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아 Feb 21. 2018

어쩜 이렇게도 예쁘게

24. 당신들과 걷는 길 - 사랑스러운 가족의 기부제 지트, 에오즈

10월 2일 월요일

GR65 Condom - Éauze  34,3 km (30km 정도)

오늘은 콩동을 떠나 에오즈로 가는 날이다. 짧지 않은 거리이니 아침 일찍부터 준비한다. 살롱에 내려와 보니 신발도 옷가지들도 전부 바싹 말라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10월이라니.

대충 식사를 마치고 출발한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GR 하양 빨강 마크가 보이지 않아서 성당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웬만한 순례길들은 반드시 성당 근처를 지나가니까. 나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왔다는 어느 부부도 헤매고 있었다. 그때 개 산책시키려고 나온 아주머니가 계시길래 얼른 잡고 물어본다. 비가 오는데도 개를 산책시키는 이 분에 조금 놀라면서.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바닥의 금속 마크를 알려준다. 유네스코 로고가 새겨진 금속붙이가 바닥에 줄지어있다. 돌이켜보니 생콤돌트도 그렇고 이곳 콩동도 그렇고 마을에 GR 마크 대신 유네스코 로고가 새겨진 동그란 금속 붙이가 있는 곳이 종종 있었다. 특히 예쁜 마을이라고 하는 곳일수록 더더욱. 예쁜 마을의 풍경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무사히 도움을 받아 길을 잘 찾아 걷기 시작한다. 마을 나오는 길목에 있는 성당에서 잠시 기도를 드리겠다며 미국인 부부가 인사한다.
비가 내리는 날은 발만 보며 걷게 된다. 오늘 34km라 조금 먼데 걱정이 된다. 벌써 여행의 3분의 1이 지나갔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돌이켜보면 두 달이나 남은 행복한 시점이었는데 왜 그리 우울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아침부터 시작된 우울감은 몸살이 올 징조였던 것 같다.


발 끝만 보며 한참을 걷고 있는데 길가에 있던 예쁜 집에서 나온 작은 차 하나가 내 앞에 선다. 창문이 내려지고 한 아주머니가 인사한다. 자신은 4km 정도 떨어진 마을에 장 보러 가는데 원한다면 데려다줄 수 있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 4km는 내게 10분 정도지만 너에게는 한 시간이잖니, 내가 너의 한 시간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와.. 너무 따뜻하다. 그 마을은 마침 내가 한 시간 뒤에 도착을 목표로 하는 마을. 몸도 좋지 않은데 잘 되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얼른 탄다.

영어를 굉장히 잘 하던 아주머니는 원래 영어 강사였다고 한다. 대도시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피로를 느끼고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내려와 영어도 가르치고 여유로운 시골 생활도 즐기고 있다고. 남편이 여행 관련 일을 하고 있어서 여행자들만 보면 왠지 눈길이 간다고 했다.

잠깐 동안 내 길 이야기를 하는데 금방 마을에 도착한다. 아주머니는 이 곳에서 점심을 먹는 게 좋을 거라며 한 슈퍼 앞에 내려주신다. 아주머니도 그 슈퍼에서 장을 보실 모양이었다. 너무 감사하다. 메흐시 보쿠! 이름이 궁금하여 여쭈니 베로니크라신다. 붉은 머리의 베로니크 아주머니,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먹을 곳을 찾는데 마땅치가 않다. 바로 옆 카페에서 차 한잔 시키고 내 음식을 먹자니 예의가 아니어서 민망하기도 하고. 그때 어제 같은 지트에서 묵었던 선생님 순례자가 다가온다. 이제 조금 친해졌는지 스스럼없이 비즈를 해 주신다. 그러면서 너 점심 먹을 거면 여기 계속 비 오는데 이 카페에서 차 한잔 시키고 같이 먹자 신다. 선생님 순례자는 카페로 들어가 주인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오케이! 라시며 당신 음식을 꺼내신다. 나도 가서 쇼콜라쇼를 주문하고 선생님 옆으로 가서 내 음식 보따리를 꺼낸다. 바 주인은 쇼콜라쇼와 선생님의 카페오레를 가져오시며, 맛있게 먹으라고 인사해주신다.

식사 겸 티타임을 하는 시간. 이 카페는 온 동네 사람들 수다 떠는 장소인 모양이다. 다들 한 번씩 들러 커피 한잔하고 떠들고 간다. 신기한 게 춥고 바람도 불고 비도 오락가락하는데 다들 안에 들어가질 않고 테라스에 있다. 뭐, 나와 선생님 순례자도 테라스에 있었으니까 헤헤

식사를 마치고 선생님 순례자는 글을 좀 쓰겠다신다. 나는 인사를 하고 길을 먼저 나선다. 길이 애매하게 되어있어 조금 헤매다 겨우 방향을 잡고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무념무상의 길이 이어진다. 이렇게 몸 상태도 좋지 않고 평범한 길이 이어질 때에는 좋았던 순간들을 돌이켜본다. 르퓌에서의 미사 시간, 콩크에서의 오르간 콘서트, 쟝과의 길들.



에오즈로 가는 도중 해가 반짝 뜬다. 저 멀리 두 젊은 여자 순례자들이 보인다.

이렇게 멋진 순간은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게 된다.

곧 그들을 따라잡게 되어 인사를 나눈다. 그들도 오늘 에오즈에서 머문단다. 같은 지트 일지는 모르겠지만 밝게 안녕하고 그들을 질러간다.


에오즈로 향하면 향할수록 더욱 더워진다. 해가 너무 반짝 떠서 괴롭다. 도시가 가까워지는 만큼 산책이나 조깅을 나온 분들이 눈에 띈다. 차로변을 걷고 있는데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어린 녀석들이 지나간다. 그렇게 에오즈에 도착했다.


내가 예약한 에오즈의 기부제 지트는 앙트왕에서 머물렀을 때 티보 키트리가 알려준 지트이다. 혹시나 여기 가면 티보 키트리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기대한 바도 없지 않았다. 내가 도착하니 지트 사장님이 밝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내가 1등이라고, 방을 선택할 기회를 주겠단다. 그렇다면 화장실과 가장 가까운 방으로!


그분은 제주도 올레길에 대한 다큐도 보았을 만큼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그분의 두 꼬맹이, 귀여운 아들과 딸이 엄마 뒤에 숨어 나를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주인이 말하길, 아시아에서 온 예쁜(?) 누나를 처음 보는지 이렇게 수줍음을 탄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네가 할 수 있는 영어로 인사해보라고 시킨다. 그랬더니 그 아들이 몸을 비틀며 보조개를 꽃피우며 인사한다. 헬로-. 아 어쩜 이렇게도 예쁘게 웃을까.


사장님이 예약자 명단을 보고 계시길래 나도 보여줄 수 있겠냐 물었다. 그랬더니 그분, 너 티보, 키트리, 마틸드, 말리사를 알 것 같은데 맞느냐고 물으셨다. 세상에! 티보 키트리가 이 지트에 오는구나 역시. 곧 만날 기쁨에 왠지 기분이 다 좋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있는데 예전에 만났던, 바욘에서 오셨다던 아저씨와 말이 적으셨던 순례자분이 함께 오신다. 이 분들, 분명히 처음엔 따로 다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함께 다니시는 모양이다. 분홍빛 기류가 두 분 사이에 감돌고 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지트 정원으로 가 빨래를 넌다.


아까는 해가 쨍했는데 지금은 또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비가 올 기미가 가득하다. 다시 빨래를 끌어안고 들어와 실내의 건조대에 넌다. 그렇게 순례자 하루 필수 일과를 마치고 시내로 가 식거리를 살 슈퍼를 돌아본다. 시내까지 가기에는 10분 정도 꽤 걸어야 한다. 걷고 있는데 아까 숲에서 만난 두 젊은 여자 순례자들을 만난다. 자신들도 베타니-내가 묵고 있는 지트로 간단다. 이따 보자며 인사를 나눈다.


간단히 장을 봐 온 뒤 오늘 하루 길을 정리하고 있는데, 0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티보와 키트리이다! 반갑게 비즈하고 인사를 나누는데, 두 여자 순례자들도 키트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이 두 여자 순례자들도 티보 키트리와 길에서 만나 서로 알고 있었단다. 내가 제일 먼저 들어온 방에는 두 여자 순례자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마틸드, 말리스라고 한다. 마틸드와 말리스는 파리에서 온, 막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이란다. 마틸드는 에흐-슈흐-라두흐까지 걷고 파리로 돌아가고 말리스는 산티아고까지 걸을 예정이라고.


곧 저녁식사 시간이 시작된다. 지트 사장님 부부와 귀여운 아들, 딸, 마틸드와 말리스, 티보 키트리, 바욘의 아저씨와 말이 적던 아주머니, 그리고 나. 식사 전 감사기도를 드리고 울트레이야를 부른다. 소박하지만 맛있는 저녁식사를 이어간다. 고맙게도 내가 있기 때문에 대화를 영어로 이어나간다. 굳이 나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지만 말리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당연한 거야, 하고. 말리스의 이런 진지한 모습은 처음에는 좀 무섭고 깍쟁이같이 느껴졌는데 알고 보니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 또 없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으슬으슬 춥다. 콧물이 코 끝까지 자꾸 내려와 나를 괴롭힌다. 이건 감기의 기운인 것 같다. 식사 내내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멈추질 않아서 바깥에 나가 팽하고 긴 시간 동안 코를 풀고 와야만 했다. 눈이 자꾸 감긴다. 세상과 내가 분리되는 기분이다.


기부제이니만큼 각자 기부할 수 있는 만큼의 금액을 숙소비로 내고, 도장을 받는다. 그 후 티보 키트리는 자신들이 약이 있다며 자신들의 약 꾸러미를 뒤지기 시작한다. 키트리는 이 약은 엄-청 졸리지만 효과는 정말 좋아라고 이야기하며 약봉지 세 개를 준다. 감사히 받아 든다. 티보 키트리는 네가 이 약을 내 눈앞에서 먹을 때까지 기다릴 거란다. 웃음이 난다. 둘 앞에서 약을 쭉쭉 짜 먹는다. 티보가 웃으며 말한다. 나는 너를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도와주기로 쟝과 약속했거든!


식사 후 잠깐 기도 시간이 있다고 한다. 바깥 정원에서 할 거라고 하는데 왠지 푹 쉬고 싶어 나는 방에서 쉬겠다며 사양했다. GR길을 걸으며 침낭은 거의 쓰지 않았지만 오늘은 침낭 안에 들어가 그 위에 이불까지 덮었다. 따뜻한 곳에 있는데도 춥다. 덜덜 떨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든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말리스 마틸드가 기도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자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잠에 쑤욱 빠져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Condom 꽁동 혹은 콩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