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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14. 2018

하루만

18. 당신과 걷는 길 - 우리의 답은 우리 안에 있어

9월 25일 월 - 26일 화

GR65 Lascabanes - Montcuq 9,2 km



아침에 눈을 떠 보니 기분이 싸 하다. 창문 밖을 보니 꽤 굵은 비가 내리고 있다. 바깥 정원 해먹에서 잤을 쟝이 떠오른다. 맙소사. 창문으로 달려가 보니 해먹이 없다. 다행인 건가

0층 식당으로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는데 샤워를 마치고 나온 쟝이 식당으로 온다. 쟝이 바깥 정원에서 잔 걸 아는 다른 순례자들이 한마음으로 걱정해준다. 너 괜찮니? 쟝이 나쁘지 않은 아침이었어 하고 씩 웃는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을까, 굵은 빗방울이 자신을 깨워서 얼른 가방과 해먹을 싸 들고 지트 안으로 피신해서 샤워를 했단다. 가방도 가방이거니와, 몇몇 옷가지 빼고는 홀딱 젖었다. 꼴이 말이 아니다.

나는 짐을 일찌감치 싸고 쟝을 기다린다. 쟝은 옷을 좀 더 정리하고 가겠다며, 젖은 옷들을 다시 빨아 스포츠 타월에 둘둘 말아 온다. 젖은 것들과 젖지 않은 것들을 비닐로 잘 분류한다. 이 와중 다른 순례자들이 먼저 출발한다. 어떤 순례자는 짐을 부치는 트랜스포트 서비스를 하고 싶은데 프랑스어가 불가능해 쟝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사람 좋은 쟝은 또 도와주고 와서 자기 짐 정리를 마저 계속한다. 창밖에 다른 지트에서 묵었던 사람들이 길을 잘 못 들자 쟝이 또 창을 열고 외친다. 그쪽 길 아니라 이쪽이에요! 이 사람... 정말 어마어마하다.

몽큌으로 가던 길 들른 작은 성소


함께 천천히 출발한다. 쟝의 상태를 계속 살핀다. 어제 절뚝이던 건 오늘 정말 심해졌다. 한 시간도 채 걷지 못했는데. 안 되겠다 싶다. 비도 가늘어지고 구름만 끼었겠다, 잠깐 쉬자고 제안한다. 억지로 양말을 벗겨 보니 내가 조치해준 물집들 바로 옆에 더 큰 것들이 있다. 이 사람의 발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길래 이리도 물집이 크게 잡히는가... 새 물집과 예전 물집의 자리들을 합하면 내 손바닥만 하다. 이 발을 하고 걷겠다고 한 게 참 신기하다. 내가 한 시간만 더 걸으면 나올 몽큌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치료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한다. 쟝은 내 목표치가 평균 25~30km인 것도 알고, 내가 엄마를 스페인 레온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의 발이 아닌데? 고집스러운 내 얼굴에 쟝이 두 손을 든다.

비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쟝이 저 앞에 먼저 걸어가고 있다. 더 멀리 앞에는 프랑스 동부에서 왔다는 두 젊은이. 처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계속 쟝의 발에 신경을 써서였을까, 평소 내가 길을 찾고 쟝은 노래 부르는(?) 역할을 했는데 내가 길을 잃어버렸다. 당황스럽다. 다행히도 마을이 나와서 마을 사이로 걷다가 한 아주머니께 길을 묻는다. 아주머니의 요크셔가 신나게 우릴 향해 짖는다. 아주머니는 우리 말고도 어떤 순례자 두 명이 또 길을 잃어버려서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갔단다. 국도를 따라가는 길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mairie에 GR 마크를 제대로 하게끔 항의해야겠단다.

몽큌으로 향하던 길

길이 아주 질퍽질퍽한 진흙길이었다.


몽큌은 Montcuq 이런 스펠링을 갖고 있는데, 읽을 때 몽퀴 이렇게 읽힌다. 이건 내 엉덩이라는 mon cul 발음과 같다. 프랑스인들은 마을 이름을 볼 때마다 내 엉덩이래! 하고 엄청 웃었다. 쟝도 마찬가지. 몽큌에 도착할 때 사진을 엄청 찍어대며 웃는다. 동네 사람들은 일부러 몽큌크 하고 q 발음을 더 강조해서 하곤 한다는데, 그래도 재밌는 건 재밌는 거지.

몽큌으로 들어간다


몽큌에 도착하니 한국인 부부와 다른 순례자 부부를 만난다. 쟝의 상태를 말하니 모두 걱정해주신다. 나는 쟝을 꼭 쉬게 만들 거예요라고 한다. 쟝과 나는 묵을 곳을 딱히 생각하지 않고 몽큌에 도착한 터였다. 몽큌 근처 괜찮은 지트들은 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탓에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이 마을 외곽의 싸구려 호텔을 알려준다. 미암 미암 도도에도 나와 있길래 그러면 퀄리티는 어느 정도 보장되지 않을까? 하고 그곳으로 향한다. 기대는 조금 무너졌다. 바와 호텔을 겸하고 있던 그곳은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골 여관이다.

오랜만에 문명의 이기를 맛보기로 한다. 쟝과 나는 갖고 있던 모든 옷들을 가지고 무인 코인 빨래방을 찾아간다. 빨래 꾸러미를 끌어안고 세상에서 제일 느릿한 걸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빨래방을 향해 간다. 동전을 넣고, 빨래를 한다. 둘 다 르퓌 이후로 처음 손빨래가 아닌 세탁기와 건조기로 빨래를 한다. 감격을 맛본다.

숙소 바로 앞에 벨기에 프렌치프라이 가게가 하나 있어 식사를 한다. 쟝의 외가는 벨기에란다.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쟝이 엄청 기뻐한다. 이 레스토랑의 사장님과 사모님이 자신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살던 벨기에 작은 시골마을에서 온 분들이란다.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사장님은 산더미 같은 감자튀김을 우리에게 준다. 그 사장님과 사모님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테이블에 앉는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그분들은 담배를 말며 대화를 나눈다. 쟝은 외조부모님들이 돌아가신 뒤 벨기에에 가지 않았단다. 그 후 외가 친척들과 사촌들의 안부가 궁금했는데, 그 사장님 내외분들은 그들의 안부를 알고 있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신기했다는 사장님 내외에게 한참 동안 우리나라를 설명해준다. 식사를 하는 와중 엄청난 소나기가 내리다 갑자기 해가 반짝 뜬다.

쟝의 무릎과 물집을 위해 마을 약국을 방문한다. 약사와 긴 면담 뒤 산더미 같은 약을 또 사 온다. 우리 커피 한 잔 하자. 쟝이 비장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당장 오늘에만 집중했지 내일은 걱정하지 않았는데, 이번만큼은 내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어. 나는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는 발이 너무 아파서 조금 쉬어야만 할 것 같아. 하지만 너는 예정된 약속이 있으니 길을 꾸준히 걸어야 해. 심지어 너는 아무 데도 아프지 않지. 나는 걸음도 느리고 아파서 널 느리게 만들 것 같아. 그래서 하루만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 뒤 먼저 너의 흐름대로 길을 이어가면 좋을 것 같아.


동의한다. 나도 당장은 쟝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와의 순례길 일정을 맞추려면 장과 보폭을 계속 맞출 수는 없었다. 그래, 내일까지 만이야.

숙소로 돌아온다. 아까 먹은 점심 겸 저녁인 프렌치프라이와 버거 덕에 아직도 배가 부르다. 쟝의 발 물집을 한참 동안 치료한다. 잘라내야 할 껍데기는 잘라내고, 새로 소독한 뒤 거즈로 마무리한다. 마음이 쓰리다.
걸음은 짧았지만 마음이 시끄러웠던 하루가 끝난다.









우리가 약속한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 하루만은 순례자가 아니니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자고 했는데 아침 여섯 시부터 눈이 떠진다. 그 며칠 사이 순례자의 시간에 몸이 맞추어진 모양이다. 왠지 이 숙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어제 빨래를 하러 다녀오는 길에 보았던 캠핑장에서 묵을 수 있는지 확인하러 가기로 한다. 그곳에 가니 그곳에 카오르에서 만났던 30kg 순례자가 묵고 있었다. 반가워서 인사를 나누고 이곳은 어떤지 물었다. 순례자들은 특별히 저렴한 가격에 텐트와 이불, 매트리스를 대여할 수 있고 따뜻한 샤워 물도 잘 나온단다. 빨래도 할 수 있긴 한데 코인 빨래방도 가까우니 나쁘지 않다고. 내가 살면서 캠핑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하니 이 30kg 순례자와 쟝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래 오늘은 우리 여기서 묵자!

그곳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30kg 순례자 아저씨가 기다리란다. 나와 쟝이 궁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아저씨가 두 손을 소중히 모아서 내 손 위에 작은 걸 둔다.


붉은 꽃이다.


내가 우와? 이거 뭐예요 아저씨? 하고 질문하니 아저씨가 답한다. 내가 알아듣지 못해 쟝에게 물으니 쟝이 웃으며 답한다. 당신이자 당신의 삶이란다. 뭐야 왜 이렇게 낭만적이야?하고 웃으니 쟝도 덩달아 웃는다. 많은 프랑스인들은 낭만적이지. 아저씨는 계속 길을 이어 가신 단다. 비즈를 하고 헤어진다.


캠핑장에는 캠핑장 관리자 겸 햄버거 요리사 아저씨, 그리고 우리를 환영하는 캠핑장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이지-란다. 이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공을 던져줘! 내가 주워올게! 하는 생각밖에 없는 모양이다. 나에게 공을 계속 물어와서 던져달라고 재촉한다. 스무 번쯤 넘어가니 좀 힘들다. 캠핑장 관리자와 쟝이 이지를 무시해도 좋아 라고 웃는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 짐 싸서 캠핑장으로 이동한다. 쟝은 카오르에서 새 등산화를 샀기 때문에 그전에 신었던 러닝화는 우편으로 부친다. 아무래도 르퓌 길은 등산화가 더 적합하니까. 쟝이 신발을 부치는 와중 다른 아주머니가 엄청나게 큰 소포 상자 안에 먹거리를 잔뜩 포장하는 것을 본다. 왠지 손이 모자란 것 같아 도와드린다. 주소와 받는 이를 보아하니 외국에 있는 딸에게 보내는 소포인 모양이다. 고맙다고 웃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참 따뜻하다.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스포츠 신문을 사러 나온 티보와 키트리를 만난다. 로카마두르에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너무 반가워서 한참 인사를 나눈다. 티보와 키트리는 근처에 친구가 살아서 그 친구가 재워준단다. 그러더니 너희 같이 걷고 있었냐며 왠지 기뻐한다. 쟝 발과 무릎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태라 오늘 하루 쉬고 있어, 하고 내가 말하니 키트리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남자들이란. 티보도 자기 괜찮다고 무리하다가 결국 로카마두르에서 하루 더 머물렀잖아. 아직도 티보 발에 큰 물집이 있다니까. 티보랑 쟝을 보니 각자 발의 큰 물집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다. 바보들 하고 키트리와 웃는다.

티보 키트리와 인사를 한 뒤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나는 오늘의 요리, 쟝은 자신을 위해 고기를 다 뺀 오믈렛. 식사를 하다 쟝이 프랑스를 여행하며 불편한 것이 없었는지 묻는다. 내가 로카마두르의 개저씨 이야기를 하니(쟝에게는 개저씨라고 하진 않고 이상한 분이라고 했다) 쟝이 엄청 고개를 끄덕인다. 실은 내가 저녁식사 마치고 나간 뒤에도 소요가 있었는데, 내가 전기포트를 써서 전기포트가 망가졌다고 그 아저씨가 무식한 아시안이라고 한참 욕했었단다. 쟝이 보아하니 아저씨가 물 끓이는 버튼을 어떻게 누르는지 몰라서 내가 망가뜨렸다고 우기는 모양이었단다. 쟝이 버튼을 눌러주니 그제야 조용해졌다고.

그런 류의 사람들은 오히려 잘 알지 못하고 무지해서 그래. 무지한 만큼 새로운 사람들이 두려운 거지. 세상을 좁게 보는 사람들이야. 앞으로 또 그런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너무 마음 쓰지 말고, 너무 무례하게 굴면 싸워! 네 언어로 막 뭐라고 해 버려! 왠지 웃음이 터진다.

쟝은 이 길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고민이라 한다. 나도 고민이다. 그러더니 쟝이 재밌는 걸 제안하겠단다. 무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수업할 때 하는 걸 나에게 해 주겠단다. 그러더니 부스럭거리며 종이와 펜을 꺼낸다.


종이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10가지 하고 싶은 정도에 관계없이 쓴다. 하고 싶은 것들을 그냥 쓰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쟝의 후식이었던 커피가 다 식어서야 완성했다. 그것을 돈이 무한대로 있을 때, 그리고 돈이 없을 때 이렇게 각각 실현 가능한 순서 BEST 5로 매겨 본다.


다 하고 나니 돈이 많이 있든 없든 순서는 내가 매긴 순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의 답은 의외로 우리 안에 있어. 하지만 직면하기 어려울 뿐이지. 이 종이에 네가 고민해 적은 것들을 기억해.


그 종이를 사진을 찍는다. 쟝은 그 종이를 매일 들고 다니며, 기도 할 때 이 바람들을 함께 바치겠다 한다.

식사를 마치고 몽큌을 한 바퀴 돈다. 귀여운 세라믹 작가와 아티스트들의 상점을 본다. 성당에 들러 기도도 드린다. 쟝의 오르간 연주를 듣는다.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사이 해가 저문다. 쟝에게 내일 묵을 곳의 숙소 예약을 부탁한다. 쟝이 쓴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걸어 준다. 이제는 조금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쟝의 전화를 들으며 왠지 속이 상한다. 제 친구는 한국에서 왔고, 영어를 하지만 프랑스어는 못 해요. 친절하게 해 주세요. 먹을 것은 여기 캬르푸에서 함께 장을 볼게요. 부탁해요.

내일 슈퍼마켓이 다 닫는다 하여 쟝과 함께 캬르푸로 장 보러 간다. 저녁 아침 점심거리를 잔뜩 산다. 생콤돌트에서 숟가락을 잃어버린 뒤로 난 그냥 어떻게든 먹고 있었는데, 오늘은 숟가락이 필요할 것 같다. 쟝이 꺄르푸 직원에게 숟가락을 얻어 준다. 고마워. 텐트 자리를 깔고 샤워한 뒤 빨래를 하고 캠핑장 관리자와 그 여자 친구와 수다를 떤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캠핑장 관리자의 마지막 근무일이란다. 한참 대화를 나누다 헤어지고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 먹고 맥주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 길을 걷게 된 이야기, 깊은 속내를 나누던 시간. 서로의 몰랐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 시간 동안 바뀌는 하늘의 빛깔은 참으로 찬란하다. 푸르다가 붉다가 보랏빛이었다가 깊은 바다색으로 물드는 밤하늘. 소리 없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한 별들도 어느새 그 위를 촘촘히 수놓는다.

충만한 행복감에 젖은 상태로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모든 게 좋을 수는 없지. 해가 지니 너무 추워서 옷 두 겹에 경량 패딩에다 점퍼에다 입을 수 있는 건 다 껴입고 침낭 안에서 들어가 이불까지 그 위에 더 덮고 잔다. 우리 지금 너무 웃기다 그치? 잊을 수 없는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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