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당신과 걷는 길 - 라바스티드 뮤하와 쟝
어제 쟝이 알려줘 조식이 포함된 것을 알았다. 조식 시간에 맞춰 번개같이 일어난다. 식당으로 올라간다.
먼저 잠들었던 에릭은 일찌감치 정리 다하고 가방도 싼 뒤 식사 마친 듯 하다. 집으로 가는 차편이 아침 일찍 있는지 준비를 이르게 한 모양이다. 봉사자인 데니스와 인사하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곧 쟝도 따라온다. 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개저씨가 오자마자 식사 마치고 설거지를 한 뒤 나온다.
짐 정리 및 나갈 준비 마쳤는데 데니스가 침대커버 새걸로 갈아 끼웠는지 묻는다. 헉 아니요. 다시 방에 들어가 보니 쟝이 내 침대 위에 짐을 가지런히 다 올려놔서 침대커버를 벗길 수가 없었다. 쟝이 자기가 치우겠다 한다. 고마워. 그 뒤 지트 인포메이션 칠판의, 라바스티드 뮤하로 가는 지도를 보고있는데 개저씨가 뒤에 다가와 함께 지도를 본다. 하... 한숨이 절로 나온다. 봉사자 데니스에게 슬쩍 저 사람 라바스티드 뮤하 가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택시 타고 카오르 가는 거 아니었어 개저씨..?! 하 제발
어제 샌드위치 사며 덤으로 받았던 콜라가 한 캔 있다. 버리긴 아까워서 점심에 먹어야지 하고 가방 옆구리에 끼워넣는다. 배낭 메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개저씨가 프랑스 순례길을 걸으며 미국 콜라를 마시냐며 비웃는다. 이 미국 음료수 자랑스러운 니네 나라에서 팔던 거거든..? 그렇게 나갈 준비를 마치고 데니스에게 인사하는데 마침 쟝이 나와 같이 인사한다. 데니스의 따뜻한 인사; GR46 타는 길이 갈래가 많아 헷갈릴 수 있으니 조심하렴.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다다르길, 봉 슈망!
사진이 무척이나 흔들렸다. 로카마두흐에서 GR6과 GR46이 교차하는데, 로카마두흐에서 카오르 방향으로 가려면 GR46 COUZOU 방향으로 가야한다. 여기에서 쟝이 길을 잘못 타서 한참 헤맸단다.
쟝과 함께 길을 나서는데 딱 봐도 걷는 속도가 나보다 훨씬 느렸다. 로카마두르에서 라바스티드 뮤하 가는 초입새는 가파른 언덕길이 있는데, 이미 멀찌감치 간격이 벌어진 후였다. 쟝이 먼저 가란다. 자기는 좀 느리다고. 아 이렇게 안녕하겠구나... 하고 로카마두르 언덕길을 열심히 오른다.
로카마두르를 뒤로 하고 언덕길을 열심히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아름다운 로카마두르가 일출을 맞이하고 있다. 열기구가 떠오른다.
한참 오르막길을 오르고 국도를 따라 걷다 보면 마을이 나온다.
하늘이 참 맑디 맑다.
그리고 숲길로 이어지지.
GR46에서는 마크 하나는 제대로 잘 표시되어있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걷기에도 경쾌하다. 길은 조금 단조롭지만 생각을 비우기에는 좋은 길이다. 한참동안 숲길을 걷고있다가 갑자기 깨끗한 순례자를 위한 공간이 나온다. 배고 고팠으니 잘 되었다. 안에 들어가보니 근처 지트와 호텔 정보, 그리고 물이 있다. 그 곳에서 어제 산 크로와상이랑 파이를 먹는다. 오늘 아침에 먹으려던 것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여기까지 오는데 뭔가를 파는 곳을 단 한곳도 보지 못했으니 잘 되었다.
숲길을 걷다가 갑자기 발견한 나무로 만든 쉼터. 이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순례자를 모티프로 디자인하셨군요.
사람은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충격을 받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생각 없이, 그저 심심해서 들여다 본 페이스북 글들이 나를 뒤흔들게 된다.
점심을 먹다 심심해서 페이스북을 둘러본다.
학교 동아리 동문회 페이지, 한 부고 소식과 그 선배에게 편지를 보낸 다른 선배들의 글을 본다.
씹고 있던 고기 파이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왈칵 눈물이 난다. 글들이 번진다.
그동안 이 길을 걸으며 속에 억지로 가두어뒀던 어두운 생각들이 치밀어올랐다. 돌아가신 그 분의 마음, 생각해왔던 걸 행동으로 옮겼을 시간과 마음을 생각하니 심장이 미친 듯 뛴다. 나는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 그 시간들이 떠올라서 무척이나 괴롭다. 그와 동시에 돌아간 선배에게 보낸 다른 선배들의 편지를 보며 나도 만약에 갔다면 내가 알던 사람들도 이렇게들 슬퍼해줬을까 하니 더욱 슬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머리가 아플정도로 울다 정리하고 나서려는데 저기 멀리서 사람 하나가 오는 것이 보인다. 쟝이다.
오 소아 나 너 앞으로 못볼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만나네! 하고 밝게 웃으며 다가오다 얼굴을 바꾸어 괜찮냐고 묻는다. 전혀 괜찮지 않다. 괜찮다고 대답하려는데 청승맞게 또 눈물이 솟는다. 이유를 묻길래 그냥 좋지 않은 소식을 보아서 감정이 좋지 않아 그렇다고 대답한다. 쟝이 우리 그녀를 위해 기도해주자 한다.
햇살은 내가 길을 시작한 뒤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며 떨어지는 빛 아래에서 쟝의 레퀴엠 노래가락을 들으며 한참 울었다.
노래가 그치고 쟝이 자기 밥 먹을거라고, 조금 쉬었다 한동안은 같이 걷는게 어떻냐길래 그러면 좋겠다고 대답한다. 내가 쉬었던 그 나무 박스 안에서 쟝은 초콜릿, 어제 남긴 바게뜨 샌드위치, 치즈와 본마망 코코넛 쿠키를 먹는다. 내가 조금 가라앉아 보이니 코코넛 쿠키를 나에게 내민다. 먹으란다. 단 걸 먹어야 기분이 좋아져, 한번 해 봐. 맛이 있다.
쟝의 식사가 마친 뒤 함께 출발한다. 좋아하는 가수가 누가 있는지 묻길래 이 사람 저 사람 대다 제이슨므라즈가 나오니 자기가 진짜 팬이란다. 스틱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불러준다. 잘 부른다! 알고 보니 아마추어 가스펠 그룹에서 오랫동안 활동 했단다. 길을 걷는 내내 나를 계속 웃게 해 주려 하고 노래 부르고 농담도 하는게 느껴진다. 감동을 받는다. 쟝은 어렸을 적 심하게 아픈 뒤로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단다. 그러더니 나를 오른쪽에 배치하고 이제 완벽한 포지션이라며 또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쟝과 걷다 말들을 만났다. 슈보- 슈발- 단어도 배운다.
말 코에 파리가 너무 많이 붙어있어서 괴로워 보인다.
그렇게 걷다 보니 원래 쟝이 묵으려던 마을이 나온다. 예쁜 공원이 하나 나와 그 곳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쟝은 처음 보는 이에게도 반갑게 인사하는 능력을 가졌다. 낚시 하던 아저씨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수다도 떤다. 함께 걸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짐을 느낀다.
공원같지 않지만 공원이다.
저 멀리 낚시 하는 아저씨와 엄지 척 치켜든 쟝.
이제 나는 내가 묵을 라바스티드 뮤하로 갈게 고마웠어, 하고 인사하니 쟝이 얼른 가방을 메고 따라나선다. 너 이 마을에서 묵기로 한 것 아니었어?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돼! 그리고 너 평소에 20km정도만 걷는다며. 내가 갈 곳은 총 28km정도라고. 그랬더니 쟝이 왠지 더 걷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그렇게 쟝은 내가 묵으려던 마을까지 따라온다. 아니, 따라와 주었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나는 공립 지트로 향한다. 쟝은 동네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아주머니로 하여금 나를 그 지트 앞으로 갈 수 있게 해주고 자기는 다른 지트로 간다 한다.
혼자 공립 지트 근처를 서성여도 아무도 안와서 전화번호로 전화 하니 시청이 연결이 된다. 시청 직원들은 애석하게도 영어 불가. 그래서 그 지트 0층의 동물병원 의사선생님께 여쭤보니 얼른 나오셔서 도와주신다. 알고 보니 지트 정문 앞에 시기 별로 지트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있었던 것. 동물병원 의사선생님은 대신 관리자에게 전화를 해 준다. 감사하다.
지트 관리자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달려온다. 지트 관리자는 자기는 파리에서 살다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내려왔단다. 평화롭고 좋은 마을이라며 자랑한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찍고 숙박비를 지불하고 들어간다. 시설은 정말 좋은데 누가 봐도 사람의 때를 타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 같지는 않다. 지트 주인은 0층의 주방 겸 식당을 안내해 주고, 1층의 방 중 하나를 내어준다. 그 뒤 근처 꺄르푸 가는 길과 관광안내소 위치도 알려준다.
친절하고 한가해보이는 관광안내소에 방문한다. 멍 때리고 있다가 내가 방문하니 소스라치게 놀란 직원에게 내일 지트 예약을 다시 부탁한다. 직원이 혹시 당신 어제 전화해서 예약했냐 묻는다. 맞아요! 그 지트 주인이 음성메세지 확인 해서 예약 완료되었다 말했다며 걱정하지 말란다. 그 직원은 내 방문이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예약 확인을 끝내고 나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냐고. 진짜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봐서 웃음이 나왔다. 열차 파업 등등 사정을 얘기하니 정말 프랑스다운 이유라며, 어찌됐든 이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단다. 그러더니 말한다. 오늘 네가 첫 방문자였단다! 세상에. 오후 5시의 첫 방문자라니. 이렇게 관광객이 많지 않은 곳도 완벽한 시설로 모든 마을에 관광안내소를 운영하는 프랑스에 다시금 놀란다.
꺄르푸 가서 장을 본다. 관광 안내소가 있는 마을 중심에서 걸어서 10분정도. 관광안내소는 또 지트에서 걸어서 5분 남짓이다. 내일 아침을 위한 크로와상과 점심을 위한 바게뜨도 사서 풍족하다. 신선한 오렌지를 착즙해 파는 주스도 있어 산다. 예전에 스페인 출장 다닌 이후로 오렌지 착즙 판매기가 있는 수퍼에 가면 무조건 사게 된다.
돌아와서 밥 먹으며 계획을 짠다. 저녁 식사는 냉동피자와 야채스프. 지트 안에는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빵, 잼, 스프, 그리고 티백들도 있었다. 너무 한가하고 조용하다. 적막이 무서워 팟캐스트 받아놓은 걸 틀어둔다. 평소에는 꺼져있던 이 공립 지트에 불이 켜지고 소리가 나는 게 신기한지 퇴근 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들여다보고 간다. 밝게 웃으며 인사하니 다들 웃으며 인사한다. 동물병원 방문한 사람들도 한번씩 보고 간다. 퇴근하는 의사 선생님이 눈인사 하고 돌아간다.
라바스티드 뮤하 공립 지트. 0층에는 주방 겸 식당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 1층에 가면 방이 세개정도 있다.
미암미암도도를 보고 있는데 쟝이 문을 두드린다. 쟝은 마을 구경다니다가 동네 사람들이 초대 해서 함께 피자를 먹고 남는 것까지 싸 왔단다. 이 어마어마한 친화력... 쟝이 저녁 먹었냐고, 기분은 좀 어떠냐고 묻길래 이제 괜찮다고 고맙다고 답한다. 쟝이 네 발은 어떠니 하길래 나는 물집 하나 굳은살 하나 없다고 자랑한다. 쟝이 자기 발은 좀 안좋은 것 같아 하며 내게 보여준다. 세상에 내 손바닥 반 만한 물집이 양쪽 발에 잡혀 있다. 이 발로 내 잰 걸음을 따라 걸은 쟝에 놀란다. 약간 화도 난다. 왜 이렇게 아픈 걸 말 안한거지?
방으로 가 반짇고리와 소독약, 밴드통을 챙겨 온다. 소독하고 바늘을 쟝의 라이터로 지진 뒤 물집을 터뜨린다. 설악산 다녀온 뒤 물집 터뜨려본 경험이 십분 도움이 되었다. 쟝에게 밤새 물집의 물 다 뺀 뒤 할 조치들을 알려주었는데 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쟝과 지트에 있던 차를 함께 마신다. 지트에 자기 혼자밖에 없단다. 어제 함께 로카마두르에 묵었었던 에릭과 개저씨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티보와 키트리는 티보의 엄청 큰 물집때문에 하루 더 로카마두르에 있을 예정이란다. 아무래도 오늘 여기 온 순례자는 너와 나밖에 없는 것 같지? 그러게 말야.
음악을 틀어놓고 차를 마시며, 쟝은 담배를 말고 나는 하릴없이 미암미암 도도를 보다가 스프 박스에 있는 단어 맞추기따위를 한다. 묘한 간질간질한 분위기. 쟝이 이제 가야겠다고 일어서면서 바람을 좀 쐬는 건 어떤지 제안한다. 따라나선다.
달이 참 밝다. 별도 참 많다. 쟝이 태우는 담배연기의 모양이 일그러졌다 펴지는 걸 본다. 기분은 좀 어떠냐고 다시 묻는다. 네 덕분에 좋아졌어 정말 고마워 하고 답한다. 나 이제 갈게, 하고 가려는 쟝이 포옹한다. 긴 시간의 포옹과 오가는 시선. 자연스러운 입맞춤 뒤, 쟝은 왕자님 인사를 하고 자신이 묵는 지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 하루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난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