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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r 02. 2018

드디어 아프다

30. 당신들과 걷는 길 - 발목을 접질리던 내리막

GR65 Navarrenx - Aroue 20,1 km
10월 8일 일요일


오늘은 조금 정오 미사를 드리고 길을 나서기로 한 날이라 여유 있게 일어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대 실패. 내 눈은 이제 여섯 시 땡 하면 떠지도록 프로그래밍된 것 같다. 천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냥 먼저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같은 방에서 자는 말리스 티보 키티는 아직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직 푸른 기운이 서려있는 창 밖을 보고 사진을 하나 담는다.


어제 사 둔 빵과 주방에 있던 커피로 아침식사를 한다. 독일 순례자 아주머니 군단은 아침 일찌감치 요란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계셨다. 나는 조금 이따가 출발하겠노라고, 봉 슈망 하고 인사를 건넨다. 독일 아주머니들이 나가자마자 어제 바에서 만났던 지트 관리자가 들어온다. 그녀는 지트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청소를 준비하신다. 꽤 이른 시간이었는데. 잠시 뒤 8시 반이 넘자 이제 본격적으로 순례자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신다. 그제야 일어난 티보 키티 말리스는 구시렁거리며 지트 관리자에게 좀 더 잘 수 없냐고 물어보았지만 지트 관리자는 칼같이 거절한다. 투덜대는 세명. 일찍 일어난 탓에 식사도 마치고 짐까지 다 싸 버린 나는 와이파이를 쓰고 싶어서 관광안내소 근처에서 시간을 때우겠다 하고 인사한 뒤 나온다.


관광안내소는 다행히 와이파이가 그럭저럭 터졌고, 그곳에서 SNS에 사진을 올리기도 하고 세상 소식을 보기도 한다. 세상은 잘 돌아가고, 가족들 친구들도 잘 지낸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은 화보도 찍고 활동도 계속 잘 한다. 어찌 하든 저찌 하든 잘 돌아가는 세상, 내가 날 제일 예뻐해 줘야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웹서핑을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한참 핸드폰을 하고 나니 두어 시간 정도 지났다. 미사까지 조금 시간이 남았지만 일단 성당 앞 광장으로 간다. 가 보니 티보 키티 말리스가 벤치에 앉아있다. 인사하며 다가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말리스는 말없이 나무 지팡이 손잡이 부분을 깎고 있고, 평소 떨어지면 무슨 일이라도 날까 찰싹 붙어있던 티보 키티는 서로 멀찍이 앉아 본체 만체다. 티보가 빵 좀 사 올게 하고 불쑥 일어나 간다. 키트리는 뚱 하니 앉아있다. 내가 말리스에게 입모양으로 '무슨 일이야?' 하고 물으니 말리스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답한다. 쟤네 싸웠어. 아... 


잠깐 시간을 두고 키트리도 티보 뒤를 따라간다. 둘이 멀어지니 말리스 말문이 터진다. 쟤네 종종 싸우는데, 곧 화해하고 나서 좋다고 달라붙을 거니까 그냥 두면 돼. 웃음이 난다. 어쩜 이리도 귀여운 커플일까. 말리스가 손잡이에 성모님의 모양을 새기고 있는 게 제법 괜찮다. 그 사이에 돌아온 티보 키티가 아직도 냉랭하다. 웃기지만 나도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말리스와 손잡이 조각을 주제로 수다를 떤다. 넌 미술도 따로 배우지 않았는데 조각을 꽤 잘하는데? 하니 말리스 얼른 받아친다. 오 전공자한테 칭찬을 받다니 영광이야. 이런 시답잖은 대화. 


한참 조각, 그리고 대학시절 수업으로 들었던 목공예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말리스 뒤편에 있던 티보한테 키티가 달려들어 폭 안긴다. 아주 사랑이 넘친다. 쪽쪽 거리는 요 귀여운 신혼부부를 두고 말리스가 나무 쪼가리들을 털며 말한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그제야 나도 소리 내어 히히 웃는다. 

키티, 티보, 그리고 말리스의 가방. 티보 가방 위에 바게트 두 개. 


미사 드리러 들어가니 티보 키티가 제일 앞자리로 나를 이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사양했지만, 조금 차가워도 친절한, 츤데레 같은 말리스가 내가 미사통상문 설명해줄게 앞으로 오라 하여 엉덩이를 뗀다. 미사는 역시 우리나라와 같아서 크게 어렵지 않았는데 일단 이 미사 시간에 동양인이 나뿐이라 꽤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신기한 눈빛, 혹은 이 사람 여기 왜 있는 거지 하는 눈빛 등등. 말리스가 순서가 다르냐고 물어서, 순서는 동일하고 단지 미사 음악이 조금 다르다 대답해준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 얼른 악수를 건네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고 내 눈을 피하는 할머니도 있어서 흥미롭다. 내가 두 손 모아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니 티보가 꽤나 즐거워한다.


미사가 끝나고 길을 나서려던 때, 성당 관계자,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티보 키티 말리스에게 차 한잔 하고 가라고 제안한다. 나도 초대하고 싶다고 한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성당 근처의 건물로 들어가 주스와 과자를 대접받고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한참 듣는다. 나바헝쓰가 과거 나바라 지역의 관문이었다는 이야기, 성곽이 세워진 이야기 등등.. 그 후부터는 프랑스어로 설명이 바뀌어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맥락은 모르겠지만 역사, 그리고 하느님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였는데 솔직히 지루했다. 내가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이 친구들의 얼굴을 살피는데 이미 티보는 하품하고 난리다. 키티는 이미 시선이 흐트러졌다. 말리스만 중간중간 적극적인 질문 공세를 이어가는 듯했지만 결국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 모두 K.O.


우리는 오늘 20km 남짓 아주 적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거리를 걸어야 했다. 네다섯 시간은 걸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심하게 길어진다 싶을 때 말리스가 적절하게 끊어주었다. 그렇게 다행히 우리는 성당 선생님의 엄청난 역사 이야기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내가 그 건물을 나오면서 밝은 표정을 짓자, 키트리가 우리 때문에 늦게 출발하는 것 아니냐며 미안해한다. 그러면서 소곤소곤, "저 이야기 지루하지 않았니? 우리한텐 정말 지루했는데 넌 어땠어?" 키티, 사람 다 똑같아하고 답하니 웃음을 터뜨린다.

이야기는 지루했지만, 과자와 주스는 괜찮았다. 맨 앞이 말리스, 뒤 왼쪽부터 티보, 키티, 선생님, 그리고 나.


떠나기 전 나바헝쓰의 성곽을 한 번 둘러보고 간다.

성곽 위에서 바라본 나바헝쓰 바깥쪽.

말리스.

결국은 화해했다.

티보가 신나서 사진 찍어준다며 내 카메라를 낚아챘다.

티보가 신나서 사진 찍자며 이상한 포즈로 다가와서 덩달아 이상한 포즈. 

저 멀리 성당 종탑이 보인다.

오늘 갈 길을 확인하는 말리스. 키티의 가방 위에는 항상 티보가 본 스포츠 신문이 꽂혀있다.

진지한 티보.

말리스가 카메라 보라고 했을 때 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한참 속도를 꽤 내며 걷는다. 작은 마을 한두 개를 지나는데 배가 너무 고프다. 마을 안에서 털썩 앉아 먹을 수 없어서 마을을 조금 벗어난 곳의 숲길에 자리를 잡는다. 빵을 갈라 버터를 바르고 햄을 끼워 넣어 먹는다. 나는 빵을 다 먹고 쿠키와 귤을 먹는다. 쟝을 만나고서부터는 본 마망 코코넛 쿠키를 사랑하게 되어서, 매일 본마망 코코넛 쿠키 서너 개씩 식후 디저트로 먹었다. 이게 본마망 쿠키 시리즈를 섭렵하게 된 계기. 그런 내 모습을 본 티보가 꽤 흥미로웠는지, 넌 정말 본마망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이야기한다. 만약 네가 외국에 가서 '확실하게 맛이 보장된, 그것도 네 취향에 아주 딱 맞는 음식을 발견하게 되면 그걸 자연스레 많이 사게 될 거야'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동물 우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 듣는 소리. 티보가 쉿! 하고 수다 떨던 우리를 조용히 시킨다.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서너 개의 형체가 부스럭 거리며 우리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가 계속 숨죽이며 있으니, 그 형체들이 저 멀리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노루나 사슴으로 보였던 동물 가족 6마리였다. 우리가 계속 지켜보는 걸 알았는지 이쪽을 계속 응시하면서 목표한 곳을 향해 재빨리 뛰어간다. 우와 진짜 신기해!! 서울 촌놈인 나와 파리 혹은 일드프랑스 촌놈인 말리스 티보 키티는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는다. 순식간에 사라진 동물가족. 우리는 그 친구들을 주제로 한참 또 수다를 떤다.

후다닥

뛰어가는 동물가족.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까, 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내 또래의 남자 순례자가 하나 다가온다. 일단 우리 또래 (우리라고 하기엔 티보 키티 말리스가 나보다 훨씬 어려 미안하지만) 순례자만 보면 반가워서 통성명을 하고 보는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본다. 이름이 요한이라는 프랑스인 순례자. 나보다 열흘 느린 9월 20일 르퓌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했단다. 빠르고 많이 걷는 거라 우리 모두 놀란다. 하루에 40km 남짓 걷는다고. 키도 몹시 크고 보폭이 넓어서 부러웠다. 


말리스, 티보 키티, 그리고 나는 오브락 지역에서 겪었던 지독한 추위와 비바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만난 요한에게 너는 어땠냐고 묻는다. 요한이 뭔가 대답하자 세 명이 엄청 놀라며 부러워한다. 내가 뭐라 말했냐 물으니 말리스의 신속 통역이 가동된다. 요한은 매일같이 맑고 쾌청한 오브락 고원을 보았다고. 뭐? 말도 안 돼, 엄청 부러워!!! 나도 뒤늦게 놀라며 부러워하니 다들 웃는다.


다시 걷기를 시작하는데 말리스와 키티가 걸음이 느려진다. 오르막이 더 잦아지니 그만큼 말리스와 키티가 점점 멀어진다. 내 앞에는 요한과 티보가 계속 꾸준한 속도로 걸음을 이어간다. 어느 순간 뒤에 말리스와 키티가 보이지 않는다. 티보, 말리스랑 키티가 보이지 않는데? 내가 말을 거니 티보가 걸음을 멈추고 잠깐 고민하더니 말한다. 소아와 요한은 먼저 가면 될 것 같아. 우리 전부 오스타밧 근처 지트에서 묵을 테니 또 만나겠지. 나중에 보자고! 나는 말리스랑 키티 챙겨 올게. 


그렇게 티보와 헤어진 뒤 요한과 나는 길을 이어간다. 영어가 수월하진 않지만 번역기와 단어 몇 가지의 도움으로 대화를 해 볼 수 있었다.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는 요한. 프랑스에서는 5주의 휴가를 쓸 수 있기 때문에 5주의 휴가 중 1주는 고향 집에서 보낸 뒤 르퓌로 이동하여 순례길을 걷고 있단다. 스페인에서 걸어본 프랑스길이 정말 좋았어서, 자신의 나라 안의 르퓌 길을 걸어보는 거라며.


서로의 걷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요한은 해가 뜨고 지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을 느끼기 위해 길을 걷는다 했다. 딱히 뭔가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 


아무래도 늦게 길을 시작해서 그런지 마을이 먼 느낌이다. 조금 지쳐가기도 한다. 내가 걸음이 조금 느려지고 말수가 적어지니 요한이 내 얼굴을 살핀다. 오스타밧이 조금 가까워질 무렵, 밭에서 저녁거리로 풀을 따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셔서 요한이 길을 묻는다. 이런 재밌는 우연이. 이 분이 요한이 묵을 지트의 주인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뒤를 따라 요한은 지트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할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5분 거리의 내가 묵을 지트로 간다. 언덕길을 내려가 길을 건너면 있는 곳. 요한이 묵을 지트를 빙 돌아 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소아! 돌아보니 콩동 지트에서 친해진 선생님 순례자! 그리고 독일 아주머니 순례단이 마당의 벤치에서 쉬고 있었다. 선생님 순례자는 담장으로 얼른 달려와 내게 말한다. 소아, 잘 걷고 있구나! 오랜만이야. 이 숙소 괜찮아! 너도 여기 묵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독일 아주머니들도 나한테 뭔가 반가운 인사들을 와글와글 건네셨는데, 다 독일어라 못 알아들었다. 내가 뭐라 말 하기도 전에 아까 인사한 지트 주인 할머니와 요한이 담장 안에서 나한테 인사를 한다. 그러면서 지트 주인 할머니, 선생님 순례자한테 웃으며 농담한다. 저 아가씨는 길 건너로 간다오. 저녁 먹으러 갑시다. 


요한, 선생님 순례자, 독일 아주머니들에게 두 팔 흔들어 인사하고 내리막길을 쭉쭉 내려간다. 그런데 이거 길이 좀 이상하다. 아까 요한이랑 할머니 따라가느라 밭으로 길을 들었는데, '길'로 가는 길을 모르겠다. 길로 가고 싶은데 철사로 낮은 담이 쳐져있어 그냥 넘기가 좀 그렇다. 그래서 잔디밭을 그냥 질러가는데, 발이 푹푹 들어간다. 

평화로워 보이는 잔디밭이지만 발이 푹푹 들어갔다.


꽤나 가파른 내리막, 푹푹 발이 빠지는 잔디밭. 방심하는 사이에 발목이 심하게 접질린다. 순간 억 소리가 난다. 오늘 귀찮아서 발목보호대를 안 했는데 실수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조금 무리했어서 다리 근육이 썩 좋지 않은데, 발목까지 삐고 나니 다리 앞쪽 근육이 아프다. 괜찮겠지.. 애써 무시하며 걷는다.


지트에 도착하니 다섯 시 반. 내가 꼴찌인 모양이다. 저녁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잊지 말라며 친절한 아주머니와 딸이 안내해준다. 방에 들어가 보니 일전에 스치듯 만났던 파리지앵 아가씨이다. 파리지앵 아가씨는 할머니 할아버지 순례자들 사이에 앉아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나는 해가 더 지기 전에 빨래를 널어야겠다 싶어서 얼른 샤워를 마친 뒤 빨래를 한다.


곧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식사시간이다. 짤막하게 인사들을 나누고 식사를 한다. 같은 테이블의 아저씨 두 분은 리옹 근처 도시의 요리사라고. 그러면서 요리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맛이 어떤지 두런두런 이야기하신다. 내 바로 앞에는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아저씨. 내가 멋진 나라에서 오셨네요, 하고 인사를 건네니 그냥 볼 것 없는 나라라며 시큰둥하시다. 그러면서 나에게 하는 질문. 남한은 거의 미국에 의존해서 사는 것 같은데, 너의 의견은 어때? 하하하 그런 주제 좋아하시는구나..^^


괜찮은 식사, 약간 골치 아픈 대화들, 처음 보는 한국인이라며 나에게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지는 프랑스 할머니 할아버지들 덕에 꽤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전식.

본식. 

후식.


저녁에 다리가 더 아파와서 한국에서 가져온 진통제를 두 알 먹는다. 발목을 구부리는 것이 조금 어렵다. 걸려온 쟝의 전화에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몸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진다. 신기하게도 아무데도 안 아프고 물집 하나 안잡혀서 신기하다 했는데, 드디어 아프다.


내일모레 생장에 도착하고, 글피에는 피레네를 넘을 텐데. 나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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