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아 Feb 27. 2018

조용한 마을

28. 당신들과 걷는 길 - 피레네 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10월 6일 금요일

GR65 Arzacq-Arraziguet - Arthez-de-Bearn 31,1 km


같은 방의 사람들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슬몃 눈치를 보다가 용기 내어 먼저 식당으로 내려간다. 아침 7시, 식당에 가 보니 지트를 관리하는 분이 먼저 빵을 썰어 두고 계신다. 인사를 건넸는데 뭔가 낯을 가리시는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마신다. 어제 디아나가 나에게 말하길, 저 지트 관리하시는 분 아시안 같지 않아? 혹시 너희 나라 분이니?라고 물어봐서 눈여겨보았는데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아시안처럼 보여도 아시안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니까. 사발에 한가득 커피를 담아와 빵과 함께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식사를 어느 정도 마칠 때 어제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프랑스인 노부부와 프랑소와즈 쟝미셸이 들어와 인사를 나눈다. 계단으로 올라가니 방금 일어난 디아나가 인사하며 내려온다.


당차게 짐을 다 싸고 출발하는데 쌀쌀하다. 원래 이렇게 쌀쌀했던가 이상하다 싶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 지트에 매일같이 입고 다니던 파란 점퍼를 두고 온걸 이제야 깨닫는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멋쩍게 인사한 뒤 점퍼를 입고 나온다.


오늘은 길을 시작하자마자 강 옆의 둑길을 걷는다. 안개가 자욱하다. 저 멀리 개를 산책시키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오늘 길은 아주 무난히 이어진다. 조금 걸었을 때 마을 하나가 나오고 작은 성당을 하나 만난다. 최근에 지어진 듯 무척이나 깨끗하다. 들어가 하느님께 인사드리고 오늘의 축복을 요청한다.



언덕길에 올랐다가 내려가려는데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이 무척이나 목가적이다.



오늘도 그저 무난한 길을 걷는다. 일상이 되어버린 길 걷기. 이제는 길을 잃어버리는 법도 없다. 



말들도 만난다. 요 며칠 무난한 길만 걸었더니 길 초반 힘들어했던 게 아주 옛날 일 같다. 아테즈 드 베아흔에 도착해가는 언덕길에 작은 성당을 만나 감사기도도 드린다. 마침 어떤 할머니가 성당을 청소하고 계셨는데, 들어가도 되냐 여쭈우니 반갑게 들어오라 맞아주신다. 기도드리는 와중 행여 나에게 방해가 될까 조용히 빗질을 해 주신다. 감사하다.



이제 30km 내외는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아테즈 드 베아흔에 닿는다. 걸음에 익숙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요 며칠 길들이 평탄해서 더더욱 수월하게 걸을 수 있게 된다. 날씨가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고 우울하다가 오후에는 해가 쨍 하니 비치는 패턴, 이제는 아주 익숙하다.



마을 사이의 길을 한참 걸어 들어간다. 각각 집들의 정원들이 모두 정갈하고 예쁘게 가꾸어져 있다. 



마을까지 들어가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1층 난간에 매달려 아빠와 세상 구경하던 아가가 날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 뭐라 말한다. 아이의 아빠가 봉쥬흐 하고 인사하자 하니 부끄러워 숨는다. 귀여워라.

공립지트에 도착하기 전, 마을 성당에 들러 감사기도를 드린다.



아테즈 드 베아흔의 공립 지트에 도착해보니 프랑소와즈 쟝미셸, 밀레 가방 부부가 먼저 도착해있다. 프랑소와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어 무슨 일이니 물어본다. 평소에는 영어가 수월치 않아 말을 삼가던 프랑소와즈가 갑자기 폭풍 같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영어 반, 프랑스어 반. 오는 길에 이상한 개가 있었단다. 나도 그 개를 보았지만 그 개는 나를 본체만체 한 터라 괜찮았지만. 프랑소와즈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 개를 피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갑자기 달려들어 허벅지를 물었단다. 그러면서 내가 차마 여기서 허벅지를 보여줄 순 없지만 아주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났어! 무서웠어! 정말 엄청나게 놀랐어!! 프랑소와즈가 이렇게 빠르고 높게 이야기를 하는 게 신기했지만 일단 광견병 걱정이 되어 병원에 가 보아야 하는 게 아니냐 했다. 쟝 미셸과 프랑소와즈는 그 정도까진 아닐 거야 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것.


아직 오후 두세 시밖에 되지 않아서일까, 공립지트 관리자는 아직 지트에 없었다. 그래도 나스비날의 공립지트에는 어느 방에 들어가면 되는지 안내해주는 종이도 있어서 좋았는데, 이 곳에는 아무런 안내서도 보이지 않는다. 프랑소와즈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프랑소와즈는 결국 공용 거실의 소파에서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청하고, 나와 쟝미셸은 지트 관리자를 기다리다 각자 장을 보고 오기로 한다.


뭔가 상점을 찾고 싶다면 무조건 성당 근처로. 역시나 성당 근처에 빵집과 작은 마트가 하나 있다. 오늘 저녁 때울 것과 내일 점심에 먹을 것들을 산다. 동네 빵집에서 고기 파이와 작은 피자 같은 것, 그리고 내일 아침용 크로와상을 산다. 이렇게나 빵이 맛있는데 싸기까지 하다니..! 빵순이인 나에게는 천국과 다름없다.


장을 다 보고 지트에 돌아왔는데도 지트 관리자가 아니 온다. 프랑소와즈, 쟝미셸, 그리고 나는 일단 방 배정이고 뭐고 샤워부터 하고 보자고 의견을 모은다. 샤워실, 식당, 주방, 그리고 공용 거실은 0층이고 침대가 있는 방은 1층에 몰려있다. 신발은 0층의 주방 계단에 벗어둔다. 1층 방 중 프랑소와즈와 쟝미셸은 안쪽에 있는 방, 나는 바깥쪽-계단에 가까운 방에 짐을 두고 0층 샤워실에서 샤워한다. 그리고 보람차게 빨래도 하고 주방에 연결된 유리 하우스 안의 빨래 건조대에 너는 것 까지 마친다.


장도 봤고, 샤워에 빨래 건조까지 마쳤는데 5시가 되지 않아 책도 보며 노닥거리며 식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쟝미셸이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게 끌려갔던 중국 위안부에 대한 영상을 보고 있길래 중국에 관심이 많은 지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쟝미셸과 프랑소와즈의 딸은 중국 리장에서 수년째 살고 있단다. 그래서 아시안들만 보면 왠지 관심이 가고 신경 쓰인다고. 그래서 나에게 더욱 관심을 갖고 신경 써 주었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때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 입구를 본다. 역시, 익숙한 목소리다 싶었는데 티보 키트리 말리스다. 걷기를 늦게 시작하더라도 항상 꾸준하고 많이 걷는 사람들. 반가운 마음에 애정 넘치는 인사를 나눈다. 티보 키트리 말리스는 이 지트 예약을 하지 않고 그냥 온 터라 지트 관리자는 대체 언제 오는지 궁금해했다. 그건 우리도 궁금해...  


그렇게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지트 관리자가 왔다. 만세! 각자 지갑과 크레덴시알을 들고 살롱 안에 놓인  테이블로 간다. 차례차례 지불을 마친 뒤 내 차례가 온다. 지트 관리자는 내 국적을 물어보더니 울랄라! 하고 놀란다. 그러고 나서는 여기 종종 한국인이 왔었다고, 어떻게 이 길을 알고 이렇게들 오는 건지 궁금하다고 말한다. 행복한 길이 되기를 하고 기원해 주신 뒤 도장 쾅.


나는 항상 다른 순례자들보다 이른 6시에 저녁식사를 먹곤 한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먹던 버릇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저녁거리로 사 온 고기 파이와 피자, 그리고 내가 갖고 있던 수프로 저녁식사를 때운다. 몸이 너무 안 좋았던 프랑소와즈 내외는 저녁을 하지 않고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거라며 나간다. 텐트 설치를 마친 티보, 키트리. 그리고 내가 자리 잡은 방 한켠의 침대에 짐을 두고 온 말리스도 주방으로 와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내가 피자를 데우고 식사를 할 때, 그들은 시끌시끌 한창 요리 중이다. 아무래도 저예산으로 많은 양을 먹을 수 있는 파스타를 할 모양이다. 티보 키트리 왈, 자신들이 아주 멋들어진 케이크를 사 왔으니 너도 꼭 한 입 하라고 그냥 도망가지 말란다. 내가 저녁식사하고 어디 갈까 봐 저 사람들이. 웃음이 비실비실 나온다.


티보 키트리는 내게 쟝의 안부를 묻는다. 티보와 키트리는 므와삭 이후로 쟝과 한 번도 연락해 본 적이 없단다. 나는 유심칩 기한이 다 되어서 와이파이가 되는 지트에서만 쟝과 연락을 할 수 있었고, 항상 데이터를 끄고 다녔던 쟝도 나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간간이 서로 어디에 있는지, 다친 곳이나 아픈 곳은 없는지 소식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쟝의 근황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일단 르퓌에서 시작한 순례자들 중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자들은 확실히 적은 데다, 노래도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인사해가며 넘치는 사교성을 자랑하는 젊은 순례자는 정말 드물어서 쟝은 젊은 프랑스인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순례자였다. 때문에 말리스도 쟝을 꽤나 궁금해하는 눈치이다.


쟝은 아직도 물집이 제대로 낫지 않아 아주 조금씩 걷고 있었다. 하루 10km 또는 20km 남짓, 몸이 허락하는 만큼 걷고 있다고 했다. 쟝과 헤어진 뒤 하루 30km는 기본으로 성큼성큼 걷는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키트리가 그럴 거면 아예 몽퀴에서 더 오랫동안 확 쉬고 걷는 게 나았을 텐데! 하고 안타까워한다. 내 말이 그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람 절대 내 말 안 듣더라고. 내가 시무룩해지자 키트리가 씩 웃는다. 


키트리가 나의 차후 일정을 묻는다. 실은 로카마두르 이후로 나의 일정은 꽤나 빡빡한 상태였다.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는 하루 30km는 기본이요, 종종 40km를 걸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내가 이 일정을 말하니 티보와 키트리는 너 미쳤단다. 인간이 괜히 버스와 기차를 발명한 게 아니라고. 조금 이용해! 뭐 어때! 하루 30~40km씩 매일 걸었다간 너 엄마 만나기 전에 네 무릎이랑 안녕하겠다고! 내 일에 이렇게나 열을 내주는 이 귀여운 부부를 어찌하면 좋을까. 고마워, 나도 내 상태 봐 가면서 결정해 볼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조용한 마을. 조그만 집들이 즐비어있고,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과 텔레비전 소리를 엿들으며 산책을 한다.



성당 옆쪽에는 이렇게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 있다. 이곳에 있는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지평선을 보았다. 저 멀리 불이 켜져 있는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운동하는 것도 본다. 더 멀리 공장 굴뚝의 연기가 뿜어 나오는 것도 본다.



산책을 마치고 지트로 돌아간다.


내가 묵었던 아테즈 드 베아흔의 공립 지트.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 보니 이 세명도 저녁식사를 마치고 케이크를 먹고 있다. 나에게도 한 조각 준다. 솔직한 맛의 촉촉한 쉬폰 케이크.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DMB로 드라마를 본다. 나에게도 함께 보자고 요청하지만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사양하고 책을 본다.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고 할 때, 창 밖에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말리스가 살금살금 방에 들어와 나에게 말을 건다. 소아, 지금 밖에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티보 키티의 텐트가 아직도 젖어서 안 말랐대. 우리 몰래 걔네들 이 방에서 재우면 안 될까? 마침 침대도 세 개나 비어 있겠다, 나와 말리스만 조용히 있으면 되겠네? 물론이지! 원래 이러면 안 된다.


이제는 티볼트 키트리가 아닌, 티보 키티로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된 친구들. 티보와 키티는 혹시라도 옆방의 프랑소와즈 내외를 깨울까 조심스레 들어와 인사를 한다. 티보, 자기 코 곤다고 소곤소곤 경고를 날린다. 이미 알고 있어 하고 웃음이 터지지만 크게 웃으면 옆방에서 깨니까. 모두 입을 막고 끅끅 웃음을 참는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서로 본뉴이 하고 인사한다. 여럿이서 함께, 즐겁게 잠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 모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