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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19. 2018

왠지 다시 만날 것 같았어

22. 당신들과 걷는 길 - 그리웠던 이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9월 30일 토요일

GR65 Saint-Antoine - Lectoure 24,8 km


어제 달무리가 끼더니 비가 온다. 텐트에서 잤을 티보 키트리가 걱정된다. 어제 복도를 날아다니던 벌은 보이지 않는다. 아침식사를 재빨리 마친다. 식당으로 갔다가 묵고 있는 방으로 돌아오는데 비바람이 심상치 않다. 오늘 길은 고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바깥이 푸르다.


출발할 때 부터 껴 입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껴 입고 우비도 장착한다. 바람도 부는데 너무 추워서 덜덜 떨린다. 걱정이다. 텐트 근처를 지나가는데 사람 소리가 하나도 안난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티보..? 키트리...? 하고 불러봤는데 답이 없어서 여기 없나 하고 길을 나선다. 자박자박 지트를 뒤로 하고 빗길을 걸으니 뒤에서 어제 만난 밀레 가방 부부 프랑소와즈 쟝미셸이 따라온다.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텐트에서 막 잠이 깬, 웃통을 벗은 티보가 나와서 쏘아아아 하고 손을 저어 인사한다. 저 녀석은 안 춥나. 정말 신기하게도 이 나라 남자들은 아무리 추워도 웃통을 벗고 잔다. 곧 비바람에 괴로웠는지 으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털고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이따 봐-하고 외치니 이따 봐- 하고 텐트 안에서 이중창이 들린다. 귀여운 커플이다.


프랑소와즈와 쟝미셸과는 보폭과 속도가 비슷해서 한동안 같이 걷는다. 대신 이 두 분은 유적이 있으면 꼭 들러서 보고 오기 때문에 가끔 헤어지게 된다. 이 두 분은 재건하고 있는 성당 유적에 들러본다며 잠깐 빠지셨고, 나는 추운 나머지 사지가 떨려서 쉴 곳을 찾는다. 동네 공용공간으로 보이는 곳에 벤치가 보이길래 얼른 앉아 초콜릿을 먹는다. 몹시도 추워서인지 초콜릿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하게 얼어 있다. 으적으적 초콜릿을 씹는데 마실 나가려는 동네 아저씨가 인사를 한다. 편하게도 한국을 알고 계신다. 그렇게 먼 곳에서 어떻게 왔냐며 어쩌다 파리나 리옹같은 대도시가 아닌 프랑스 시골길을 걸을 마음을 먹었냐며 웃으신다. 이제 이런 질문은 자주 들어서 충분히 답변할 수 있지. 대도시가 지겨워 눈을 쉬러 왔어요- 하고.

오들오들 떨며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던 공간이다. 비가 엄청 내리고 있었는데 사진 찍을 땐 참 타이밍 좋게도 잦아들어 못찍었다.


공용공간에서 도저히 이 비바람을 뚫고 나가기가 무서워 오들오들 떨며 비가 가늘어지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므와삭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한 벨기에 프랑소와즈 내외가 비바람을 뚫고 내 옆으로 왔다. 둘 다 죽겠단다. 이 분들은 내가 묵은 지트의 호텔방에서 묵으셨던 지라 어떻게 주무셨는지 물으니 아주 좋으셨다고. 그러면서 네 친구들, 그 젊은 커플은 우리가 나올 때쯤 텐트 정리를 하고 있더라며 말해주신다. 나를 비롯한 할머니 할아버지 순례자들은 8시 무렵에 길을 시작했지만 티보 키트리 등 젊은 순례자들은 9~10시쯤 길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후에 스페인 내의 프랑스길을 걸으면서 나와 티보 키트리는 많은 순례자들이 새벽부터 걷는 걸 보고 엄청 놀라게 된다.


추워서 오들오들 떠는 와중에 해바라기밭이 쓸쓸해서 찍었다.


비가 너무 내려서 발만 보고 걸었다. 카메라를 꺼낼 용기도 나지 않을 만큼 빗방울이 손을 아프게 때린다. 방수 등산화라고 믿고 샀던 내 등산화는 드디어 걷기 스물두번째 날에 방수 기능을 포기하고 함수 기능을 추가했다. 빗물이 신발 안에 가득 차 망으로 된 천 부분으로 부글부글 거품이 되어 올라온다. 하염없이 뽀글거리는 발 끝만 바라보며 한참을 걸었다.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길을 걷다가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던 와중, 벨기에 프랑소와즈 내외가 나에게 말해준다.

소아, 렉투르야.



오늘 예약한 지트는 마을 중심쪽에 있어서 찾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들어가 보니 꽤나 푸근해 보이지만 시선은 불안해보이는 여성분이 환대해주신다. 나중에 들어서 알았지만 주인은 바캉스를 가는 바람에 잠시 도와주는 분이었다고. 신발인지 빗물주머니인지 모를 것을 벗고 웰컴드링크를 마시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일전에 라스카반에서 만났던 한국인 부부다. 반갑게 인사와 안부를 나눈다. 감사히도 하루 편안하게 보내라고 따숩게 인사 해 주신다. 카오르에서 헤어졌던,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퀘벡의 루시도 만나 비즈를 나눈다.

방으로 올라가보니 루시의 단짝 프랑신이 방 안에 앉아 있다. 내가 너무 기뻐하며 반가워하니, 프랑신이 말한다.
왠지 나는 너를 이렇게 다시 만날 것 같았어. 그나저나 너의 그 친구는 어디있니? 쟝의 이야기를 전하니 안타까워한다. 그 친구 참 재밌었는데 말야 하고.

지트 바로 근처에 코인빨래방이 있고, 그게 빨래 서비스보다 훨씬 싸길래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옷가지들을 전부 그러모아 빨래를 하러 간다.

그 뒤 관광안내소에 가서 내일 지트 예약을 부탁하려고 하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관광안내소가 5~6시쯤 닫으니 닫기 전에 한 번 더 오라고 무심한듯 친절한 직원이 말한다. 근처 신문가게에 가서 싼 신문을 잔뜩 산다. 신발에 넣을 요량이다. 그 후 대성당 구경을 하고싶었는데 성당에서 결혼식이 진행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단다. 나 이외의 여러 순례자들이 아쉬워한다.

다시 관광안내소에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쏘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니 순례 초반에 매일같이 마주치며 나에게 곤니치와 하면서 장난스레 인사하던 3인방 중 가장 에너지 넘치던, 쟝 이브이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니 너무 반갑다. 얼싸안고 비즈하고 난리가 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봐도 상관이 없다.
쟝 이브는 일정상 중간에 돌아가야 했어서, 자신의 차를 렉투르에 갖다놓는 서비스를 신청해두고 여기까지 걷고 돌아간다며 자신의 차를 보여주었다. 마침 지금 딱 돌아가려고 렉투르 성당 한번만 사진 찍어야지, 하는 참에 내가 보여서 몹시도 놀랐단다. 기쁘다. 메일주소를 교환한다. 쟝 이브가 카메라를 나에게 들이대어 사진을 많이 찍힌다.

후에 쟝 이브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나도 길을 마친 뒤에 내 길들에 대해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언젠가 프랑스로 다시 가게 된다면 피레네 지역에 만나러 갈 친구를 하나 만들었다.

쟝이브!

쟝이브가 보내준, 단체 순례자들의 모습. 저 분들과 같은 날에 시작했었다.

만나서 신났다

쟝이브가 찍어준 렉투르 성당 앞에서의 나


시끌벅적한 재회를 마치고 마트에 들러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냉동피자와 닭고기를 사 와 저녁을 먹는다.
쟝과 헤어지고 나니 궁금하고 그리웠던 이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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