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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Feb 28. 2018

그것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29. 당신들과 걷는 길 - 중세의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나바헝스

10월 7일 토요일
GR65 Arthez-de-Bearn - Navarrenx 32,8 km


간밤에 우리 집 고양이인 씨옹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더랬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도착한 사진. 정말 보고 싶었다.

 

오늘도 무난하게 일어나 식사를 하고, 길을 시작한다. 프랑소와즈와 쟝 미셸은 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건지 내가 6시 반에 일어나 짐을 싸고 아침식사 준비를 할 때 이미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커피와 수프를 끓이며 쟝 미셸 부부에게 인사를 건넨다. 말리스와 티보 키티 부부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짐을 싸고 나가려고 보니 일곱 시 반. 그제야 먼저 일어난 말리스에게 인사를 건네고 길을 시작한다.


이제 산티아고까지의 거리를 나타낸 표지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테즈 드 베아흔에서 산티아고까지 820km. 절반 가까이 남았다. 

맨 왼쪽의 분홍색 공립 지트 건물을 뒤로하고

아침 길을 나선다. 

길을 나서고 있는데 점점 동이 터 오르고 있다. 계속 맑은 하늘만 보다 보니 서울의 미세먼지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다. 

이때쯤에서 겨우 깨달았던 건데, 작은 마을의 길들 중 순례길들은 어김없이 생쟉 혹은 콩포스텔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구름들과 하늘 빛깔의 조화가 내 머리 위에 펼쳐져있었다.

이렇게 날씨가 아름다운 날은 하루 종일 기분 좋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오후에 해가 정말 쨍하고 더울 확률이 높다. 행복한 마음과 동시에 걸음을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저 지평선 위에 동그마니 얹힌 아침 달이 아름답다. 안개가 자욱이, 융단같이 펼쳐져있다.

이제 슬슬 오르막과 내리막이 잦아진다. 어제부터 순례자들이 드디어 피레네 산맥의 윤곽이 보인다고 하며 설레 했는데, 피레네 산맥이 가까워지는 만큼 산악지형이 더 많아진다는 뜻 이리라. 숨차게 언덕길을 오르고 내려가려던 그때, 눈 앞에 그림같이 펼쳐진 늦가을 들판과 안개가 보여 잠시 숨을 고르며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정말 아름다운 순간들을 맞닥뜨리면 이게 지나갈 것이 너무 아깝고 슬퍼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나는 후에 슬픈 순간이 오면 곱씹어 볼 수 있도록, 이 멋진 순간들을 내 안에 더욱 많이 남기고 새길 수 있도록 그 순간을 좀 더 바라보는 것을 연습했다.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들판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이렇게 해가 쨍하고 떴던 게 무색할 만큼 한시간만에 안개가 자욱이 끼고 이슬이 온 들판에 서린다. 정말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날씨이다.

이제 정말 오르막 내리막 길이 잦아진다.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렇게 멋진 순간이 내 앞에 있었다. 저 멀리 나무에 그려진 GR마크는 어김없이 나에게 길을 알려준다.

길 왼쪽 공터에 좋은 글귀를 적은 패널이 즐비하다. 한 번 들어가 본다. 들어가 보니 아래와 같은 문구들이 주르르륵 담장에 달려있고, 순례자들이 쉴 수 있도록 낡은 소파 두어 개가 비치되어있다. 길 걸으며 한두 번 마주쳤던, 파리에서 왔다는 조금 도도한 젊은 순례자도 그곳에서 쉬고 있다. 나도 자리를 잡으며 한숨 돌린다.

평화는 항상 돈이 적게 들지.

이렇게 쨍 한 공터에, 까만 패널에 좋은 말들이 잔뜩 쓰여있었다. 그네도 하나 있다. 왼쪽 구석에 도도한 순례자의 초록색 가방이 보인다. 며칠 전에 만났던 크리스티앙도 한번 들여다보고 간다. 크리스티앙의 흥미를 그다지 끄는 공간은 아닌지 바로 봉 슈망 하시고 길을 이어 가신다. 염소가 나를 구경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다시 길을 이어갈 채비를 한다. 오늘 길도 결코 짧지는 않으니 어서 가자.

한참 동안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크리스티앙과 수다를 떨며 내려간다. 크리스티앙은 길이 끝나는 게 아쉽다며, 조만간 또 걸으러 올 거란다. 또 걸으러 올 수 있다면... 하고 바람을 담아본다.

소랑 눈도 마주치고.

낡은 집의 구조가 굉장히 신기해서 찍은 사진.

저 멀리 소들이 풀을 뜯고.

지평선에 푸르게 보이는 피레네 산맥. 빠리지앙 아가씨가 찍길래 나도 찍어보았다. 다 스러진 옥수숫대가 안타깝다.


마을 사이로 난 잘 가꾸어진 길을 파리지앙 아가씨와 한참 동안 걸었다. 파리지앙 아가씨는 알고 보니 나보다 일주일 먼저 길을 시작했단다. 대신 하루에 20km 남짓으로 적게 걸었다고. 그렇게 나바헝쓰에 도착하며, 서로의 지트 위치를 확인하고 안녕한다. 그녀가 예약한 숙소는 일본어도 가능하며 숙박비도 저렴한, 나바헝쓰에서는 꽤 인기 있는 숙소였는데 내가 예약하려고 전화했을 땐 이미 만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공립지트로 향한다.


나바헝쓰의 공립 지트는 관리자가 상주하고 있지 않다. 대신 지트에서 조금 떨어진 바에 가면 관리자를 만날 수 있고, 거기에 가서 체크인을 해야 한다. 나는 한참 헤매고 있다가 지트로 그냥 가 봤는데 지트에 있던 독일인 아주머니 순례단이 나에게 온갖 손짓 발짓으로 그 바를 알려주었다. 이 분들은 친절했지만 프랑스어도 영어도 거의 불가능해서, 당신들끼리 아주 즐겁게 다니셨는데 그게 꽤 부러웠다.

공립지트로 들어가는, 작은 안뜰.

나바헝쓰에 대해 안내하는 작은 박물관 같은 게 있었는데, 그곳에서 찍은 중세 의상. 흥미롭다. 


지트 관리자가 있는 바에서 지트 체크인을 마치고, 지트로 다시 돌아가 샤워 및 빨래를 마친다. 빨래를 널고 있는데 프랑소와즈와 쟝 미셸도 이 지트에서 묵는지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온다. 지트 관리자가 나이 또래별로 묶었는지 내 옆방이시란다. 그럼 내가 있는 방에 올 사람들은 누구지?


일단 나바헝쓰의 관광안내소로 가서 내일과 모레 지트 예약을 부탁한다. 이제 내일 Aroue, 모레 Ostabat 이렇게 이틀만 예약하면 더 이상 지트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글피에는 생쟝드피에포흐에 도착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바헝쓰의 직원분은 아주 친절하고 정답다. 안 그래도 오늘은 토요일이고 외국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관광객도 꽤 많아서 관광안내소가 분주했는데, 그녀는 따뜻한 미소로 지트 예약을 도와준다. 그녀가 예약을 해 주는 와중 기념품으로 맥주도 팔길래 찍어본다. 그런데 병당 4유로 50성팀이라니... 깔끔하게 포기한다.

관광안내소 직원분께 감사인사를 하고 장을 보기 위해 나바헝쓰 시내를 돌아본다.

나바헝쓰는 아주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는데, 마을 전체가 요새 안에 있는 모양이다. 전체 외곽은 내일 길을 떠날 때 둘러보기로 하고, 나는 성당과 마을 중심 광장을 보러 간다. 그 근처에는 반드시 마트가 있기 마련이니까.

출처 : http://www.france-beautiful-villages.org/files/photos_villages/Navarrenx-vue-du-ciel.jpg


성당에서 조금 빠지니 카지노 마트가 있어서 장을 보고 나오는데, 익숙한 목소리들이 뒤에서 들려온다. 역시 티보와 키티, 그리고 말리스이다. 이 사람들 느지막이 길을 걷기 시작해 항상 대여섯 시쯤 도착하더니,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비즈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어디서 묵는지 나에게 묻길래 공립지트라 답했더니, 자기들도 그 나바헝쓰 인기 지트 가려다 만원이라 예약 못해서 공립지트에서 묵는단다. 체크인할 바의 위치도 알려주고, 함께 지트로 향한다. 알고 보니 이 세명, 나와 같은 방이다. 지트 관리자가 요 네 명이 비슷한 또래라서(참고로 말하지만 그들은 나보다 네다섯 살은 족히 어리다) 같은 방으로 묶은 모양이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오늘 미리 성당에서 미사를 볼까 했는데, 빨래를 하던 말리스가 왜 일요일에 미사를 보지 않고 토요일에 보냐고 묻는다. 나는 일요일 미사 대신 종종 특전 미사(토요일)를 보곤 했는데, 이곳은 그런 게 없냐고 물으니 이 동네 성당에는 없단다. 그냥 토요일 미사는 토요일 미사라고. 그러면서 자기들 내일 주일미사 보고 늦게 출발할 건데, 함께 하지 않겠냐 한다. 나야 물론 좋지!


저녁식사를 먹기 전 혼자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데 샤워와 빨래를 마친 티보 키티가 바에 가자고 제안한다. 신나서 따라나선다. 오늘 이상하게 티보가 신나서 들썩이며 길을 걷는다. 오늘 티보 이상해... 하고 말리스에게 말을 거니 말리스가 바에 가 보면 알 거란다.


바에서 일단 맥주를 시키고 입가심 안주를 씹는데, 티보가 안절부절못한다. 그새를 못 참고 티보 번쩍 손을 들어 바 주인에게 묻는다. 저기, 제가 보고 싶은 경기가 있는데 그걸 틀면 안 되나요? 바 주인은 단호하게, 나는 그 경기 말고 이 경기를 보고 싶어서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말리스와 키티가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웃음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는데 도통 웃음이 멎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참 뒤에서야 이유를 알았는데 어이가 없어서.... 원래 티보 키트리 말리스는 하루 20~25km 남짓 걷는단다. 하지만 티보가 보고 싶은 경기가 오늘 있을 예정이었고, 그 경기를 보기 위해 (나처럼) 하루 30km 넘게 강행군을 해서 바가 많은 이 나바헝쓰까지 왔다는 거다. 말리스와 키티는 이렇게까지 억지로 많이 걸어서 그 경기를 봐야겠냐고 물었지만 티보는 단호했다고. 그래서 그렇게 그렇게 나바헝쓰까지 잘 왔는데, 모든 바 사장들이 다 그 경기가 아닌 다른 경기를 더 중요히 여겨서 틀어주지 않았고 이 바가 마지막 희망이었단다.


나도 어이가 없어서 한참 박장대소하는 키티 말리스에 동참했다. 끅끅 거리며 웃는 우리를 보며 초점을 잃은 티보, 그 산만한 덩치를 쭈그리고 앉아 읊조린다. 내가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 말에 우리들은 한참 더 횡격막이 당기도록 웃었다.


그동안 나를 위해 약도 챙겨주고 길잡이도 해주며 예약도 도와주었던 티보 키티 말리스에게 맥주를 쏘려고 작정했는데 이 칼 같은 말리스는 얼른 따라와 나를 제지한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 반반 하는 걸로 합의하고 평화롭게 지불한다. 시무룩한 티보를 질질 끌고 키티 말리스 나는 장을 마저 본 뒤, 지트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다. 우리 바로 전에 독일 아주머니 순례단이 휩쓸고 간 후라 주방이 꽤 더러웠지만 무슨 상관있으랴. 이렇게 신나는 것을.


오늘도 이 셋과 수다를 떨다 잠에 든다. 

내일은 느지막이 일어나 정오미사 드리고 떠나는 날이니 마음이 한결 느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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