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좋다

16. 당신과 걷는 길 - 루시와 프랑신과 느릿느릿, 쟝과의 재회

by 소아

9월 23일 토요일

GR46 & GR36 Vers - Cahors 21,5 km


루씨와 프랑신이 부스럭거리며 인기척을 내길래 함께 일어난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이 두 분이 숙소 예약을 한다. 프랑신이 숙소를 예약했냐고 물으신다. 베흐에서 관광안내소를 못봐서 아침에 지트 주인에게 예약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잘 됐다! 저도 부탁드려요 부디! 하고 얼른 외치니 통화중이던 루시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요! 하고 말한다. 오예 잘 되었다.

Gîte d'étape le monde allant vers의 따뜻했던 사장님


출발하기 전 프랑신에게 프랑스어 문장을 하나 가르쳐달라고 한 뒤 연습해본다. 그리고 따뜻했던 주인에게 이야기 한다. 여기 머물러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으며 뭔가 답해주셨는데 알아듣질 못해서 슬프다. 프랑신이 통역를 도와준다.
프랑신과 루시라는 새 길동무와 함께 출발하는 길. 초반부터 심상치 않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잠시 멈추어 사진을 찍는다. 프랑신 왈, 우리는 항상 하루 15km정도를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어. 역시... 평소와는 다른 사진 촬영량이다.

그래도 다리는 멋지다

걸음이 빨라 저만치 앞서나가는 루씨. 프랑신은 나와 루씨의 하아~~안참 뒤에 있다.


한참동안 지트 옆 다리 사진을 찍고 강을 따라 간다. GR마크도 있지만 초록색 화살표도 있다. 어제 저녁식사때 지트 사장님이 따라가라던 표시가 저 초록색 화살표인 모양이다. 그것들을 따라가고 있을 때 저 멀리 캠핑장에서 아침식사중인 쟝과 친구 둘이 보인다. 쟝이 쏘오오아아아아아ㅡ 하면서 신나게 손을 흔든다. 친구들도 벤치에 앉아 손을 흔든다. 내가 손가락으로 화살표를 가리키며 나 카오르로 가! 하고 외치니 뭐라고???? 하는 답변이 들린다. 대화를 나누기에 너무 멀다. 그냥 안녕 손을 흔들고 프랑신과 루시를 따라잡는다.

교회가 보이면 무조건 들러야하는 루시와 프랑신. 그래서 루시와 프랑신을 기다리다 찍었다.

앞서나가는 루시

호두나무에서 열심히 서리중인 루시와 프랑신

프랑신! 고만 따요!


프랑신과 루시와 함께 걸으면서 나는 순례길 최고의 느긋함을 맛본다. 보통 걷는 거리가 짧을 땐 난 빨리 걸어버리고 먼저 가서 쉬는 걸 택했는데, 이 분들과 걸으니 온갖 풍경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걷게 된다. 걷고 사진찍고 걷고 사진찍고... 루시는 꽤 걸음이 빠른데 프랑신은 무릎이 아파 천천히 걸을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사진도 찍어야하니 느리게 걷지만 엄청 분주하다. 너무 천천히 가다 오히려 길을 잃어버릴 뻔 했지만 길찾기 고수이자 빠른 걸음을 가진 루시가 곧 길을 찾아낸다.

이제는 쓰지 않는 멋진 기찻길과 그 기찻길이 놓인 다리를 건너 간다. 한참 숲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강변을 따라 난 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낚시 하는 부자, 카오르에서 여기까지 조깅 온 사람, 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만난다.

기찻길을 걸어가는 루시를 찍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가서 흔들렸다

이제는 쓰지 않는 기찻길이 놓인 다리

철근 사이로 보이는 멋진 풍경

멋지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무서웠다. 사진으로 제대로 대면중.

이 자리에서 루시와 나는 5분정도 프랑신을 기다렸다. 저 소실점 끝에 프랑신의 실루엣이 보인다.

프랑신은 우리가 기다리든 말든 사진을 오랫동안 찍는다ㅋㅋㅋ 귀여워


한참 걷다 주말농장같은 곳을 지난다. 프랑신과 루시가 점심을 먹자 제안한다. 벌써 정오다. 화장실을 단 한 곳도 발견 못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루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숲 화장실(?)에 다녀온다. 그러면서 너도 급하다면 저~쪽 숲에 다녀오란다. 봐 주겠다고. 그렇게 나는 잠시 문명인이기를 포기했다.

우리는 각자 음식보따리를 꺼내 식사를 한다. 루시가 준 치즈가 맛있어서 나도 꼭 사야지 하고 결심한다. 전부터 계속 맛있어하던건데 이 김에 이름을 확실히 배운다. 브리치즈다. 루시는 영어를 못하는데, 루시가 뭔가 말 하고 싶었는지 프랑신에게 통역을 부탁한다. 프랑신이 루시 말 듣고 엄청 웃었는데, 평소 프랑신 자기때문에 너무 늦게 걷게 되었는데 나와 걸으니 시간당 3~4km정도 속도를 낼 수 있었단다. 루시는 지금 걷는 템포가 굉장히 좋다고. 프랑신은 무릎의 고통을 호소한다. 아무래도 프랑신에게 나는 너무 빨랐던 것 같다.

강을 따라 난 숲길을 걸으며 강을 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낚시배가 보인다.

GR46에서 36으로 갈아타는 구간이다.

GR36에서도 카오르 가는 구간은 배리에이션이다.

카오르 가던 길 강 건너 보이던 마을 하나.

호박이 엄청 컸다.

길 위의 생쟉 조가비 표시



지트에 도착하니 오후 한시 조금 넘었다. 지트는 세시에 연단다. 일단 밖에 있는 가방 보관함에 가방을 넣자마자 쟝에게서 문자가 온다. 자기는 Jacobins 이라는 지트에 머물기로 했으니, 까오르에 있다면 성당 근처에서 만나. 우와, 설마 했는데 같은 지트이다. 야호. 같은 지트야 쟝.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이따가 지트에서 봐. 오! 그래 이따 봐! 괜히 호랑이 기운이 솟는다.

마을에 도착했으니 평화롭게 티나 한 잔 해야겠다는 루시와 프랑신. 나에게도 함께 가는 것을 제안했지만 오늘 하루치 대화를 다 한 것같이 왠지 지쳐서 혼자 시내를 돌아보겠다고 한다. 그렇게 카오르 시내들 둘러보러 강을 건너는데, 어린 애들이 칭챙총 하면서 눈을 찢는 흉내를 내며 쫒아온다. 본체 만체 하니 더 빠른 걸음으로 쫒아와 겁을 준다. 계속 시선은 두고 있지 않지만 어린 10대 후반 남자애들은 덩치도 커서 조금 무섭다. 그래서 더 빠르게 뛰듯이 걸어 바로 보이는 공원으로 간다. 공원 벤치에 어떤 젊은 여자가 책을 읽고 있길래 얼른 그 옆에 앉아 그 애들을 본다. 애들은 입을 삐죽 내밀며 어깨를 으쓱 하고 돌아간다.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리고 성당쪽으로 가니 루시와 프랑신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다. 내가 투어리스트오피스에 갈 거라고 말하니 자기들도 그곳에 가려고 했는데 길치라 길을 잃어버렸단다. 더불어 지도 좀 가져다 달라고, 그리고 시간이 완전 넉넉하지는 않으니 한 서너곳만 방문 할 곳을 추천 해 달란다.

투어리스트오피스는 성당으로부터 걸어서 10분 남짓. 길을 잃어버릴 만 한 곳도 아니었지만 그 분들은 지도 어플 쓰는게 아직 어색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투어리스트오피스에 숙소 예약을 부탁한다. 내일 묵고 싶었던 숙소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직원은 어깨를 으쓱 하면서 미안하다 한다. 이제는 예약이 안되어도 부탁할 사람도 많으니 그리 걱정이 되지 않는다. 대신 그 직원에게 이 마을 관광지도와 추천 장소 서너군데를 부탁한다. 그녀는 지도에 표시를 해서 나에게 건네준다.

투어리스트 오피스 가던 길. 건널목도 있고 차도 많으면 순례길에서는 대도시!


지트로 돌아가는 길 바로 전, 아직 카페에 있는 루시와 프랑신에게 지도를 건네주고 성당을 둘러본다. 천장화가 아름답고 회랑이 멋진 성당이다. 천장화를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무형의 것이었을 '천국'이라는 사후세계를 간구하도록 만든 종교의 힘을 생각한다.
돌아다니는 김에 까오르에서 가장 유명한 발렁트헤 다리 Pont Valentré 를 보러 간다.
근사하다. 이 다리를 내일 건너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카오르의 대성당 입구

아름다운 카오르의 대성당 천장화

천사들의 입상 조각이 독특해서 좋았다. 날개의 모양이라든가-

회랑을 바라보던 한 부인

회랑을 본다

낡은 성당 건물들 사이로 새가 분주히 날아다녔는데 찍히질 않았네

내가 묵었던 지트의 거의 정 반대에 있던 발렁트헤 다리 Pont Valentré. 내일 이 다리를 건너 길을 계속 이어가야한다.

마을구경을 마치고

지트가 있는 카오르 외곽쪽으로 걸어간다.


세시 반쯤일까. 지트로 와 보니 주인이 반겨준다. 내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있지 않고 루시 및 총 3인으로 예약 돼 있어서 주인이 조금 헷갈렸지만 내가 퀘벡에서 온 노부인 두 명, 루시와 프랑신이 저와 함께 묵을 예정이랍니다 하고 이야기하니 바로 캐치 해 주신다. 주인이 말하길, 오베르뉴 출신의 쟝이라는 친구가 안에 있다며 널 기다리고 있다고 미소짓는다. 너무 밝게 웃는 지트 주인 때문에 약간 민망할 정도.

지트 소개를 받는데 샤워실 칸막이에서 '쏘오오오아~!!!' 하는 쩌렁쩌렁한 쟝 목소리가 들린다. 순간 지트 주인과 나, 동시에 빵 터져 웃는다. 부끄럽다. 그래도 좋다.

짐을 풀고 나도 샤워를 한 뒤 빨래를 한다. 정원에 빨래를 넌다. 발의 물집을 한참 들여다 보는 쟝의 뒷모습이 보인다. 쟝에게 괜찮냐고 물으니 얼른 양말을 신는다. 오늘 토요일이라 병원이 열지 않아 약사를 만나러 간단다. 쟝은 약국으로 떠나고 미암미암도도를 계속 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우와...! 피쟉에서 만나 함께 여고생처럼 까르르 웃었던, 초록머리의 미국서 온 디아나!!!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또 여고생처럼 방방 뛰며 인사한다.

내일 점심거리 장을 봐 오고 나니 쟝이 약을 한 봉지 사 왔다. 마침 잘 되었다. 쟝에게 숙소 예약 부탁을 한다. 라스카반에 묵을 거라고 하니 이렇게나 멀리 가냐고 놀란다. 아니... 그렇게 멀지 않아. 24km 남짓이야. 쟝 표정이 복잡미묘하다.

쟝이 계속 아페리티프를 해야한다고 노래를 불러 왔더랬다. 드디어 기회라며 쟝이 지트 냉장고의 맥주를 산다. 쟝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주스를 마신다. 쟝이 줄 것이 있다 하여 받아 보니 루르드 성모가 그려진 펜던트이다. 매일 쟝의 지팡이에 달려있던 펜던트.


쟝은 원래 친구들과 더 놀려고 했지만 왠지 길을 더 걷고 싶어서 바로 헤어지고 오늘 늦은 오전에 걷기 시작했단다. 그러다 길을 잃어서 차를 얻어 타 생각보다 금방 왔다고. 쟝이 묻는다. 내일 언제 걷기 시작할거야? 출발은 여느때와 같이 8시정도가 아닐까 하고 답한다.


그 때 이유 모를 용기가 조금 솟는다. 함께 걷고싶다 말한다. 함께 걷지 않고 따로 걸으니 마음이 조금 쓸쓸했다고 말한다. 나도 그래. 기분이 좋아진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 디아나가 우리를 향해 오다가 뒷걸음으로 돌아간다. 윙크까지 덤으로.

드미팡시옹을 신청한 저녁식사 인원이 모인다. 디아나와 나를 포함해 여덟정도 되는 인원. 무난한 저녁시간. 무엇보다도 디아나와 다시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기뻤다. 피쟉에서 헤어지며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녀는 피쟉부터 여기까지 계속 부지런하게 걸어왔단다. 로카마두르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보여주니 아주 부러워한다. 나도 계속 걸어온 그녀가 부럽다. 서로 부러워한다. 프랑신과 루시는 다른 이들과 프랑스어로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정원에 널어놓은 빨래들을 걷으러 간다. 무심코 본 하늘에 별들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별들에 신나서 소리를 지른다. 쟝이 무슨일이냐 하며 놀라 온다. 쟝 저거봐 별 엄청 많아!!! 쟝이 보더니 산에 올라가면 더 많이 볼 수 있어 하고 말한다. 만약 네가 한국 서울에 온다면, 이런 밤하늘은 절대 볼 수 없단 걸 알 수 있을거야.

프랑신과 루시와 셋이 묵는 방. 자기 전 이것저것 수다를 떤다. 프랑신과 루시는 경륜탓일까, 어디서 빨래 너는 걸 몰래 가져와서 미처 마르지 않은 빨래들을 넌다. 너도 널란다. 같이 널고 잠자리에 든다. 루시는 영어를 못한다며 나에게 그리 많은 말은 하지 않지만, 진짜 엄마 진짜 할머니같다. 어디선가 이불을 챙겨와 내게 두껍게 더 덮어준다. 밤에 추울 것 같단다. 이불이 날 무겁게 짓누르지만 마음이 가볍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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