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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14. 2018

안녕

19. 당신과 걷는 길 - 나는 한 명의 순례자로 돌아왔다

9월 27일 수요일

GR65 Montcuq - Durfort-Lacapelette 36,4 km



약속한 하루가 지났다.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에 진짜 추웠어서 둘 다 침낭에서 코만 내밀고 잠들었다. 오들오들 떨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너 살아있니? 장난스레 물으니 쟝이 빵 터진다. 운 좋게도 살아있어. 이슬이 내린 잔디밭을 슬리퍼만 신고 걷자니 죽을 것 같다. 이 와중에 이지는 공을 물고 나를 향해 또 달려온다. 아...이지... 오늘은 제발..

쟝과 아침식사를 한다. 쟝은 가스로 불을 피워 티를 우려 나에게 건네준다. 따뜻한 티를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너의 첫 캠핑은 어땠니 하고 물으니, 인생에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으로 좋았어하고 답한다. 쟝이 크게 웃는다. 날씨가 좋은 날, 따뜻할 때 하면 아주 좋단다. 오늘 유난히 춥네 하고 말한다.

놀아달라고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는 이지

꼬리가 정말 빨리 흔들렸는데.

쟝 가방에 매달린 내 조가비. 쟝은 나에게 루르드의 성모 펜던트를 주었고, 나도 쟝에게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 마침 쟝에게 조가비가 없길래. 


쟝은 떠나기 전 이것저것 알려준다. 내가 맛있다며 좋아하던 샐러드를 파는 체인점, 마을 불렁제리에서 언제 빵을 사면 좋은 빵을 살 수 있는지, 내가 좋아하던 쟝이 갖고 있던 치즈 이름, 그리고 쟝의 전화번호. 사고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전화해. 그리고 쟝이 자신의 빵을 나누어 주면서 빵 이름을 모르겠다면 빵집에 이 빵을 내밀란다. 


어제 나는 내가 30분 정도 먼저 출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었다. 길을 걷다가 중간에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조금 이기적일 수 있겠지만.

안녕, 하고 쟝이 인사하길래 곧 보자 하고 답한다. 마을 성당의 종이 8시를 알릴 때 나는 먼저 출발한다. 

몽큌을 떠나던 시간

안녕, 몽큌


그렇게 다시 길을 나선다. 하루 쉬었다고 다리도 부드럽고 좋다. 새로운 순례자들을 계속 만난다. 숲길을 걷고, 들판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언덕길도 걷는다. 순례자들과 대화를 한다. 어디서부터 걷니, 어디까지 걷니.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다 져 버린 해바라기 밭 사이를 한참 걸었다.

오르막에 올라 힘들어서 잠깐 쉬었다. 돌아보니 아름다운 들판이 보인다.

숲길도 걷는다. 숲길을 걷다가 종달새처럼 말하는 프랑스 아주머니도 만났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들판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밭 끄트머리에 덩그러니 말뚝이 있다. 그곳에 그려진 GR 마크.


어제 예약한 지트 주인은 로제르트가 오는 길의 큰 마을이니 그곳에서 먹을 걸 살 수 있을 거라 이야기했었다. 너른 들판에 큰 성처럼 얹혀있는 로제르트는 레스토랑은 많았지만 음식을 살 곳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몇 안 되는 레스토랑도 많이들 닫았다. 오후 1시의 땡볕에 몸이 익는 기분이다. 정말 덥다. 로제르트의 마을 외곽의 벤치에서 납작 복숭아와 버터 바른 빵으로 점심을 먹는다. 

들판을 걷다가 저 멀리 언덕 위의 로제르트를 본다.

로제르트의 광장 한 켠.

이런 풍경을 보며 점심을 먹었다.

로제르트를 돌아서서 걷다 보면 조금 숨 가쁜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 오르막길이 끝나자 저런 패널이 있었다. 저기에 가방을 걸고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숲 가운데에 교회가 있었다. 너무 매력적이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교회 벽에 벌들이 너무 많이 붙어있어서 도망쳤다. 저 담벼락 구석에 식수 수도꼭지가 있어서 물만 채워왔다.


도로를 따라 난 길을 계속 걷다가 포도밭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포도밭 사이로 한참 걷다 보니 기부제로 포도를 비롯한 과일들이 있는 곳도 발견한다. 조금 기부하고 포도를 먹는다. 감사 인사를 방명록에 남긴다. 그리고 계속 길을 걷는다.

기부제로 운영되던, 포도농장 옆 매점

뒤포트 가는 길은 꽤나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길이다.

다 시들어버린 해바라기 밭을 또 만난다.


그림자가 한껏 길어질 때쯤 숙소에 도착한다. 오늘은 정말 긴 길이었다. 내일 므와삭을 갈 땐 무리하고 싶지 않았어서 오늘 좀 무리했다. 벨을 누르니 영어를 전혀 못하는 지트 관리자가 나온다. 지트 사장의 어머니인 듯 보였다. 영어가 가능한 지트 사장은 곧 오니 기다리란다. 적당한 숙소이다. 6명 도미토리에 나, 프랑스인 할아버지 이렇게 2명, 1층 2인용 방에 나이 든 자매가 묵고 계셨다. 곧 지트 주인이 와 숙소비를 받고 도장을 찍어준다. 빨래 너는 곳을 알려주셔서 지트 주인집 정원 안쪽으로 가 빨래를 널고 있는데 나를 보고 개가 신나서 달려온다. 놀다가 들어와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수프를 끓이고, 빵과 햄을 준비한다. 복숭아 남은 것도 같이 먹는다. 쟝 덕분에 중독된 본 마망 코코넛 쿠키와 차도 마신다. 할아버지와 나이 지긋한 자매 분들도 함께 각자의 저녁식사를 한다. 내가 먼저 식사를 마치고 미암 미암 도도를 보다가 condom이라는 도시명을 보고 빵 터진다. 내가 엄청 웃고 있으니 나이 지긋한 자매 분이 왜 그런지 할아버지께 물어본다. 내 웃는 이유를 아시고 그분들도 같이 웃으신다. 따뜻한 지트의 저녁식사, 그 안에서 나는 한 명의 순례자로 돌아왔다. 

행복한 와중에 쟝을 생각한다. 

잘 걷고 있을까 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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