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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r 05. 2018

자! 불러봐요

31. 당신들과 걷는 길 - 모두 함께 노래 부르던 저녁식사

10월 9일 

GR65 Aroue - Ostabat 24,9 km


같은 방에서 자던 파리지앙 아가씨가 일곱 시가 넘어도 곤히 자고 있길래 조심조심 가방을 질질 끌고 나와 짐을 싼다. 그리고 준비되어 있는 식사를 한다. 이곳에서는 커피나 차, 혹은 쇼콜라쇼를 아침에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면 무료이다. 대신 직원분들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챙겨 먹으면 된다. 카페오레를 한잔 마시고 쇼콜라쇼 한잔 더 마실까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할아버지가 석 잔째 마시는 것을 보고 용기 내어 한잔 더 뽑아본다. 이곳에서는 모두 일찍 일어나서 다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때 주인아주머니가 들어오시고, 그 뒤에 순례자 하나가 따라 들어와 빵 하나와 파테 한 캔을 사 간다. 이어서 어제 멋진 요리를 해 주셨던 주방장 아주머니가 출근한다.

오늘 오스타밧으로 가는 길을 단축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지도. 맨 오른쪽이 내가 간밤에 묵었던 Aroue,  맨 왼쪽이 오늘 목표로 하는 Ostabat. 저렇게 제안해주신 대로 하면 3.5km 남짓 줄일 수 있다. 이제 웬만하면 길이면 지도를 보고 파악해서 길을 찾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 한 달 넘게 잘 걸어온 순례자가 되었다. 

오늘 묵을 지트 설명 맨 마지막 줄 빨간 글씨로 되어있는 것, chants basques au repas...

식사 때 바스크 노래가 있을 거라니.. 대체 뭘까.... 예약을 내가 정해서 했지만 걱정이 된다. 


Aroue는 그래도 버스가 다니는 텅 빈 시골마을. 이 곳에서 길을 잘 못 들 뻔했지만 무사히 길목을 잘 찾아간다. 저 멀리 요한이 보여 걸음을 빨리 해 그를 따라잡는다. 요한과 평화롭게 인사를 나눈다. 요한은 오늘 생쟝까지 간단다. 꽤 먼 거리인데 어떻게 갈 수 있어?라고 내가 놀라며 물어보니 요한은 하루에 40km 정도면 무리가 아니고 가뿐하다 한다. 요한은 너의 친구들, 그러니까 티보 키트리 말리스는 어제 늦게 도착해 늦게 잤고, 자신이 출발할 때까지 자고 있더란다. 내가 그들은 거의 그래, 하고 답하니 요한이 아마 스페인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텐데... 빙긋 웃으며 읊조린다.


한동안 요한과 이것저것 이야기한다. 기계 엔지니어인 요한은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조선 그리고 반도체 산업에 흥미가 많은지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내 전공은 그쪽이 아니라 답을 잘 해줄 수 없어 아쉬웠다. 자연스레 어떤 일을 했는지 대화가 이어진다. 요한은 내가 일하고 있던 회사의 근무환경을 듣더니 몹시 놀라워한다. 그러더니 당장 프랑스로 오라고, 그렇게 일 하는 자세라면 프랑스 어딜 가든 일을 구할 수 있을 거라며 농담을 던진다. 


생쟝까지 가야 하는 요한. 아무래도 걸음을 더 빨리 해야 오늘 저녁에 생장에 도착해 계획한 차편을 탈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렇게 요한과 인사를 한다. 너의 길이 평안하길 바라. 

날씨는 쾌청하고, 이제 더 많은 산들이 보인다. 피레네가 정말 코앞이다.

처음 보는 듯한 순례길 안내 표지판.

그림 같은 언덕길.


나는 Stèle de Gibraltar를 가지 않고 오스타밧으로 바로 가는 것을 택한다. 그렇게 지름길로 가다 양 떼를 만난다. 순간 배가 고파와 식사 거리를 꺼내어 밥을 먹는다. 식사는 여느 때와 같이 꺄르푸에서 사 두었던 샐러드 캔, 그리고 버터 바른 바게트 반쪽, 그리고 본 마망 쿠키들과 오렌지 하나.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바욘 아저씨가 이건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내 핸드폰을 가져간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며, 몹시 이쁘다며 연발하는데 난 가끔 이 유럽 아재들의 미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자니 많은 순례자들이 지나가며 인사들을 한다. 이제 얼굴들이 다들 익은지라 다들 나를 한국 아가씨 이렇게 부르며 본아페티 하고 인사해준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안에서는 길 걸으며 좋았던 것이, 식사를 하고 있으면 모르는 이들이라도 꼭 본아페티 인사하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순례자들도 너무 많고(프랑스길 및 내가 걸었던 기간 한정!) 다들 바에서 먹어서 그런지 들판에서의 식사와 본아페티 인사가 좀 적어졌던 것 같다.

점심식사를 먹고 길을 이어간다. 프랑스어와 바스크어가 병기 표시되어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 마을이 Stèle de Gibraltar 대신 지나갔던 마을이다. 나는 이 마을을 구글맵에 표기해두고 행여라도 내가 길을 잃을까 이정표로 삼았다.

조용한 마을, 아름다운 개울가. 가금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도 만날 수 있다.

심술궂지만 또 시선 한두 번 던져주던 소와 인사도 하고.

다리가 아파와 잠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평화로운 언덕과 그 위에 토핑처럼 얹혀있는 나무들과 집들. 

한적한 목장 사이를 가로지르는 흙길. 나는 흙길을 사랑한다. 아스팔트 길이나 시멘트길은 무릎이 아파와서. 딱딱한 길을 걷게 되면 꼭 가장자리의 풀 위를 밟거나 일부러 흙길을 찾아가곤 한다. 대신 비가 오면 신발은 좀 더러워지지.

이제 피레네 산맥이 정말 뚜렷하게 보인다.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길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지.

저 멀리 형광 조끼를 입은 나이 든 모녀가 걸어간다. 한동안 거리를 두고 계속 같이 걸어간다. 아마 나와 목적지가 비슷하리라.

저 멀리 양 떼가 보인다.

갑자기 숲 사이의 돌길이 나와서 짜증내며 찍은 사진. 주의를 기울여 걷지 않으면 발목을 접질리기 십상이다. 어제 삔 뒤로부터 아프기 시작한 발목은 걸을 땐 감각이 없다가도 갑자기 '야 너 아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라고 말하는 듯 가끔 신호를 보내온다.

낡은, 버려진 차 하나

이게 오스타밧. 내가 예약한 지트는 오스타밧 마을에서 1.2km 정도 벗어나 있어서 좀 더 걸어가야 했다. 오스타밧 도착할 때가 오후 한두 시쯤이었는데, 너무 덥고 그늘 한 점 없어서 정말 힘들었던 터였다. 그래서 이 곳의 바에서 맥주 한잔을 하며 숨을 돌렸다. 마침 다른 순례자들도 한 잔 하고 있길래 인사한다. 귀걸이를 하고 있던, 멋쟁이 프랑스인 커플 순례자들이다. 이어서 바욘 아저씨도 온다. 너 어떻게 나보다 앞에 있냐며, 자신이 분명히 너 밥 먹는 걸 보고 지나왔는데 너 날아왔냐고 농한다. 당신은 가벼운 점심식사도 한 시간 넘게 하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더 먼저 온 걸 거예요.


시원하게 맥주를 비우고 지트를 향해 간다. 분명히 1km 남짓인데도 목표 마을을 찍고 더 걷자니 왠지 길이 더 길게 느껴진다.

마을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길로 간다.

이제 생장이 얼마 남지 않았다. 4시간 45분만 더 걸으면 생쟝이란다. 걸음이 빠른 요한은 훨씬 전에 이 길을 지나갔겠지

안녕 소들.

내가 묵었던 지트. 상당히 언덕 위에 있어서 조금 올라가야 한다. 많은 건물들이 있는데, 지트 건물은 더 안쪽, 더 위쪽에 있다. 

지트에서 보는 풍경은 아주 아름답고 좋다. 저 멀리 피레네 능선들이 보이고, 그 앞에는 목장들이 카펫처럼 펼쳐져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파노라마.


순례자 일과인 샤워 및 빨래를 하려는데 아까 함께 맥주 마셨던 멋쟁이 프랑스 커플이 들어와 옆 침대에 자리 잡는다. 인사를 나누고 순례자 일과를 마친 뒤 평화롭게 뒷마당의 긴 의자에 누워 핸드폰을 한다. 맥주도 한 잔 해볼까 하고 가격을 보니 꽤 세다. 호텔을 겸하는 곳이라 그런 건가... 콜라 하나를 사들고 와 갖고 있던 쿠키로 간식을 한다.


한동안 프랑스 시골길 사진들을 SNS에 올리고 있으니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가 연락을 해 왔다. 친구와 앞으로 어떤 걸 할지 이야기도 하고, 그녀가 하고 있는 공부 관련된 이야기도 나눈다. 생각할 거리가 늘어난다. 이 지트는 꽤 인기 있는 지트인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어오신다. 어떤 프랑스 할아버지가 살짝 그늘진 자리에서 늘어진 내 모습을 보더니, 마치 적절한 온도를 찾아 자리 잡는 고양이 같다며 웃는다.


걱정했었던 저녁식사시간이다. 내 앞에는 말 수가 적어 보이는 독일 아저씨, 옆에는 말수가 없지만 그래도 수다스러운 독일 아줌마 순례단, 그리고 뒤에는 정말 엄청난 대화량을 자랑하는 프랑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독일 아저씨는 아무래도 이 사람들 중 내가 가장 조용할 것 같아 내 앞에 앉은 것 같다. 정말 이 저녁시간은 엄청났다.


일단 이 지트 사장님이 꽤 유명한 노래를 불렀는지, 프랑스 테이블에서 더 크게 따라 불렀다. 사장님이 따라준 아페리티프는 분명 도수가 낮은 음료수 같은 와인이었는데 다들 고량수 댓 병은 마신 듯, 몹시도 업 되어있다.

진지하게 노래를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이야기하는 사장님ㅋㅋㅋ


사장님이 바스크 노래 한 소절 하면 모두가 한 소절 따라 하고, 따라 하지 않으면 그 사람과 아이 컨택해가며 꼭 따라 하게 하신다. 나도 억지로 웅얼웅얼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노래를 불렀다. 웃프다는 상황이 이런 걸까. 더 신난 프랑스 테이블에서 정말 계에에~~속 노래를 부르다 독일 테이블+나 쪽에도 토스를 한다. 독일 아주머니 순례단은 성가 하나를 불렀다. 크리스마스는 한참 남았지만 예수 탄생 성가였다. 이제 시선은 나와 독일 아저씨에 쏠린다. 선수를 쳐야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 수 있어..!! 비장하게 노엘을 부른다. 정말 다행히도 성가는 멜로디가 같아서 내가 한국어 가사로 1절을 부르니 각 테이블에서 자신의 나라 언어로 2절을 부른다. 멀리서 보면 이런 난리도 없겠다. 그래도 노래는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지라,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독일 아저씨 빼고. 그다음 차례가 독일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졌을 때, 타이밍 좋게 전식이 나왔다. 

아주 시끌벅적하게 잘 먹고, 나와 독일 아저씨는 먼저 빠져나온다. 이도 닦고 빨래도 걷고 왔는데 식당 쪽에서는 아직도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평화롭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듯했는데 새벽에 팔이 너무 가려워 깨고 말았다. 옷을 걷어보니 두드러기가 온 팔을 다 덮었다. 설마 베드벅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수백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횟수로 문 건 아니겠지?!! 핸드폰 랜턴을 켜서 침대와 침낭을 뒤집고 침대 밑과 프레임도 꼼꼼히 확인해봤는데 벌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닭살 돋듯이 올라온 두드러기. 맛이 썩 나쁘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에 두드러기가 돋은 걸까. 발목은 더 부어오르고, 두드러기는 난리도 아니고. 피로가 누적되서인지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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