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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23. 2018

혼자 쓰니 쓸쓸하다

26. 당신들과 걷는 길 - 작은 지트의 1인실과 대왕거미

10월 4일 수요일

GR65 Lanne-Soubiran - Aire-sur-l'Adour 20,2 km



내일은 내가 한달 전에 프리에서 구매했던 유심이 완료 되는 날. 오늘 묵을 에흐 슈흐 라두흐는 큰 마을이니까 유심을 파는 곳이 있겠지 하고 기대해본다.


20km는 평소 내가 걷던 거리보다는 적은 거리이다. GR65길 후반부는 마을간의 거리가 멀다. 에흐 수흐 라두흐 다음 마을은 18km나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묵는다. 그리고 에흐 슈흐 라두흐는 GR65길의 거의 마지막 큰 마을이므로 이 곳에서 길을 마치는 사람들도 많다. 그저께 지트에서 만난 마틸드도 이 곳이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아침식사를 하러 주인아저씨네 건물로 간다. 가 보니 영혼이 자유로운 커플 순례자와 멋쟁이 여자분, 이렇게 세 분이 계신다. 바게뜨에 복숭아잼을 발라 맛있게 먹는다. 이제 사발에 마시는 커피는 두 사발 정도 마셔 줘야 커피 마신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영혼이 자유로운 순례자 언니는 차에 잼을 넣어 드신다. 신기하다. 그 때 아저씨 커플이 오셔서 주인아저씨께 택시 예약을 부탁한다. 아무래도 말수가 적으셨던 아저씨 컨디션이 안좋으셨던 모양이다. 어제 저녁을 함께한 독일 할머니들은 오늘 조금 늦게 일어나시는 모양이다.


안개가 정원에도 자욱하다. 매일같이 자욱한 안개와 함께 길을 시작한다. 란느수비헝의 지트는 길 바로 옆에 있어서 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GR마크를 볼 수 있다. 사람 소리가 나서 보니 저 멀리 시끌시끌 미국 캐나다 스위스 3인방이 길을 걷고 있다. 한참동안 안개에 휩싸인 언덕길을 걷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밭과 수확이 끝난 밭을 걷고 걷는다. 서너가구만 있는 마을도 하나 둘 지난다.


꽤 높은 지대에서 내려와 기찻길을 건너 한참동안 걷다 보니 날씨가 점점 맑아진다. 오늘은 확실히 빠른 시간에 도착할 것 같다. 한동안 큰 차도에서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진 길을 걷는다. 공장지대도 지난다.


12시쯤 에흐 슈흐 라두흐 바로 직전 3km 마을인 Barcelonne-du-Gers 의 작은 공원 벤치에서 점심을 먹는다. 캔 샐러드를 따고 빵을 쪼개어 버터와 잼을 바른다. 이제는 일상이 된 식사시간. 그 때 지나가던 한 부부가 인사를 한다. 자동차로 프랑스 전역을 돌며 여행한다는 그네들은 걸어서 여행하는 나의 에너지를 부러워했다. 차로 국내 여행을 하는 것도 굉장히 부러운데요? 하고 말했지만 역시 난 걷는 게 좋다. 그들이 인사하고 떠나니 저 멀리서 초록머리 디아나가 안녕- 하고 인사하며 다가온다.


함께 점심을 먹는다. 나는 먹고 있던 샐러드 캔을 싹싹 비우고 빵도 다 먹은 다음 봉지에 밀봉해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디아나는 간단히 빵 조금과 서양배를 먹는다. 간식을 먹은 터라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다는 디아나. 나는 서양배를 먹어본 적 없다고 하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부드럽고 달며 나쁘지 않다고 기회가 된다면 꼭 사보라고 한다.


항상 마을 도착하기 3~4km 전, 그러니까 마을 도착하기 한시간 전이 가장 힘들다. 이건 이상하게 20km를 걷든 30km를 걷든 비슷하다. 40km는 예외로 하자. 내가 그렇지 않냐고 디아나에게 말하니 디아나도 정말 그러하다고 웃는다. 꽤 오랫동안 디아나를 마주쳐왔는데 정작 디아나와 서로 길을 걷는 이유를 말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혹시 물어본 적 있니? 하고 물어보니 우리 서로 이렇게 '순례자스러운' 대화는 나눠 본 적 없는 것 같다고 디아나가 답한다.


디아나는 자신의 전공으로 취업을 한 뒤 1년동안 일을 했단다. 자신은 안그래도 자신의 전공을 몹시도 싫어했는데, 일을 하고 보니 더더욱 싫더란다. 견딜 수 없던 디아나는 대학교 방학때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을 떠올렸다고. 그래서 아예 본질적인 삶의 감각을 떠올리고 싶어서 다시 걷자 작정했단다. 프랑스길에서 만난 프랑스인들이 알려준 GR65를 걷기로 결정하고, 르퓌부터 걷기 시작한 디아나.

일전에 만났던 캐나다 디자이너 부부도 그렇고, 이 길을 걷는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스페인 안의 순례길 경험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이 길을 추천받은 경우들이 대부분이고. 신기할 따름이다.


디아나는 생장까지 걷기 때문에 슬슬 돌아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나는 길이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아나도 나도 공감하기를, 이미 우리 안에 답은 있었다. 다만 그걸 실행할 용기가 조금 부족할 뿐이었다.


디아나와 나는 서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디아나와 나는 원하는 바가 있지만 그를 실행하기엔 조금 용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를 확인하기 위해 내 본질에 집중하고자 하는 순례를 결정했다. 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는 모를지언정 그에 대해 느꼈던 감정과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한 결정은 놀라우리만치 같았다. 우리는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기로 약속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에흐 슈흐 라두흐가 보인다.


에흐 슈흐 라두흐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자주 마주치던 아저씨와 인사를 나눈다. 디아나는 그 아저씨를 잘 알고있었다. 크리스티앙이란다. 디아나는 크리스티앙과 함께 걸으면 절대 길을 잃어버릴 염려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들떠있었다. 그렇게 크리스티앙을 앞에 세우고 에흐 슈흐 라두흐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넌다.


밝게 웃던 디아나.


에흐 슈흐 라두흐에 도착해 내가 예약한 지트의 주소를 치고 구글맵을 켜 보았다. 이런... 마을 중심가에서 많이 떨어져있다. 걸어서 15분정도 걸릴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순례자니까 그정도는 일도 아니지. 지트에 도착하니 대략 오후 2시이다. 오늘은 여유가 많으니 유심도 여유있게 살 수 있겠지.

지트로 가는 길. 마을 중심에서 거주지역을 지나 한참 걸어 가야한다.


지트는 전체 숙박 인원이 2인, 그리고 방도 2개이다. 그러니까 1인 1실. 지트 자체는 상당히 시내 외곽에 있었지만 방 자체를 혼자 쓸 수 있어서 좋았다. 0층은 주인 아주머니가 묵고 1층을 순례자들에게 내어주는 모양이었다. 방에는 철 지난 포스터가 붙어있었지만 굉장히 깔끔하고 좋은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거기다 두 마리의 꽤 나이 있는 고양이가 이번엔 또 누군지 살피러 온다. 고양이를 보니 우리 집 씨옹이가 눈 앞에 아른거린다.


아주머니는 이 곳의 다음 마을까지 18km가량 아무것도 없으니 꼭 먹을 것들을 보충해 두라고 단단히 일러주신다. 더불어 이런 저런 정보들을 알려 주셨는데 팔할이 프랑스어라 안타깝게도 흘려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요 한달동안 알아듣지 못해도 알아듣는 것처럼, 눈을 맞추고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척'이 늘었다.


에흐 슈흐 라두흐의 성당에 들러 일단 감사기도를 드린 다음, 관광안내소에 가서 내일과 모레 숙소 예약을 부탁한다. 다행히 몹시도 친절한 분이라 꼼꼼하게 숙소 예약까지 도와주고, 지도까지 보여주며 이 곳에서 방문해야 할 곳들까지 알려주신다.


맞다, 유심 살 곳을 물어봤어야했는데. 당차게 나온 관광안내소에 다시 가니 오늘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멋쟁이 순례자분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바욘에서 온 순례자분과 오붓한 분위기를 풍기던 아주머니도 다시 만난다. 두 분은 오늘로 순례를 끝내고 돌아간단다. 바욘 아저씨가 잘 보이지 않더니, 아주머니와 헤어지신건가 싶다.


관광안내소에서 다시 유심 파는 곳을 안내 받아 찾아간다. 영어가 힘들었던 직원 언니는 전 세계인의 친구 구글 번역기로 내 구매를 도와주었다. 알아보니 에흐 슈흐 라두흐의 통신사 대리점에는 프랑스 내에서만 쓸 수 있는 유심은 있는데 내가 필요한 유럽 전역에서 사용 가능한 유심은 없었다. 스페인 팜플로냐에 가면 찾을 수 있겠지.. 하고 희망을 가져보지만 왠지 초조해진다. 아무래도 네트워크에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던 쟝과의 연락도 끊어진다고 생각하니 길이 한껏 더 외롭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관광안내소에서 소개 받은 성당에 다시 가 본다. 아까 버릇처럼 성당에 들렀는데, 그 성당이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이었다. 가 보니 디아나가 성당 직원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짧게 감사기도를 드리고 나온다. 나와 보니 어제 길에서 스쳤던, 산티아고로 간다는 나이든 독일 커플을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내가 인상적이었는지 함께 사진 찍기를 요청했고 나는 흔쾌히 응했다.  


수퍼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안경집에서 깨끗한 끈 하나를 산다. 원래의 용도는 안경끈이었을 게다. 하지만 전부터 나는 쟝이 준 루흐드 성모 펜던트를 좀 더 가까이 지니고 싶어서 말끔한 끈을 사 목걸이로 만들 요량이었다. 나쁘지 않은 가격. 친절한 직원의 도움으로 끈을 하나 사 보람차게 돌아와 지트에서 휴식을 취한다.



아까 나와 디아나보다 먼저 에흐 슈흐 라두흐에 도착했던 크리스티앙이 이 지트에서 묵는 줄 몰랐는데, 크리스티앙이 지트로 들어오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크리스티앙은 오늘 순례를 끝내는 동년배 순례자들과 한잔 하고 온 모양이다.


방은 정말 깨끗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정말 큰 거미가 두 마리나 나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방충망이 없어서 열어 둔 창문 틈새로 거미들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내가 지른 소리에 놀란 아주머니가 와서 청소기로 거미를 빨아들인다. 부끄럽지만 내가 잘 때 거미가 내 위를 기어다닐거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저녁식사는 주인아주머니와 나, 그리고 크리스티앙 아저씨 이렇게 셋이서 한다. 영어가 수월하지는 않았던 아주머니는 크리스티앙 아저씨와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프랑스어로 대화 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인다. 덕분에 나는 조용하게 나만의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주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크리스티앙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조용히 귓속말 제스처를 하며 이야기한다. 여기 음식이 별로야.



크리스티앙과 평범한 순례자 대화를 나눈다. 크리스티앙은 순례길을 여러번 완주한 경험자. 이미 걸은 길을 왜 자꾸 걷는지 물으니 삶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 다시 되새기기 위해 걷는단다. 한참동안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크리스티앙은 얼마 전 얻은 손주가 몹시도 귀여운 모양이다. 사진을 보여주며 한참 자랑을 한다. 당차게 걷던 순례자는 손주 자랑을 할 땐 한없이 부드러운 할아버지가 된다.


식사를 마치고 내일 아침 식사는 몇시에 할 지 주인아주머니가 묻는다. 크리스티앙도 나도 내일은 아르작 아라지게, 꽤 먼 거리를 걸을 예정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6시 반 괜찮을까요?하니 크리스티앙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도 그 시간이 좋겠다며 동의한다. 아주머니는 알겠다 한 뒤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내려가신다. 아주머니의 고양이 두마리도 따라내려간다.


방에 혼자 누워있자니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든다. 내일은 여럿이 자는 지트에 가니까 좀 나아지겠지. 지나온 길들과 스쳐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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