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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14. 2018

재회

20. 당신과 걷는 길 -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9월 28일 목요일

GR65 Durfort-Lacapelette - Moissac 15,7 km



오늘은 목표로 한 므와싹까지 가까우니 느지막이 걷기 시작한다. 다른 할아버지와 자매분들도 같은 곳을 향해 걷지만 당신들은 걸음이 느리기 때문에 일찍 출발해도 늦게 도착하신단다. 이따 뵙기로 인사를 한다. 돌아 나오기 전 그냥 나오기 아쉬워 지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뒤포트에서 묵었던 지트의 모습

아침에는 포도밭 옆길을 걸었다.

맑은 날씨, 포도밭


국도를 따라 걷다가 길이 왼쪽 밭 사이로 빠진다.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한다. 포도밭 사이도 한참 걷는다. 개를 데리고 거꾸로 순례를 하는 순례자도 만난다. 중간에 성당이 보여 의식처럼 들러서 감사 기도와 오늘의 축복을 요청한다. 그곳 앞에서 멋쟁이 독일 대학생과 순례자 군단을 만난다. 독일에서 온, 정치를 공부하고 있다는 여대생은 스페인 프랑스길을 걸은 뒤 GR길도 구간을 나누어 걷고 있다고 한다. 이번은 콩크부터 므와삭까지 걷는 순서라고. 므와삭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로 돌아갈 거란다. 살고 있는 곳과 이 곳이 가까워서 부럽다. 한국인들은 사진을 잘 찍는다며 나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한다. 자기와 함께 공부하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사진을 잘 찍더란다. 왠지 사명감이 들어 엄청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다.

차분히 걷다 보니 플라타너스가 멋진 국도를 만난다. 여기서 국도를 바로 가로질러 GR마크를 따라갔어야 했는데, 순례자 조심이라고 운전자들을 향해 나 있던 안내표지판을 GR마크로 착각하고 따라간다. 한참 한 시간 동안 걷다 보니 이건 아닌 것 같다. 구글맵을 켜 보니 므와삭과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개인 사유지 밭을 헤치고 어느 누군가의 집 뒷마당 주변을 빙 둘러 마을로 들어간다. 아까 지나간 마을이다. 웃음이 난다. 한 시간밖에 헤매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이득인가. 다시 플라타너스가 아름다운 국도를 만나고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고 GR마크를 잘 발견해 길을 건너 계속 걷는다.




세계 각 도시를 가리키는 표지판과, 100m 더 가면 스낵이 있다는 패널을 만난다. 가 보니 영혼이 자유로운 분들이 꾸며놓은 캠핑장이 있다. 그곳에서 콜라를 한 잔 마신다. 아직도 생각나는 로카마두르 개저씨의 말, 미제의 음료! 이 미제의 선두주자 코카콜라는 힘들고 더울 때 마시면 그렇게 감칠맛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콜라 만세!

흰색 천막 뒤쪽에 바가 하나 있다. 콜라 한잔!

영혼이 자유로운 공간이다.

다시 므와삭으로 향한다.

포도밭을 더 자주 만난다.

빛을 잃어버린 해바라기 밭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들



다시 야금야금 걸어 므와싹에 도착한다. 확실히 대도시라 집들이 나타나고 한참 거주지들을 지나니 도시 중심가가 보인다. 지트로 찾아가기 전 성당에 먼저 들른다. 배낭에는 훔쳐갈 것도 없으니 일단 성당 앞에 던져두고 대성당에 들어가 감사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제 만난 종달새 목소리의 프랑스 아주머니다. 오늘 남편과 이 곳에서 만나 모레 집으로 돌아가신단다. 호텔에서 묵을 예정이셔서 앞으로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따뜻하게 인사를 나눈다. 

저 멀리 므와싹 표지판이 보인다. 기쁘다.

좌회전하세요

마을을 한참 지나면

므와삭 수도원이지요


가방을 들쳐 메고 지트로 다시 가니 딱 2시이다. 보아하니 내가 1등인 모양이다. 체크인을 하고 도장을 찍는다. 방에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친 뒤 시내를 구경한다. 몽큌에서 하루 지체했기 때문에 계속 부지런하게 걸어야 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이 므와삭의 회랑을 만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11세기~12세기의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을 눈으로 즐길 수 있는 므와삭 수도원의 회랑은 이 GR65 길에서 손꼽히는 유적이다. GR65를 조사하면서 반했던 장소 중에 하나이다. 어떻게든 짧게 걸어서라도 나는 이 곳에서 반나절 이상을 누리고 싶었다.
회랑에 입장하기 전 기념품, 입장권 판매, 관광객 안내소를 겸하는 곳에서 지트 예약을 부탁한다. 지트 예약을 무사히 마치고 입장권을 산다. 순례자 할인이 있다. 조금 할인된 가격으로 표를 살 수 있었다.


므와삭 회랑에 들어간다. 천년의 시간이 조용히 잠든 회랑 안에서 행복감을 만끽한다. 쟝에게 사진을 보낸다. 네가 이 풍경을 꼭 보았으면 좋겠어. 한참을 회랑을 거닐고 있는데 전 날 지트에서 만났던 두 자매를 다시 만났다.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다. 이 외에도 길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모두 하나같이 말한다. 이 곳은 정말 굉장해.


한참 동안 그 회랑 안에 앉아 공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여기까지 걸어오며 보았던 것들, 느꼈던 것들을 차분히 바라본다.

성모님




회랑에서의 고요한 시간을 만끽하고 므와삭 시내 구경을 한다. 마침 큰 도시도 만났겠다, 장을 보러 간다.


지트로 올라가는 길 바라본 므와삭 시내. 야경이 한층 더 아름답다.

Ancien carmel de moissac 의 회랑. 이 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계획을 짜고 있는데..


6시쯤 장을 다 보고 숙소로 돌아온다. 식사는 7시. 식사를 기다리며 맥주를 한 캔 따 마신다. 맥주를 홀짝이며 지트의 작은 회랑에서 계획을 짠다. 하루 30~40km는 걸어야겠는데... 하며 심란해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 알코홀릭. 생각보다 빠르지 않네. 


쟝이다. 

숨이 멎을 것 같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어?! 얼굴이 굉장히 이상한 표정일 것 같아 얼굴을 가린다. 쟝이 꼭 끌어안는다. 땀냄새가 나지만 좋다. 뒤따라 들어온 티보 키트리도 내게 인사한다. 너 여기 묵고 있었구나! 세상 반갑게 인사하고 비즈 한다. 쟝이 자기 샤워하고 날아오겠다고 꼼짝 말고 기다리란다. 쟝이 씻는 동안 티보 키트리가 자기들이 쟝 만나서 질질 끌고 왔다며 웃는다. 쟝이 샤워를 마치고 돌아와 묻는다. 너 저녁은 어떻게 하니? 내가 저녁을 여기서 먹기로 했었는데 취소하겠다 하니 그러지 말란다. 저녁 먹고 있어. 내가 문자 남길게. 

저녁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독일에서 왔다는, 오늘 므와삭이 길의 첫 시작인 벨리나. 벨기에에서 온, 요정같이 말하는 프랑스와즈와 잭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한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며 양해를 구한 뒤 먼저 나왔다. 길을 시작한 뒤 한 번도 뛴 적이 없는데, 내리막길을 내달려 성당 앞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나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가 울랄라 하고 놀란다. 

므와삭 수도원 정문 앞, 쟝이 피자 가게의 테라스에 앉아 있다. 내가 여기까지 어쩌다 왔는지 물어본다. 어제 쟝은 로제르트에 묵었었고 그곳에서 티보와 키트리를 다시 만났단다. 오늘 므와삭까지 올 생각은 없었는데 중간에 머무르려던 마을의 지트들이 다 문을 닫았더란다. 그래서 이왕 걷기 시작한 것 므와삭까지 많이 걸었단다. 티보 키트리는 항상 텐트를 치고 자고, 쟝도 웬만하면 해먹에서 잔다. 므와삭 안에 가려고 했던 다른 지트들이 다 닫거나 텐트를 ok 해 주지 않았다고. 찾다 찾다 므와삭 안에서 세 번째로 찾아온 곳이 내가 있던 지트란다. 쟝은 잠깐 다른 한국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나였단다. 쟝은 내가 한참은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믿을 수 없어, 너무 신기해. 나도 너무 신기해.

티보랑 키트리는 한 잔 하러 갔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했단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 또 맥주를 한 잔 한다. 쟝이 주섬주섬 노트와 펜을 꺼낸다. 전에 내가 쟝에게 르퓌의 성모 드로잉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자기를 그려달란다. 거절할 수가 없다. 조심스레 그려 쟝에게 내민다. 쟝이 뛸 듯이 기뻐한다. 부끄럽지만 기분이 좋다.

몽큌에서도 그렇고, 내가 방금 마신 맥주도 그렇고 쟝이 먼저 지불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쟝에게 빚이 조금 있었다. 쟝이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그만큼의 돈을 쟝의 노트 사이에 끼웠다. 그걸 또 언제 봤는지 쟝이 얼른 도로 꺼내 내게 돌려준다. 내가 너에게 진 빚이라 하니 이걸 받는 게 더 마음이 무겁단다. 
그러더니 쟝이 이야기한다. 네가 너무 자주 술을 마셔서 안타깝다.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마시는 술은 좋은 술이지만, 슬프거나 우울해서 마시는 술은 안 돼. 꼭 기억해. 왠지 혼나는 기분이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지트는 언덕 위에 있다. 지트로 돌아가는 언덕길, 므와삭 시내를 돌아보니 마을 불빛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조금 슬픈 쟝의 눈빛. 내 목에 얼굴을 파묻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참 동안 어깨를 맞대고 온기를 나눈다. 


쟝, 티보와 키트리는 지트 뒷마당 정원에 해먹과 텐트를 쳤단다. 구경해 보고 싶어서 쟝에게 요청하니, 흔쾌히 데리고 간다. 아까 내 빨래에서 너무 콤콤한 냄새가 나서 세탁기 겸 건조기를 돌렸는데, 그 김에 쟝 것도 함께 돌렸더랬다. 정원 가는 길에 내 빨래들을 확인하려고 보니 그것들이 없어져있다. 조금 당황했지만 알고 보니 다른 직원분들이 안쪽으로 치워두신 것이었다. 밤이슬이라도 맞을까 배려해주신 모양이었다. 뒷마당 정원에 올라 쟝의 해먹을 구경하고 있으니 텐트 안에서 티보와 키트리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 쏘아-. 잘 자! 그래 너희도!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온다.

내일은 또 짧지 않은 길을 걸을 것이다. 쟝과의 시간은 내일이 마지막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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