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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26. 2018

다 모였다

27. 당신들과 걷는 길 - 모두 함께 만난 아르작의 공립 지트

10월 5일 목요일

GR65 Aire-sur-l'Adour - Arzacq-Arraziguet 34,5 km



오늘은 꽤 긴 길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음 마을까지 18km 가까이 아무것도 없으니, 점심까지 그야말로 내리 걸어야 한다. 아침부터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짐을 정리한다.


새벽 6시 반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이르게 조식 요청을 드렸더랬다. 그럼에도 과묵하면서 친절했던 주인은 그 이른 시간에 꽤 넉넉한 아침식사를 준비해 준다. 나와 크리스티앙은 이른 아침식사를 마치고 7시 땡 하자마자 지트를 떠난다. 아직 바깥은 어둑하다.


지트에서 떠나 길을 나서는데 동이 트고 있었다.

하늘 곳곳에 콕콕 박힌 별이 예쁘다.

강에 비친 가로등 불빛이 아름답게 일렁인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아침부터 출근하는 차들이 저 다리 위에서 꽤 밀려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서도 아침의 교통체증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에흐 슈흐 라두흐의 GR 마크는 바닥의 이렇게 생긴 금속붙이로 되어있다.


에흐 슈흐 라두흐를 빠져나오는 길은 가파른 언덕길이다. 이 언덕길은 학교와 성당을 가는 길이기도 했는데, 내가 길을 떠났던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는 등교시간이었는지 학생들이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오르막을 헥헥 대며 올라가고 있는데 옆에서 엄마와 딸, 아들도 함께 헥헥 거리며 언덕을 오르다 눈이 마주쳤다. 배실배실 웃으며 봉 슈망 하고 인사해 준다.


크리스티앙 아저씨는 얼마나 빨리 갔는지 뒤꽁무니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어디서 묵었는지 모를 몸집이 토실한 할아버지 하나가 저 앞에 보인다. 얼른 따라잡아 언덕을 다 올라가니 찻길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이후 마을을 지나가는 길로 빠진다. 이 길을 걷고 있으니 해가 뜨고, 갑자기 자욱한 안개가 마을을 뒤덮는다.



안개가 자욱한 마을을 지나, 옥수수 등 잡곡 밭 사잇길을 한참 걷는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버스정류장같이 생긴 쉼터가 있어 잠깐 숨을 돌린다. 마침 식수 수도꼭지도 있겠다, 물을 마시고 바나나를 하나 먹는다. 18km, 그러니까 내 걸음으로 네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긴 길을 만나면 아무 생각 없이 걷기 쉬운데, 컨디션 조절을 틈틈이 잘 해주지 않으면 오후에 급작스런 피로가 몰려온다.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일부러 물을 잘 마시고 물을 보충할 곳이 있으면 무조건 보충 한다. 약 한달간 내가 자연스레 터득한 내 순례길 법칙이다.


물도 마시며 쉬고 있는데 아저씨 하나가 온다. 아저씨도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쉰다. 이제 한달쯤 되다 보니 왠만한 분들은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익은데, 이분은 낯설다. 인사를 나누니 파리에서 왔단다. GR65길을 나누어 매년 조금씩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에흐슈흐라두흐부터 혼스보까지 걷는 순서란다. 이번이 드디어 GR65 마지막 구간이라고 기뻐한다.


아저씨는 내게 에흐슈흐라두흐부터 18km거리에 있는 미라몽에서 우회하면 2~3km는 줄일 수 있다면서 내게 왼쪽 사진의 지도를 보여주었다. 혹시나 모르니 사진은 찍었지만, 일전에 콩크 가던 날 엘로디와 길 잃었던 생각이 떠올라 그냥 내 길을 따라 가야지... 하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는 오늘 길을 시작해서 그런지 에너지가 넘치신다. 나도 분명히 르퓌에서는 이렇게 에너지가 넘쳤더랬지 하고 시작하던 날의 생각을 한다. 매일같이 길을 걸으면서도 길을 시작하던 날을 그리워한다.


이후 한참동안 너른 밭 사이에 난 길을 걷는다. 안개도 자욱한지라 가시거리도 짧아 풍경이랄 것도 없다. 아무생각 없이 길을 이어간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기분이 이상하다. 오브락 고원의 농장 길을 걸을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마을 하나 없이 긴 길을 걸어야 할 때는 이상하리만치 사람 하나 만나질 못한다.


중간중간 정신 놓지 말라고 하늘에서 비도 뿌려준다. 이제는 구글맵도 체크 하지 않고 그저 길을 이어나간다.


한참 길을 걷다가 슬슬 건물이 하나둘 보일때 쯤, 생트앙떵에서 만났던 밀레 가방 부부 쟝미셸과 프랑소와즈를 만났다. 쟝미셸과 프랑소와즈는 아무래도 나와 걷는 속도가 비슷한지 같은 곳에 묵지 않아도 꽤 자주 만나게 된다. 두 분과 미라몽에 동시에 닿아 마을 입구의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바욘 아저씨도 온다. 세 분은 초고속 프랑스어로 한참동안 수다를 떠신다. 한참동안 프랑스인들의 엄청난 대화양을 구경하다가 먼저 출발한다.



미라몽. 아르작 아라지게까지 14km라고 하지만 믿지 않겠다. 순례길을 걸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놈의 길 표시들은 모두 제 멋대로이다! 미암미암도도와 표지판이 다르거나 길이 줄어들었다 늘어나는 건 예사이고, 이건 도저히 00km일 수 없는 먼 거리도 짧게 표시되어있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뭐, 기분탓도 있겠지만.


이전까지만해도 생작까지의 거리를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 생작까지의 거리를 표기하는 곳이 많아졌다. 생작 1000km지점을 찍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 해본다.



정오가 지나니 안개가 많이 걷혔다. 대신 오늘 날은 좀 흐리다. 이러다 또 저녁에 해가 쨍하니 뜨겠지.


소떼가 풀을 뜯는다.

양떼가 풀을 뜯는다.

소랑 눈 마주쳤다.


예전에 오브락 지날 때 만났던 소방수 할아버지가 오브락 소들이 예쁘다고 했던 것을 이해 못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된다. 오브락 지역의 소들은 눈도 땡글땡글하니 예뻤는데, 점점 남쪽으로 더 내려 올 수록 소들이 심술궂은 얼굴로 보인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가장 태평한 건 역시 소들이다. 풀 뜯느라 바쁜 양들에 비해 항상 느긋하게 풀 뜯고 되새김질하고 늘어져있는 모습은 예쁜 오브락 소든 심술궂은 이곳의 소든 똑같다.


평지만 한참 걷다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길을 만나 사진도 하나 남겨본다.


한참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아르작 아라지게의 전 마을인 핌보 Pimbo가 가까워진다. 시계를 보니 벌써 두시 정도 되어간다. 이제 아침에 길을 시작하면 27~8km정도는 오후 두세시 남짓이면 끝내게 된다. 핌보에 닿기 전 해가 너무 이글거린다. 프랑소와즈 쟝미셸 부부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핌보에 도착한다.


핌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눈 앞에 보이는 호텔 겸 바에서 콜라를 한잔 한다. 프랑소와즈와 쟝미셸도 옆테이블에 앉아 스프라이트를 한잔 한다. 저 멀리서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와 귀기울여보니 아니나다를까, 캐나다 미국 스위스 3인방이다. 이 3인방은 또 시끄럽게 너무 덥다고 높고 빠른 말투로 엄청나게 빠르게 이야기를 한다. 3인방과 나, 프랑소와즈 쟝미셸 이렇게 여섯이서 한참 쉬고 있을 때 바욘아저씨, 콘돔 아닌 콩동에서 함께 묵었던 선생님 순례자도 인사하며 다가온다. 모두 함께 합석하고 서로 안부를 묻는다. 모두들 비슷한 시기에 르퓌에서 길을 시작한 사람들. 다 함께 만난 적은 없지만 서로 따로따로 알고 있어서 결론적으로 모두가 서로 아는 사이다. 생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보니 더더욱 서로가 반갑다.


시끌시끌 3인방 중 아저씨가 핌보-라는 마을 이름이 너무 신기하단다. 프랑소와즈, 쟝미셸도 이 핌보라는 이름은 프랑스인한테도 어색하고 신기하단다. 시끌3인방 아저씨가 나에게 핌보는 한국에 있는 마을을 뚝 떼어다 놓은 것 아니냐고 장난을 친다. 뭐야 프하하하


선생님 순례자는 오늘 이 핌보에서 묵는단다. 오늘 예약을 하지 않았던 3인방은 더워서 더 못걷겠다고 가능하면 여기서 묵겠다며 호텔 주인에게 자리가 있는지 묻는다. 자리가 있었는지 일단 구두로 예약하고 마저 수다를 이어간다. 프랑소와즈와 쟝미셸은, 그리고 바욘아저씨는 오늘 나와 같은 아르작 아라지게의 지트에 갈 예정. 아르작 아라지게의 공립지트는 워낙 커서 웬만한 순례자들은 다 그곳으로 가는 모양이다.


프랑소와즈, 쟝미셸, 그리고 나는 괴롭지만 목표까지 가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핌보를 나서자 마자 가파른 내리막과 너른 밭, 그 사이를 지나는 길이 있다. 하... 너른 밭 사이를 지나는 길은 그림자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글거리는 빛을 다 쪼이며 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더위에는 훌렁훌렁 벗고 가볍게 민소매 차림으로 걷는게 최고이다. 이미 타는 건 포기했다.


콜라 한 잔 마시면서 본 핌보 마을쪽.

핌보에 있던 작은 성당.

핌보를 떠나는데 해가 너무 쨍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풍광은 아름답지만 저 쨍한 햇볕을 내 몸으로 다 받아가며 가야한다는 것이 포인트. 구름이 해를 가려줄 때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해랑 구름이 나그네를 두고 싸우던 동화를 떠올리며 길을 걷는다.



두시간 남짓 햇볕을 몸으로 다 받아가며 옥수수밭 사이를 걷는다. 확실히 바스크 지역으로 넘어오니 단어들은 더 읽기 어려워지고 지붕 모양들도 한층 더 특이해진다.


아르작 아라지게 푯말이 보이자 마자 기뻐서 사진을 찍는다.



아르작 아라지게는 제법 큰 마을.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곳에서 포 pau 로 이동해 루르드로 갈 예정이었더랬다. 하지만 중간에 기차파업이니 뭐니 해서 일정이 틀어져 그대로 GR65를 이어 걷기로 했었지. 돌이켜보면 잠깐 멘탈이 무너지긴 했지만, 생장까지 걷게 되어서 소중한 사람들과의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좋은 결정이었다.


네시쯤 도착한 아르작 아라지게에는 큰 꺄르푸도 있고 은행도 많다. 공립지트로 찾아가 보니 내 앞에 초록머리 디아나가 도장 찍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명단을 보니 나보다 조금 걸음이 빨랐던 프랑소와즈, 쟝미셸도 방에 들어간 모양이다. 드미팡시옹을 신청하고 디아나와 함께 방에 들어가보니 반가운 얼굴들이 있다. 예전에 리비냑에서 만났던 중국에 사는 남미 언니, 그리고 나스비날 공립지트에서 같이 방을 썼던 (후에 렉투르의 지트에서도 만났었다) 조금 깐깐한 퀘벡 아주머니가 같은 방이었다! 남미 언니는 내가 꽤 인상에 남았었는지 몹시도 신나게 뛰어나와 인사를 나눈다. 깐깐한 아주머니도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만나게 되어 신기하단다.


순례자의 필수일과인 샤워와 빨래를 마친 뒤 관광안내소로 가 내일과 모레 숙소 예약을 요청한다. 역시나 이 곳의 관광안내소도 굉장히 친절하고 꼼꼼히 예약을 도와준다. 지트 예약 전화 중 내게 주신 박하사탕은 달달한 덤. 내일은 아떼즈 드 베아흔 Arthez-de-Bearn, 모레는 나바헝쓰 Navarrenx. 이제 사나흘정도면 이 GR65길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다 아쉬워진다.


내일 점심거리를 사러 가 볼까 하고 꺄르푸로 향한다. 꺄르푸로 가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보인다. 신혼부부 티보 키트리, 그리고 말리스다! 마틸드는 어제 길을 끝내고 오늘 올라간 모양이었다. 내가 반가워 달려가니 바닥에 널부러져 더위를 식히고 있던 티보 키트리가 쪽쪽 비즈한다. 이 3인은 대체 너 언제 여기 도착했냐고 묻는다. 에흐 슈흐 라두흐에서 아르작은 꽤 먼 거리니까... 내가 아침 7시에 출발했다하니 이구동성으로 너 나이든 순례자들처럼 걷는구나! 하고 외친다. 일찍 도착해서 씻고 일찍 자면 좋잖아. 내가 할머니같다고 웃는다. 이것들이 진짜 ^^?


돈을 아끼기 위해 항상 저녁을 만들어먹는 티보 키트리 말리스는 꺄르푸에서 찬거리를 잔뜩 산다. 나는 간단히 내일 먹을 것만 산다. 생콤돌트의 지트에 캡 모자를 두고 온 터라 3주 가까이 모자 없이 걸어서, 내 이마는 새까맣게 타다 못해 반질반질 빛까지 난다. 마침 이 꺄르푸에는 캡모자를 팔고 있어서 10유로짜리를 하나 산다. 내가 이 까맣고 못난 디자인의 모자를 10유로, 만 삼천원 가까이 되는 돈을 주고 사다니... 부들부들 거리며 계산을 마친다.


지트에 묵을지 아니면 야영을 할지 고민해보겠다면서 티보들은 다시 꺄르푸 앞에 털썩 앉는다. 나는 지트로 돌아와 정리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저녁식사는 남미언니, 나, 디아나, 퀘벡아주머니, 길을 조금씩 나누어 걷는다는 처음 만난 프랑스인 부부 둘, 바욘아저씨, 프랑소와즈 쟝미셸, 그리고 란느쑤비헝에서 만났던 멋쟁이 커플순례자. 간만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남미언니와 나, 디아나는 간만에 수다 상대를 만나서 우리대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다른 분들도 엄청난 속도로 빠른 대화를 나눈다. 식사는 약간 아쉬웠지만 아쉬운 식사가 무엇이 중요하리. 이렇게 신나게 떠들 수 있는게 어디인가.


식사를 마쳤는데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화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 눈알이 떼구륵 굴러가는 게 보였는지 디아나가 힘겹게 웃음을 참는다. 굉장한 친화력의 남미 언니는 어느 새 프랑스어까지 완벽하게 섭렵해서 그 속사포같은 대화에 끼어 한 몫 하고 있었다. 지루해진 나와 디아나는 본뉴이- 하고 나와 또 여고생처럼 웃었다. 디아나 왈, 너는 아시안인데도 표정을 읽기가 정말 쉬워서 신기하단 말이야. 그치 디아나? 그게 내 가장 큰 약점이야...


빨래가 아직 덜 말라서 방으로 옮기며 아래를 내려다 보니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티보 키트리 말리스가 보인다. 티보 키트리는 결국 이 지트로 와 텐트를 쳤다. 말리스는 이 건물 어딘가에서 묵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묵었던 지트 중 손꼽히게 큰 지트.

내가 길을 걸으며 만났던 많은 이들이 오늘 한 번 더, 이곳에 다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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