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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20. 2018

Condom 꽁동 혹은 콩동

23. 당신들과 걷는 길 - 빗길을 헤매며 꽁동 혹은 콩동으로

10월 1일 일요일

GR65 Lectoure - Condom 33,4 km  지름길로 가서 약 26km


오늘은 Condom, 그러니까 꽁동으로 향하는 날. 콩동 혹은 꽁동이다. 콘돔이 아니다.

안 그래도 이 도시 이름 때문에 꽤나 배꼽 빠지게 웃었던 적이 있어 약간 기대하던 날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아래층 쓰시는 분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내려와 식사를 마친다. 한국인 부부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출발하신다고. 나는 콩동으로 바로 향한다고 하니, 당신들은 천천히 다 들러서 가려고 하신단다. 행복하게 걸으라고 인사해주신다.
원래 GR 길은 La Romieu를 거쳐 가게끔 되어있는데, 나는 콩동으로 바로 직진하기로 결정했다. 길을 걷다 보면 라 호미유쪽으로 가리키는 길과 콩동쪽으로 바로 향하는 길 이렇게 갈래가 나뉘는데, 나는 중간에 길을 잃어서 구글맵에 의존하여 걸었다. 

렉투흐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곽.

렉투흐는 평지에서 쑥 올라와 있는 도시. 내려가려고 보니 저렇게 자욱한 안개가 바다처럼 끼어있다.

내리막을 걸으며 한참 안개의 파도를 보았다.



콩동을 빠져나와 한동안 국도변을 걷다가 숲길로 빠진다. 숲길에서 라호미유로 갈 건지 콩동으로 바로 갈 건지 결정해야 하는 갈래가 나와서 나는 콩동으로 향하는 쪽으로 향했다. 이 길은 국도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밭 사잇길로 이어진다. 

한동안 수확이 끝난 밭 사잇길을 걷는다. 이제 아무런 생각이 없이 계속 길을 걷는다. 원래는 생각을 하려고 길을 걸었는데, 생각은 오히려 없어지고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시간이 길어진다. 걷기만 스무날이 넘어가니 이제 발과 스틱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분이 든다.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내 안의 번뇌 비슷한 것들이 안개처럼 흐려져 형태가 없어진다. 

길을 걷고 있는데 므와삭에서 생트앙떵 향하던 날 도로변을 지나 포도밭 주변을 걸을 때 만나고, 또 생트앙떵에서 렉투르 향하던 날 아침 포도농장 근처를 지날 때 만났던, 개를 데리고 길을 걷는 여성분을 여기서 또 만났다. 이 분은 항상 내가 걷는 방향의 역방향으로 걷고 계셨다는 것. 첫 번째 만날 땐 그냥 인사했지만 두 번째는 좀 더 반갑게, 세 번째는 좀 더 호들갑을 떨며 인사했다. 어째서 역방향으로 걷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매일 일정 구간을 개와 함께 역방향으로 걷고 있는 건 확실했다. 재밌는 분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밭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한참 동안 걷는다. 다들 이 루트로는 오지 않는지 몹시도 조용하고 한적했다.


길을 걷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걷다 보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던 GR 마크도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생각을 비우고 싶었는데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바보 같으니! 구글맵을 확인해보니 다행히 렉투르에서 콩동 가는 국도변이긴 하다. 길을 더 이상 잃어버리기 싫어 국도 쪽으로 나가 국도를 따라 걷는다. 

오늘 일요일이라 드라이브 나온 차들이 은근 많다. 차들이 너무 쌩쌩 달려서 겁을 먹는다. 여기서 뺑소니라도 당했다간 나는 소리 소문 없이 프랑스 시골에서 차게 식어갈 수도 있겠어하고 불안해한다. 엄청난 속도로 걸어 다시 밭 사이로 난 길을 찾아낸다. 순례자의 친구 구글맵은 밭과 포도농장 사이로 향하는, 결국은 콩동의 내가 예약한 Ancien carmel de Condom로 이어지는 길로 나를 안내한다. 정신 차리고 구글맵을 따라간다. PR 길을 따라가다 결국은 동네 시골길을 안내하는 구글맵의 가이드로 걸음을 계속한다.

구글맵을 따라 걷다가 어느 포도농장 건물 앞 나무 밑에서 식사를 한다. 비가 후둑후둑 내리다 그쳤다 한다. 식사는 여느 때와 같이 버터 바른 빵과 사과 하나.


길을 계속 걷다 보니 마을이 나온다. 구글맵 상으로도 눈에 띄는 큰 길만 직진해서 따라가면 콩동이 나온다. 렉투르에서 콩동 가는 길이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었지 정말 먼 길이었다면 걸으면서 불안해했을게다. 마을에 아무도 없나 했더니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서 나름의 주말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심코 들여다본 집에서 작은 두 꼬마 아가씨가 소꿉놀이 비슷한 걸 하고 있다가 나를 흘끔 본다.

그렇게 계속 걷고 있는데 비바람이 또 몰아친다. 며칠 동안 날씨가 너무 좋아 잊고 있었다. 이 찬 비바람의 감촉.

비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사람 소리가 너무 그리워 팟캐스트 다운로드한 걸 들으며 낄낄대며 걷는다. 그때 저 멀리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오늘은 차들만 내 옆을 씽씽 잔뜩 지나갔지 이렇게 사람을 마주치는 건 아까 개를 데리고 걷던 분 이후로는 처음이다.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한다. 그분도 끼고 있던 이어폰을 벗고 인사를 한다. 프랑스 남부에서 왔다는 이 순례자는 GR65를 다 걷고 다시 걸어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란다. 그래서 콩동에서 다른 길을 타고 집 방향으로 가는 중인데, 너는 어쩌다 이쪽으로 걷고 있냐고 물었다. 멋쩍게 웃으며 길을 잃었다 했다. 도움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다행히 나에겐 구글맵이 있다고 말한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길, 무사히 콩동에 도착하길 하고 서로 인사한다.

그렇게 국도변을 따라 걷다가 콩동 마을 어귀의 Ancien carmel de Condom을 찾아냈다.


집들이 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하고, 콩동 표지판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내가 예약한 지트, Ancien carmel de Condom가 보였다. 나는 아예 처음부터 구글맵을 이용해 Ancien carmel de Condom을 향해 가서 지트 찾는데 그렇게 곤란을 겪지 않았는데, 나와 거의 동시에 이 지트에 도착한 캐나다 할머니 두 분은 한참 동안 길을 헤매셨단다. 오늘 라 호미유에서 길을 시작하셨다는 두 분은 분명히 짧은 길이라 콩동 안에만 도착하면 이 지트는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이 지트가 생각보다 마을 외곽에 있었다고.

지트로 들어가는 길. 생각보다 넓은 정원.

입구

안쪽 정원

오늘은 일요일이라 식당도 하지 않고, 날씨 탓인지 몰라도 한적하다. 친절한 봉사자분이 반겨주신다. 내 기억으로는 도미토리의 침대 하나를 예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도착해보니 2인실을 혼자 사용하는 것으로 예약이 되어있다. 이곳은 내가 어제 말도 안 되는 프랑스어로 예약을 했는데, 아무래도 내 의사소통 능력을 탓해야 할 것 같다. 금액을 지불하고 도장을 받은 뒤 지트로 들어간다. 기운 없어 보이는 레트리버 한 마리와 약간 불편해 보이는 분이 나를 열심히 보신다.

그래도 오늘 방을 혼자 쓰기를 참 잘했다. 어제 같은 방을 쓴 스페인 아저씨가 너무 코를 골아서 잠을 잘 못 잔 데다 어제 지트에서 돈벌레 및 개미들을 본 터라 예민해져서 피곤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오늘 비도 오고 길도 헤매서 피로가 많이 누적된 상태였다. 깨끗한 방에서 혼자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만족스럽다.

샤워도 하고 손빨래도 마친 뒤 빨래를 널기 위해 0층에 위치했던 살롱 비슷한 공간에 간다. 그곳에 봉사자분이 따뜻하게 난로에 장작을 지펴 두셨다. 이곳에다 빨래와 우비, 그리고 축축하게 젖은 신발을 말린다. 신발 안에 신문지도 구겨 넣는다. 만족스럽다.

순례자의 필수 일과인 샤워, 빨래, 건조작업을 마치고 콩동 마을 구경을 한다. 이곳은 우리네 사극 촬영지처럼 무슨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였던 모양이다. 관련 포스터 같은 것이 관광안내소나 기념품 샵 곳곳에 눈에 띈다. 성당에 가 보니 저 사총사 입상이 꽤나 눈길을 끈다. 나도 저기서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비가 꽤 많이 와서 그런지 그나마 적게라도 있던 관광객들도 다 어딘가로 들어가 버린 모양이다. 사진을 부탁할 사람들이 눈에 띄질 않는다. 아쉬운 대로 사진을 찍고 마을을 구경한다.

나도 이 아저씨들이랑 사진 찍고 싶었어.

성당 뒤쪽

광장 비슷한 곳이었는데, 아이들이 비를 피해 이곳에서 놀고 있었다.


마을을 한참 둘러보고 먹을 걸 살 마트가 혹시라도 있을까 하고 보았는데 역시나 없었다. 비가 점점 굵어져서 지트로 얼른 돌아온다. 지트로 돌아오는 길이 생각보다 길다. 빨래를 말리던 살롱에 전기 티팟이랑 깨끗하지 않은 찻잔이나 그릇 같은 게 있는데 사용 가능한 모양이었다. 아까 만난 캐나다 할머니 두 분이 그곳에서 저녁을 드실 모양이었다. 나도 내 산더미 같은 음식 보따리를 가져온다.

음식 보따리를 가져오니 일전에 므와삭을 떠나던 날 운하 길가에서 만났던 캐나다, 미국 2인방을 만난다. 어느새 스위스 아주머니 한 분을 더해 3인방이 되었다. 이 시끌시끌한 세 명은 마치 매일 만나는 옆집 아주머니처럼 내 안부를 묻고, 자기들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연예인을 닮은 아저씨는 서울이 꽤나 좋았는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단다. 로컬들이 놀러 가는 장소를 물으시길래 이곳저곳 말씀드린다. 이분들은 콩동에 나름 구글 평점이 좋은 햄버거 가게에 저녁을 먹으러 갈 거라며 함께 가지 않겠냐 제안하신다. 왠지 모르게 이분들 대화가 너무 빠르고 목소리들이 하나같이 너무 크고 높아서 피곤해진다. 감사하지만 저는 여기서 먹겠다며 인사를 한다. 

캐나다 할머니 두 분과 하는 평화로운 식사시간. 내가 갖고 있던 야채 스프가루를 드리니 정말 좋아하신다. 가게들이 하나같이 열지 않은 데다 시내까지 나갈 에너지가 없어서 그냥 티로 때우려고 했는데 고맙다신다. 나야말로 감사하게도 그분들의 다양한 치즈와 버터, 그리고 햄을 얻은 덕택에 풍요로운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다. 

두 할머니 중 이름이 기억나는 분은 엘리자베스 할머니. 캐나다에 영어를 공부하러 온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계신단다. 나이가 일흔이 넘으셨는데도 아직도 일을 하신다고. 놀라웠다. 자신이 운영하고 있어서 맘대로 휴가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좋으시단다. 그 덕분인지 정말 정확한 발음과 아주 알맞은 속도로 말씀해주셔서 길 걸으면서 제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단점은 가끔 자신의 발음을 따라 하게끔 하셔서 저녁식사인지 학원 수업인지 모르는 기분.

이 두 분은 왜 내가 혼자 걷는지 너무 궁금해하셨다. 젊은이라면 모름지기 새로운 도전과 만남(?)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며. 웃음이 터졌다. 내가 막 웃으니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길에서 탄생한 독일&영국 커플 이야기를 해 주신다. 나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만남은 잘 모르겠고, 일단 전 레온에 가서 엄마를 만나 함께 걸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엘리자베스 할머니 말고 다른 분이 5년 전에 딸과 함께 프랑스 길을 걸으셨단다. 대판 싸우길 여러 번이었다고. 하지만 좋았다고 하신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6시 바로 전에 도미토리를 예약한 순례자들이 지트로 들어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던 봉사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한참 헤매다 어디선가 부랴부랴 온 봉사자의 도움으로 도미토리에 들어간다. 그 뒤 살롱에 아주 조용한 순례자 한 분이 들어오신다. 이 분은 카오르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만나는 분이었는데 인사만 나누고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어보니 은퇴한 학교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선생님이라는 말에 반가워한다. 한동안 학생들이 얼마나 귀엽고 말을 안 들어먹는지 이야기한다.



빗길에 한참 헤매느라 피곤했다는 캐나다 할머니 두 분이 주무시러 올라가시고, 선생님 순례자와 나는 현재 지트에서 가장 따뜻한 벽난로가 피워진 살롱에서 책을 읽는다. 


그때 와글와글 미국 캐나다 스위스 3인방이 돌아온다. 육즙이 살아있는, 정말 괜찮은 햄버거였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먹고 오라고 난리다. 그들의 빨래가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들도 돌아간다. 어느새 아홉 시가 다 되어 간다. 나와 선생님 순례자도 각자 묵고 있는 방으로 올라간다. 

높은 천장의 방에서 잠을 청한다. 어떻게 잠드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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