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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22. 2018

같이 구름을 보자

25. 당신들과 걷는 길 - 사랑스러운 사람들

10월 3일 화요일

GR65 Eauze - Lanne-Soubiran 29,7 km



어제 먹은 약 덕분인지 정말 푹 자고 일어났다. 키트리가 약을 주면서 이 약을 먹으면 너는 금방 곯아떨어질거라고 하더니 사실이었다. 일어나고 나니 몸이 내 몸같지가 않다.


같은 방의 말리스와 마틸드, 그리고 옆방의 티보 키트리는 아직 자고 있다. 티보 키트리는 조금 느지막이 일어나 약간 늦게까지 걷는데 말리스와 마틸드도 그러한 모양이다. 이상하게도 바욘 아저씨와 말수가 적은 아주머니도조금 늦게 일어나는 모양이다. 분명히 7시쯤 아침을 먹을 거라고 했는데, 불이 꺼져있어서 내가 불을 켠다. 불을 켜니 바게트 하나가 있길래 썰어본다. 그 때 지트 주인 아저씨와 귀여운 두 아가들이 봉쥬- 하고 인사하며 들어온다.


아저씨는 갓 구운 빵이라며 따뜻한 빵을 끌어안고 오셨다. 그러면서 이게 따뜻하니 이것도 같이 먹자신다. 곧 학교에 가야하는 두 아이, 주인아저씨, 그리고 나는 아침식사를 한다. 아저씨는 빵을 더 데워 오신다. 그 때 바욘 아저씨와 말수가 적은 아주머니가 들어오신다. 평소와 같이 오늘은 어디까지 가는지 이야기를 한다. 아무래도 GR종착지인 론스보, 혹은 프랑스의 마지막 마을인 생쟝이 가까워지다 보니 다들 비슷한 일정이다.


길을 떠나기 전 지트 주인아저씨가 다시 한번 지름길을 알려주신다. 에오즈의 GR길에서 내가 묵었던 베타니 지트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하단의 지도를 어제 저녁부터 보여주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혹시나 필요하실 분이 있을까 하여 첨부해본다.


바욘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식사를 초고속으로 마치고 먼저 출발하신다. 나도 식사를 마치고 짐을 싸고 있는데, 귀여운 두 꼬마들이 나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온다. 무슨일이냐 물으니 얼굴을 발그레하게 하고 나에게 이런걸 내민다.

세상에 이런 선물을 받게 되다니.

너무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고 달려가 비즈를 쪽쪽 해주니 신나서 더 매달린다. 이 꼬마들의 엄마는 어제부터 이 녀석들이 계속 내 얘기를 했더라며 웃는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고 날것이어서. 그리고 아이들 대하는 것을 어려워 했다. 행여라도 내가 그들에게 하는 무엇이 좋지 않은 영향으로 다가갈까봐. 하지만 이 아이들은 내 걱정 따위는 떠올릴 틈도 없이 맑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밝은 기운을 가득 안겨주고 갔다.


아이들은 스쿨버스를 기다리느라 대문에 나와있다. 나도 그 대문을 지나 길을 시작한다. 안녕! 좋은 길!! 하고 양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걷는다. 마을사이의 길을 지난다. 바욘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과일을 따며 즐겁게 대화를 하신다.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빨리 질러간다 헤헤헤.

 

그렇게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익숙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 잘 걷고 있구나 요즘 좀 어때! 콩동에서 같은 지트에 묵었던, 시끌시끌 미국 캐나다 스위스 3인방이다. 반가움에 신나게 인사를 한다. 그네들과 한참 걸어가고 있다가 슬슬 당이 떨어질 때쯤 한 차량 정비소 비슷한 곳을 지난다. 마침 기부제로 차를 마실 수 있게 해 둔 것이 있다. 동전 주머니를 무겁게 하는 상팀들을 그러모아 1.5유로 남짓으로 만들어 저금통에 넣는다. 밀크티? 하는 캐나다 아저씨의 제안에 감사합니다 하며 받아마신다. 차를 마시며 시덥잖은 농담을 한다. 이 3인방은 차 마시는 시간도 아쉬운 모양인지 재빨리 자리를 뜬다. 그 때 바욘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오신다. 슬슬 일어나볼까.



가끔 시간이 멈춘 듯 한 공간들을 지난다. 예전에는 그 위용을 자랑했을 옛날 차들이 처박혀 있는 모습들이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



그저 그런 경치들 지난다. 그저 그런 길들을 계속 걷는다. 아름다운 풍경도 있지만 그저 그런 산과 그저 그런 밭을 지나는 길도 대부분이다. 아름다움과 그저 그런것들이 쌓여 길을 이룬다.

담장 안의 새들도 본다. 몹시도 자주, 넓게 보이던 포도밭은 이제 줄었다. 옥수수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쾌청한 플라타너스들이 춤추는 길을 지난다.


그렇게 노갸호에 닿는다. 그러고 보니 한달 전에 샀던 프리 유심칩이 슬슬 그 명을 다 할 기간이 왔다. 한 달 뒤에는 내가 스페인에 닿았을 줄 알고 한달짜리를 샀었더랬다. 하지만 역시 계획은 틀어지라고 있는 법. 나는 아직 프랑스에 있다. 구글맵이 알려준 바로는 노갸호에 오렌지 대리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유심칩을 살까 아니면 내일 도착할 에흐 슈흐 라두흐에서 유심칩 파는 곳을 찾을까 몹시도 고민했었다. 결국 귀찮음이 이겼다. 내일 에흐 슈흐 라두흐에서 유심칩을 사기로 마음 먹는다. 또 후회할 일을 그렇게 하나 더 만든다.



노갸호를 지나니 갑자기 쾌청하다. 쾌청한 것은 좋지만 아침에는 너무 춥고 낮에는 너무 더우니 몸이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너무 독했던 키트리의 감기약 덕에 아직도 헤롱거리는데, 해까지 쨍 하게 뜨니 묘하게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다. 멍 하니 길을 이어간다.



언제 해가 떴냐는 듯 갑자기 안개가 자욱이 끼고 비가 추적거릴 때, 꽤나 자유로운 영혼의 커플을 만난다. 그들은 길이 어딨는지 밭 사이의 길을 헤메고 있었다. 내가 GR사인을 보고 먼저 가니 오 하면서 뒤따라온다. 키가 훤칠하게 큰, 약간 나이가 있는 커플 순례자들이다. 여자는 순례자답지 않게 멋드러진 귀걸이를 하고 있다.


길을 걷다가 조금 쉴 겸 대로변의 다리 난간에 가방을 걸쳐 쉰다. 그 커플이 오늘 묵을 숙소가 마땅치 않다고 곤란해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미슐랭에서 나온 가이드를 보고 있었는데, 안그래도 그 가이드에는 정보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지랖이 발동한 나. 인사를 하고 내 미암 미암 도도를 내민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이드북에는 정보가 많이 없는데 역시 이 가이드북이 더 좋구만 하면서 잠깐 빌려간다. 숙소 하나를 예약한 뒤 그들이 책을 돌려준다. 감사를 표한 뒤 그들은 먼저 길을 이어간다. 나도 따라 길을 걷는다. 대로변을 따라 걷다 마을로 빠지는 길 마저 같다. 밭을 끼고 도는데 안개가 자욱해 멋진 그림을 자아낸다.


아무래도 멋쟁이 프랑스 커플과 같은 지트인 모양이다. 그들이 먼저 GR길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나도 예약한 지트로 들어간다.


지트에 들어가 보니 꽤 큰 지트이다. 셩브흐도트 혹은 호텔 겸 주인의 건물, 그리고 지트용 건물이 따로 있다. 그리고 너른 정원, 차고까지 완벽하다. 이쯤 되면 지트에 들어서면서 바로 빨래를 널 곳을 확인하게 되는데, 오늘 묵을 지트는 빨래 널 곳도 많아 아주 만족스럽다. 주인의 집에 들어가 내가 묵을 곳을 안내 받는다. 나는 오늘 대략 30km를 걸은지라 오후 네시쯤 도착했는데, 이 방의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한 모양이다. 다들 빨래도 이미 널어 두셨고, 여유로운 오후를 즐기고 계셨다. 나도 샤워를 마치고 빨래도 한다. 그나저나 오늘 정신이 없는 지 샤워할 때 수건을 가져가지 않은 바람에 반은 젖은 상태로 옷을 입었다. 바보같으니.

느긋하게 빨래를 넌다. 해가 지면서 그림자가 이동한다. 꽤 시끌벅적한 독일 할아버지가 그림자를 따라 빨래건조대를 옮기는걸 돕기도 한다. 세번쯤 빨래건조대를 옮기고 있을 때였을게다. 다른 아주머니가 이 지트의 분실물을 찾으러 다른 젊은 순례자가 오고있다고 알려준다. 젊은 순례자라면 몇 안될텐데...하고 생각하는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 너 정말 오랜만이야!! 분실물을 찾으러 온 사람은 초록머리, 미국에서 온 디아나였다!


카오르 이후 처음 만나는 것 같아 정말 반갑게 인사한다. 디아나가 방긋 웃으며 묻는다. 그 사람, 쟝은 어디에 있어? 어쩐지 길에서 쟝을 만난 사람들은 다 나에게 쟝의 안부를 물어봐서 대답할 때마다 마음이 쓰리다. 아무래도 내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모양이다. 쟝과 따로 걷게 된 이야기를 하니 디아나 자신이 다 아쉬워한다.


디아나는 내가 묵고있는 지트에서 어제 묵었고, 오늘은 이 지트에서 5분 거리의 다른 지트에 묵는단다. 생장까지 걷는다는 디아나는 목표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더욱 길을 늦추며 걷고 있단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디아나가 너무 가볍게 입고 온터라 더욱 길게 얘기했다간 디아나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아 얼른 돌려보낸다. 내일 만날 수 있겠지? 하고 인사한다.


빨래가 꽤 괜찮게 마를때까지 기다리며 정원에서 미암 미암 도도를 보며 남은 일정을 계획한다. 지트 냉장고에서 콜라를 하나 사 정원에서 마시는데, 너른 정원 한 켠에 누워있는 통나무에 앉아있던 두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인사하며 다가가니 함께 앉자신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앉으니 지평선을 가리키며 한 할머니가 말한다. 우리랑 함께 저기 지평선의 구름을 보자. 근사하단다.


독일에서 왔다는, 하루에 10km 남짓만 걷는다는 할머니들. 할머니들과 함께 지평선에 걸린 구름을 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본다. 구름이 시시각각 제 모습을 바꾸는 것을 느낀다. 정원 한 구석에 텐트를 치는, 아까 길에서 만난 영혼이 자유로운 커플 순례자들의 웃음소리와 수다를 배경음악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구름을 보았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나니 저녁식사시간이다. 두 할머니는 이 저녁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평화롭게 기다릴 수 있는지 완벽하게 알고 계셨다. 빨래가 채 마르지 않아 빨래 건조대를 주인 아저씨 몰래 지트 건물의 0층 살롱에 가져다 둔다. 실내에 두면 더 잘 마르겠지. 내가 건조대를 실내에 가져다 둔 것을 보고 다른 순례자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빨래를 얹는다. 그러면서 너 진짜 똑똑하다고 농담한다. 이 귀차니스트들.


함께 구름을 보았던 두 할머니가 나를 챙겨 주인아저씨네 집으로 가 저녁식사를 한다. 저녁식사 멤버는 그 독일 할머니들, 내일 에흐슈흐라두흐에서 순례가 끝나는 프랑스 아저씨 커플, 그리고 나. 아까 주인 아저씨에게 인사하러 들어올 때 느꼈지만 이 곳 인테리어가 예사롭지 않다.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여쭈니 흔쾌히 오케이하신다.



주인아저씨는 아페리티프를 모두에게 따라준 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전식을 냉장고에서 꺼내 오신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샐러드를 담아 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냉장고 맛이 약간 느껴졌지만 충분히 신선한 샐러드. 무엇보다도 테이블 세팅에 상당히 신경을 쓰시는 모양이었다. 이후 나온 본식. 비쥬얼은 제육덮밥이지만 절대 아니다. 토마토소스로 맛을 낸 고기 덮밥이다.



전식이 너무 좋았던 탓일까. 본식에 약간 실망했지만 디저트가 내 초딩 입맛에는 완벽했다. 브라우니에 크림, 그리고 고구마에 버터를 넣어 달달하게 만들어낸 것. 신나서 껍질까지 다 먹을 뻔 했다.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노린재 하나가 방으로 들어와 테이블 주위를 날아다녔다. 벌레 하면 온갖 호들갑을 다 떠는 나 때문에 모두가 웃는다. 식사는 거의 마쳤지만 아페리티프로 나왔던 화이트와인과 본식과 함께 나왔던 레드와인이 많이 남아 모두 수다를 떨며 그것들을 비우고 있던 터였다. 주인아저씨는 어디선가 빗자루를 하나 가져와 살살 몰아 노린재를 창 밖으로 내보냈다. 내일 순례가 끝난다는 아저씨 커플 중 꽤 말솜씨가 뛰어났던 아저씨는 노린재를 생각없이 죽였다가는 얼마나 끔찍한 냄새가 나는지 내게 알려준다. 아저씨 우리나라에도 노린재는 있다구요.


주인아저씨는 내가 갔던 어느 지트보다도 주방 인테리어와 도구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였다. 소품 하나하나가 굉장히 맘에 들어서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하나하나가 예뻐서 행복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맘때쯤부터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에흐 슈흐 라두흐에서 길을 끝내고 돌아가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 길동무들이 하나씩 인사하는 것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조금만 더 걸으면 내 순례길의 절반이 지나간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이 소중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다는 게 너무 아쉬워 약간 슬프기까지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저 자고, 먹고, 걷고, 그리고 어느 때 보다도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이 내 자신에게 있어 정말 보석같은 시간이 되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감정을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 한켠에서 나 스스로 완전히 제 3자가 되어 감정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노력했다. 이렇게 바라보는 습관은 길을 걷는 초반부터 연습해 이맘때부터 익숙해질 수 있었다. 행복하고 화가나고 슬픈 감정들을 그저 바라보면서 내 감정의 동요를 줄이는 연습.



꽤 괜찮은 식사를 마치고 지트로 돌아가는 길. 칠흑같은 어둠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별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내일은 필시 비가 오거나 구름이 자욱이 낄 것 같다.


환기를 해야한다며 어떤 할머니가 열어둔 틈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신경쓰여 묘하게 잠이 안온다. 0층으로 내려가보니 마침 불이 켜져 있어 책을 본다. 아저씨 커플은 내일 어떤 교통수단으로 돌아갈 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두런두런 나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다 침대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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