 돌아다닌다. 관광지라 그런지 모든 게 비싸다. 그때 저렴한 크로와상을 팔길래 크로와상 두 개를 산다. 그때 하필이면 뒤에서 개저씨 목소리가 들린다. 설마 너 저녁으로 크로와상 사니? 너 크로와상은 아침에 먹는 것도 모르니?ㅎㅎㅎ 하며 웃는다.

와.......^^.... 이때 나는 지트에서 아침을 주는 줄 몰랐는데, 뭐라 답변 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쌩 돌아섰다. 아니, 아침에 먹든 저녁으로 먹든 배가 부르면 좋은 거 아닌가 하는 비뚤어진 마음이 내 안에 들어찬다. 좀 더 걸으니 여하튼 저녁으로 먹을 만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파는 것이 보여 하나 산다. 덤으로 주는 콜라 한 캔도 받아 들고 돌아다닌다.

로카마두르 구시가지에서 길 건너를 바라보는 풍경이다

로카마두르 상점가

로카마두르 상점가. 저기 관광안내소 간판이 보인다.

로카마두르 상점가. 흰 옷만 팔고 있어서 신기했다.

로카마두르 상점가의 고양이. 태평하게 볕을 쬐고 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관광지는 모름지기 이런 열차도 있어야지

로카마두르 상점가 거의 끝자락에서 본 수도원과 성.


다시 관광안내소로 들어가 본다. 맙소사. 개저씨가 있다. 개저씨랑 직원이 내 얘길 하고 있었나 보다. 직원이 저 한국에서 온 아가씨는 열차를 타지 못해 걸어갈 예정이라고 말하니, 그 개저씨가 껄껄 웃으며 신께서 네가 기차를 탔기 때문에 벌을 내리는 거라 말한다. 이 무슨 개소리인가.

직원은 나에게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이 있다고 말한다. 기쁜 소식은 일단 내일 묵을 라바스티드 무하 숙소는 전화를 받아서 예약이 완료되었다는 것. 나쁜 소식은 모레 묵을 베흐 숙소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음성메시지를 남겨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일 묵을 마을에도 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꼭 그곳이 닫기 전에 도착해서 예약을 부탁하라고 친절히 알려준다.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개저씨는 여기 왜 왔나 궁금해서 관광안내소를 돌아보는 척하며 들어본다. 내일 카오르까지 가는 택시를 예약하는 모양이다. 뭐야... 순례자는 다 걸어야 한다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숙소 예약을 마치고 지트로 돌아간다.

순례자의 계단

순례자의 계단 재건에 대해 설명하는 패널. 중세시대의 순례자들은 스스로 몸을 속박하고 이 계단을 무릎으로 걸어 올라가 참회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었다고, 다른 순례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순례자의 계단을 걸어 올라와 지트로 돌아오는데 그 계단에서 쟝을 만난다. 쟝이 내가 들고 있는 음식거리를 보고 많이 비싸냐 묻는다. 다른 음식점들은 비싸고 빵집 하나랑 샌드위치 파는 곳은 가격이 나쁘지 않다 알려준다. 쟝도 저녁거리를 사러 가는 중이라며, 관광지라 그런지 모든 게 비싸다고 장난스레 투덜댄다. 맛있게 먹으라고 하며, 자기도 너무 비싸지 않은 곳에서 뭔가 먹을 것 좀 사겠다 한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는지 물어보길래 피쟉에서 기차 탔다고 하니까 오 그렇게 올 수도 있구나, 좋은데? 외국 그것도 꽤나 작은 마을들에서 혼자 표를 사고 기차를 타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멋지다 하고 얘기해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생각 없이 건넨 얘기였겠지만 그때의 난 개저씨가 마음을 헤집고 난 뒤라 몹시도 기분 좋고 고마워진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지트로 돌아와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점심을 치즈가 가득한 것으로 먹은 데다 요 며칠 매운 것을 못 먹어 소중히 아껴온 라면스프로 국물 내서 맛나게 먹는다. 그때 쟝도 나와 똑같은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서 들고 온다. 그래 거기 말고는 딱히 괜찮은 데가 없지? 하고 말을 거니 정말 그랬다며 웃는다.

식사를 하다 리비냑 전 마을인 생 호슈의 따스운 할머니가 있는 지트 홍보지가 있길래 기뻐서 사진을 찍는다. 쟝이 너 거기서 묵었냐며 엄청 반가워한다. 나는 거기서 묵었던 건 아니고, 잠깐 맥주 마셨을 뿐인데 내가 그 날 만난 이들 중에 가장 따뜻했어. 쟝도 깊게 동의한다 같은 방에서 조용히 짐 정리하시던 프랑스 할아버지도 와서 간단한 스파게티와 수프를 끓이시고 식사에 합류하신다. 알고 보니 쟝도 산티아고까지 간다 한다. 할아버지는 오늘이 길의 마지막이고 내일 집으로 돌아가신단다. 그러면서 나와 쟝에게 스페인 내 프랑스길에 대해 조언해 주시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셀레 Célé 길도 걸어 보라고 추천해 주신다. 정말 아름답단다. 걷고 싶은 길이 또 하나 늘었다.

그때 프랑스 개저씨가 온다. 주방이 시끌벅적해서 왔다며, 나 더러 네가 소음을 만들고 있구나! 한다. 난 두어 마디밖에 말하지 않았는데. 그랬더니 쟝이 약간 발끈한 목소리로 그녀는 그냥 우리말을 듣고 있었고 나와 에릭이 얘길 하고 있었어요 라고 얘기한다. 프랑스어였지만 대략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스스로 기쁜 마음,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아 할아버지 이름이 에릭이었구나 생각도 하고. 에릭도 뭔가 프랑스어로 줄줄 이야기하는데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개저씨가 날 놀리려던 것 때문에 에릭과 쟝이 맞서는 걸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깨갱 하고 수그러들던 개저씨는 내가 먹던 바게트 샌드위치를 보더니 이런 거나 먹냐며, 자기는 레스토랑에 갈 거란다. 같은 걸 먹고 있던 쟝 표정이 아주 볼만하다. 그러더니 내가 스프처럼 마시고 있던 라면 국물을 보더니 R U CRAZY???라고 부엌에서 쩌렁쩌렁 외친다. 로카마두르까지 와서 이런 거나 먹냐 한다. 순간 너무너무 화가 나서 실소가 터진다. 대꾸하지 않고 그냥 식사를 이어나가려는데 쟝이 그거 스프냐고 묻는다. 뭐 국물이니까 스프긴 스프지. 그렇다 답하니 잠깐 보아도 되겠냐 한다. 그래서 보울을 내미니 냄새를 맡더니 매콤한 국물이구나! 너희 나라는 매운 걸 많이 먹니? 하고 묻는다. 그렇다 대답하니 그때부터 쟝이 개저씨에게 뭔가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설명이라고 해야 할까 일방적인 논리 공격이라고 해야 할까... 5분 정도 열렬한 논쟁(?) 뒤 개저씨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기는 레스토랑에 가서 멋진 식사를 할 거라 한다. 조그만 목소리로 쟝에게 고맙다 하니 De rien 이란다. 이렇게 De rien을 배웠다.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쟝과 에릭에게 인사를 한 뒤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마음이 묘하게 좋지 않다. 개똥일 뿐이다 개똥일 뿐이다 하고 생각해도 기분이 더럽다. 내 눈 앞의 로카마두르는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마음이 이렇게도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 조금 평화를 찾고 싶어 로카마두르 노트르담 성당의 검은 성모상을 찾아뵙고 기도를 드린다. 부디 마음의 평화를 주세요. 울 것 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옆의 건실해 보이는 청년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길래 평화롭게 기도하시라고 조용히 나온다.

저녁식사 후 다시 둘러본 노트르담 드 로카마두르

성당 구석의 작은 성소

아름다운 성모자상

해가 지고 있다.

해가 지니 조명이 켜진다.


돌아와 책 읽고 있는데 아까 물집 때문에 엄청 심각했던 커플의 남자, 티보가 친절하게 안부를 묻는다. 위층에 따뜻한 차가 있으니 오라고. 일단 고맙다고 하고 계속 엎드려 책 읽고 있는데 뒤에 쟝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돌아보니 네가 읽고 있는 책이 너무 신기하다고 문자가 마치 그림 같다 말하며 다가온다. 서로 인사를 나눈다. 이 길을 왜 걷는지 이야기한다. 쟝은 9년 동안 열심히 일 하고 너무 지쳐서, 예전에 수학여행으로 왔던 로카마두르를 포함한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했다고. 르퓌부터 걸었단다. 나도 마찬가지야. 마음 둘 곳이 없어서 한국에서 도망쳤어. 빙긋 웃는다.

쟝이 너 잠은 잘 자냐고 묻는다. 왜? 왜냐면 적어도 이 방 최소 두 명은 코를 골 예정이거든. 하면서 쟝이 에릭의 침대와 티보의 침대 쪽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난 이 길을 걸은 뒤로는 항상 잘 자 하고 대답한다. 쟝은 항상 이어 플러그를 끼고 잔단다. 그래야 코골이를 듣지 않고 평화롭게 잠들 수 있다며.


쟝 무릎 양쪽에 큰 밴드 하나씩 붙어있길래 이유를 물어보았다. 로카마두르의 유명한 순례자의 계단을, 무릎으로 걸어 올라가며 기도를 바쳤단다. 중세의 순례자들이 그렇게 했고, 일부 순례자들이 또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걸 실제로 했을 줄은 몰랐다. 왜 그걸 했니,라고 물어보니 그냥이라고 답하며 또 웃는다. 쟝은 내가 이렇게 먼 나라의 시골길에 와서 여행하고 걷는 게 대단하다 한다.


이 광활한 오지라퍼는 티보와 키트리에게도 잘 얘기했다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네가 즐겁게 여행하길 바란다고 한다. 괜히 마음이 다 찡하다. 그러면서, 티보와 키트리는 얼마 전 결혼해 이게 신혼여행이라며 놀랍지 않냐 한다. 엄청 어려 보였는데?! 쟝이 말하길, 키트리는 스물셋 티보는 스물넷이란다. 우와. 쟝은 그들은 아주아주 독실한 천주교인이거나, 정말 사랑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야. 하며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쟝은 내 나이가 궁금했는지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되겠냐 한다. 28살이야. 한국 나이는 29살이지. 한국은 태어나자마자 한 살 먹고 태어나. 엄마 뱃속에서 1년 못 미치는 시간을 지내는 거니까 말이야. 흥미롭지? 정말 신기하다는 얼굴이다. 쟝은 29살이란다. 더 나이 들었을 줄 알았는데 내 또래였다니. 외국인들 나이는 도저히 가늠이 안된다. 이것저것 쟝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시끄러운 마음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쟝이 담배 피우러 나간 뒤, 피곤해 보였던 에릭이 바로 들어와 주무시길래 밖에 나와 책을 마저 읽는다. 그때 아까 울면서 기도하던, 온건하고 건실해 보이는 청년이 체크인을 한다. 쟝이 저 청년은 성당 교리 선생님이래, 하고 소개해준다.

지트가 어둑해지고 다 함께 자는 분위기길래 9시 반에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라바스티드 무하 가는 날. 중간에 잠깐 깨니 역시 에릭과 티보의 침대에서 무지막지한 코골이가 들린다. 다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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