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5. 당신과 걷는 길 - 달콤한 시간을 헤엄쳐 베흐로

by 소아

9월 22일 금요일

GR46 Labastide murat - Vers 24km


아침에 일어나 바게뜨와 커피 한 사발로 식사를 마친다. 빨래는 어제 날씨가 좋았어서 그런지 바싹 말라 기분이 좋다. 다시 힘을 내 가방을 메고 오늘의 목적지 베흐로 향한다.

로카마두르 이후부터는 계속 날씨가 좋다.

라바스티드 뮤하의 성당 입구.


혹시나 하고 쟝이 묵었던 지트 앞을 지나가다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도 없다. 쟝은 천천히 걷는 걸 알고 일부러 조금 늦게 출발했는데 나의 착오였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그냥 길을 걷기 시작한다. 길을 걷다가 GR 사인이 보이지 않아 아이들 학교 데려다주려고 나온 아저씨에게 묻는다. 하얀색 빨간색 표시 찾고 있어요. 하고 물으니 얼른 손가락으로 가리켜준다. 메흑씨! 아이들이 동양인은 많이 못 보았는지 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저씨의 친절한 봉 슈맹! 기분이 좋아진다.

라바스티드 뮤하를 조금 벗어나면 바로 국도변 길이 이어진다. 상당히 단조롭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큰 미루나무가 있는 들판이 나온다. 저 낮은 산 바로 밑에도 길이 있는데, GR 길인 줄 알고 들어섰다가 불안해서 다시 돌아 나와보니 그냥 산책길이었다. 다행히 GR 사인을 바로 찾았다.

너른 들판과 미루나무들


그렇게 자박자박 길을 걷는다. 도로변, 공장 주변, 산길과 오르막길. 오전 내내 혼자 길을 걷는다. 쟝은 얼마나 빨리 간 걸까. 그나저나 진짜 지금 이 루트 사람 별로 없네..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다 숲길에서 저만치 앞서가는 쟝의 뒷모습을 본다. 쟝!! 세 번을 크게 불렀지만 뒤돌아 보지 않는다. 거의 뛰다시피 걸어가 톡톡 건드리니 놀란다. 나도 놀랐다. 음악소리가 다 새어 나올 정도로 크게 듣고 있었다.

쟝에게 오늘 널 못 볼 줄 알았어 하고 이야기한다. 나는 네가 빨리 간 줄 알고 따라잡기 위해 정말 열심히 걷고 있었어 하고 쟝이 말하며 웃는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쁘다.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쟝이 아침식사 함께 하자는 메일을 보냈었다고, 못 봤냐며 슬퍼한다. 지방에서 잘 터지지 않는 FREE 통신사가 처음 원망스럽다. 쟝이 묵었던 지트에서 주인이 오랜만의 손님이라며 성대한 아침식사를 대접했었단다. 쟝이 친구가 있는데 오라 해도 되냐 했더니 그랬단다. 네가 없어서 아쉬운 아침이었어 하고 쟝이 얘기하며 슬며시 손을 잡는다. 잠깐의 적막 후 순간 둘 다 웃음이 터진다. 이거 아이들이 연애 놀이하는 것 같아 하고 웃으니 쟝도 그런 생각이 들어 웃었단다.

슬슬 배가 고파진다. 마을 근처가 나오는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근처 농장이 집이라는 가족들을 만나 쟝이 신나게 대화를 나눈다. 나중에 물어보니 밥 먹을만한 데 없냐고 물었고, 좀 더 가면 자기 정원이 있으니 거기 들어가서 먹으라 했단다. 그 아저씨는 쟝에게 눈을 찡긋하더니 빠른 불어로 신나게 뭔가를 얘기했었는데, 쟝이 엄청 웃는다. 뭐야 뭐야 하고 물으니, 그곳에 가면 멋진 다리가 있고, 거기에서 네 여자친구와 즐거운 점심 식사를 보낼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단다. 쟝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곧 사랑을 할 레이디라고 했단다. 프랑스인들은 사랑을 사랑해, 쟝이 얘기한다.

과연 좀 더 가니 개인 구역이라고 줄이 쳐져 있는 잔디밭과 개울가가 있다. 들어가 보니 다리가 있다. 다리에는 <연인의 다리>라고 써져있다고 쟝이 웃는다. 어제 꺄르푸에서 산 햄과 빵, 사과로 식사를 하고 쟝의 치즈를 얻어먹는다. 쟝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나이프를 자랑한다.

연인의 다리라고 써져있단다

한때는 이 곳에서 축구를 했었는지 그물망 없는 축구대가 서 있다.

내가 요가가 취미라고 말했더니, 자신도 요가를 좋아한다며 자세를 취하는 쟝. 널브러져 있는 내 가방과 빨간 우비가 보인다.


그 뒤 한동안 이끼가 낀 숲을 걷는다. 알고 보니 쟝도 애니메이션, 특히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해 한참 동안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의 덕력은 낭중지추와 같은 것. 어떻게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잘 아니! 라고 쟝이 감탄한다. 왜긴.... 덕후니까....

쟝도 만만치 않다. 덕중 덕은 양덕이다 라는 말은 진실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게임은 파이널 판타지. 이 외에도 각종 게임들에 대해서 쟝이 보여주는 그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좋은 컴퓨터와 빠른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가게들이 많냐는 것이 사실이냐며 묻는다. 한 블럭에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고 답하니 유럽에는 막 도입되기 시작한 것 같다고, 어서 퍼졌으면 좋겠단다.

찻길 옆을 걷다 보니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 왜 걸어가냐, 차를 얻어타지 그러냐 하고 묻는다. 그러면서 당장 타란다. 친절한 아저씨. 쟝이 우리는 순례중이라고 그렇게 제안해줘서 고맙다고 얘기한다. 행운을 빌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가는 아저씨를 보며, 어디든지간에 차가운 사람과 따뜻한 사람의 비율은 일정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근처가 국립공원이라 하더니 산세가 심상치않다. 멋진 산맥이 보이는 길을 계속해서 걷다 숲길로 들어선다. 한참 평범한 숲길을 걷고 나니 온통 이끼로 뒤덮인 숲이 이어진다.

걷다 보니 쟝이 아픔을 호소한다. 내가 아프면 아프다고 꼭 얘기하고 어제처럼 참지 말라 했더니 바로 이행한다. 그냥 털퍼덕 앉으려고 하길래 내 우비를 넓게 깔고 그 위에 배낭을 놓은 뒤 앉게 한다. 신발 벗고 양말 벗고 발 말리면서 쉬라고 잔소리를 해 대니 레이디 앞에서 흉한 발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어이가 없어. 계속 쉬지 않고 잔소리하니 신발만 벗겠단다.

둘 다 발을 말리며 이끼 낀 숲에서 30분 정도 앉아 휴식을 취한다.

대화 없이 포개진 손. 달달한 시간 안에서 느긋하게 헤엄친다.

이끼가 낀 숲을 한참 걸었다.

지브리 애니에 나올 것 같지 않니? 하고 말하니 금방이라도 토토로가 지나갈 것 같아 하고 쟝이 답했다.


쟝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린다. 쟝이 전 직장 동료 둘이 프랑스 국내 여행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해서 오늘 만나기로 했다 말한 게 기억난다. 전화를 받아야 하지 않겠니 하니 그제서야 쟝이 전화를 받아든다. 역시나 그 친구들이다. 쟝은 한참 전화를 하더니 그 친구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올 거라며 좋아한다. GPS 위치를 보냈다고. 발 아파서 못 걷겠다고 친구들에게 조금 투정 부렸단다.

10분쯤 지났을까, 차 하나가 이 시골길을 덜걱대며 다가온다. 쟝의 친구들이다. 쟝이 신나서 그들과 포옹하고 나를 소개한다. 친절한 친구들은 트렁크에 나와 쟝의 가방들을 실으며 말한다. 아니 소아 너 이 가방 들고 다니는 것 맞아? 아마 이 때 먹을 게 잔뜩 들었어서 13kg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헤헤

남는 길은 쟝 친구들의 차를 타고 간다. 3km 남짓한 거리라 차를 타니 그야말로 금방이다. 걸었다면 40~50분 정도는 걸었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지트 근처에 도착했는데도 지트가 보이지 않아 친구들과 쟝이 다 퍼져서 찾았고 쟝의 친구가 찾아주었다. 쟝은 친구들이 캠핑 도구를 가져와서 그들과 함께 잘 거라고 한다. 나도 괜찮다면 오라고 초대했지만 왠지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본다는데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나중에 길에서 보자고 인사한다. 이렇게 인사하는 와중에도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못 만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오늘 만든 절친과 헤어지게 하기도 하고 지긋지긋한 원수와 매일 마주치게 하기도 하니까.

지트 입구는 작은데 들어가면 압축적이면서도 효율적인 공간 배분을 자랑하는 지트가 있다.


지트에 도착하니 인상 좋은 지트 주인이 나를 반긴다. 자기가 영어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천만에요! 자신도 순례자였다며, 이렇게 새로운 순례자를 만나 기쁘다는 평범하지만 진심이 묻어 나오는 인사를 해 주신다. 지트는 시설이 깔끔하고 쾌적하다. 방에 들어가니 나스비날의 공립 지트에서 동양인들 시끄럽게 밥 먹지 않냐고 말 했던 아저씨가 있다. 아저씨도 나도 엄청 놀란다. 아저씨는 GR65를 따라 걷지 않고 Célé길을 걸어서 오늘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고, 나는 열차 타고 우회해서 로카마두르부터 걸어서 오늘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얄미운 말로 속을 긁었을지라도 길동무를 만나면 반갑다.

2층 침대도 있고

1층 침대도 있지요.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보인다. 저 발코니에서는 강이 보인다.


이제는 일상처럼 지트에 도착해 샤워와 손빨래를 마치고 빨래를 넌다. 그리고 내일 끼닛거리를 장 보기 위해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다. 근처에 국립공원이 있어서 그런지 관광객이 드문드문 보인다. 이제는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도착한 마을의 성당에 들러서 감사 기도도 드린다. 이 성당은 성지라기보다는 정말 동네 성당 같아서, 한국 성당처럼 청년회나 초등부들이 만든 약간은 조악하지만 아기자기한 노엘 패널 같은 것도 있었다.

동네 성당.

여기가 내 영역이야- 하고 편히 잠든 고양이.

이건 뭐지 싶어서 찍었다. 문을 열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것만 같다.

베흐역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문 안을 들여다보니 앤틱한 공간이 있었다. 뭐였을까.

지트 바로 옆에는 강이 흐르고 멋진 다리가 있다. 다리 위에 몇몇 관광객들이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트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다. 지트 주인이 아페리티프로 건배를 하기 전 뭔가 나에게 말을 해준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퀘벡 아주머니 두 분 중 영어가 가능했던 프랑신이 와우 감탄사를 외친다. 프랑신이 통역해 주길, 내가 이곳의 첫 번째 한국인 손님이라며 특별히 아끼는 와인을 땄단다. 몇 년도 어디의 와인인지 이야기를 했는데 나 빼고 다른 이들은 우와- 하고 좋아한다. 와인에 문외한이라 안타깝다. 하지만 이제 메흑시 보꾸는 잘 할 수 있지! 메흑시 보꾸!

스프

한국인 손님이 왔다고 오늘은 쌀 메뉴를 했단다. 감사합니다 하하

이게 요거트에 꾸덕꾸덕한 과자가 담겨있었고 그릇 밑에 캬라멜 맛이 물씬 나는 과자가 있었는데 취향 저격이었다.


지트 주인이 요리한 식사는 맛있었다. 느리게 걷고 있지만 행복하다는 퀘벡 아주머니 두 분 프랑신과 루시와 통성명을 한다. Célé길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길을 걸으셨단다. 내일 카오르로 가신다니 아마 함께 걷게 될 것 같다.

잠이 드는데 새벽에 여러 번 깨고 만다. 달그림자가 드리워진 방에서 쟝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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