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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r 06. 2018

드디어 생쟝

32. 당신들과 걷는 길 - 안녕, 그리고 안녕

10월 10일

GR65 Ostabat - Saint-Jean-Pied-de-Port 22,7 km


드디어 생장에 가는 날.

아침식사 시작할 때에는 바깥이 새카맣게 어두웠다. 간밤에 잘 잤냐는 독일 아저씨의 질문에 내 팔을 보여주니 몹시도 놀란다. 생장은 좀 큰 마을이니까 꼭 약국이라도 방문해보렴 하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안부를 나누고 있는데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 순례자들이 하도 감탄을 해서 창밖을 보니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율이 느껴지던 아름다운 일출.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려고 한다.  이 날 묵었던 사람들 중 단체 순례자와 2인실 이용자를 제외한, 도미토리 묵었던 사람들에게 금액을 알려주려고 주인아주머니가 적은 쪽지. 독일 아저씨가 sn. germany라고 적혀있는 게 신경 쓰인다. 이 와중에 제일 위에 적혀있는 내 이름은 스펠링 하나하나 정확하다. 이스마엘씨는 나와 대화 한번 하지 않았던 아저씨. 베로니크와 프란시스가 그 멋쟁이 프랑스인 커플이다.

지트 앞에서 신발끈을 다시 꽁꽁 맨다. 발목이 점점 부어올라 정강이까지 붓기 시작해서, 발목 보호대를 더욱 단단히 찬다. 이 지트에는 고양이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사람들이 떠나는 와중에도 와서 혹시라도 간식이라도 줄까 봐 앵겨든다. 제일 힘센 놈은 도도하게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우리를 멍하니 보다가 딴청을 피우기도 하고.

고운 눈망울

이내 딴청

고양이들이 귀엽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둘기 모양 오브제도 있고.

지트를 내려가는 언덕길, 해가 동그랗게 떠오를 때 엷은 베일 같은 안개가 땅 위를 덮는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출 시간. 이렇게 예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내 길이 되어간다.

생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선명한 붉은색의 덧창과 지붕, 그리고 지주목들로 구성된 집들을 볼 수 있다.

지나간 안개 때문에 작은 이슬방울들이 들판을 덮었다. 그 위를 햇살이 강렬하게 비추어 이슬방울들이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사진을 찍기 전, 실은 부어오른 발목과 정강이가 정말 아파서 잠깐 멈춰 서 있었다. 그때 멋쟁이 커플이 와서 괜찮냐고 물어본다. ça va? 수백 번은 들었을 그 싸바? 에 항상 싸바 혹은 비앙 트레비앙 하고 답해왔는데 도저히 그 비앙,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엊그제 발목을 삔 게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아, 나아질 것 같았는데. 하고 답하니 영어와 프랑스어가 거의 반반 섞인 초스피드 조언들이 쏟아진다. 대충 알아들은 말은 생쟝에 가면 병원이나 약국이 있을 테니 꼭 가보라는 것. 아마 내가 다른 순례자들을 만났어도 비슷하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일단 감사를 표하고 먼저 가라고 인사한다. 잠시 숨을 돌리니 괜찮은 듯해서 계속 길을 이어간다. 그래도 오늘은 먼 길은 아니니까 스스로 안심시키면서.

그래도 하늘은 높고 풍광은 멋지다. 오르막 내리막은 싫지만 나는 확실히 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좋다.

이제 슬슬 생쟝피에드포흐 이름이 곳곳에서 보인다.

찻길로 가면 위험하니까, GR길은 잠깐 동안 찻길을 따라 났다가 다시 목장 사이로 난 길로 이어진다.

하느님은 멋진 화가가 틀림없다. 이런 일필휘지.

저 멀리 산과 산 사이에 안개구름이 내려앉아 자리 잡은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었다. 이 곳은 바 bar이기도 했는데, 다른 지트나 바처럼 편하게 들어가기에는 조금 내려앉은 구조라 약간 마음이 꺼려졌다. 그래서 좀 더 가서 차 한잔 하기로 마음먹는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려앉은 안개구름

마을을 끼고 걷는 길.

이제 정말 생쟝이 가까워진다.


아직 10시 남짓이라 밥을 먹기에는 좀 그렇고 차를 한 잔 하고 싶었더랬다. 화장실도 가고 싶고. 마침 셩브흐도트가 하나 보이길래 들어가 커피를 한잔 요청하고 화장실을 이용한다. 커피 한 사발 하고 있는데 요 며칠 전에 만났던 파리지앙 아가씨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내가 차 마시던 곳에 닭들이 그렇게 주위에 꼭꼬곡꼭 거리며 맴돌고 있었는데, 닭들이랑 티타임 중이냐며 농을 한다. 자기는 오늘이 마지막 길이라며, 아쉽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즐거웠다고 마음이 조금 쓸쓸해지는 인사를 하며 먼저 길을 나선다.


드디어 생쟝이라며 좋아했는데, 오늘 안녕 하고 인사해야 할 순례자들이 꽤나 많은 것이 떠올랐다. 많은 이들에게 생쟝은 길을 시작하는 곳이지만, GR65를 걷는 이들에게 생쟝은 길을 끝내는 곳이기도 하니까.

양 떼다 우와 하고 걷고 있는데 파리지앙 아가씨가 저만치 앞에서 멈추어있다. 보니까 다른 할아버지 순례자가 초콜릿을 꺼내어 그녀에게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건넨다. 먹는 것은 거절하지 않는 법. 일단 받아서 먹으며 인사를 나눈다. 할아버지 순례자는 파리지앙 아가씨와 같은 날 길을 시작하신 분. 나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분은 나를 종종 만나셨단다. 아무래도 나는 여기서 몇 안 되는 동양인 순례자였어서 더 눈에 튀었을 수도 있을 거고, 게다가 나보다 좀 전에 혼자 걸으셨던 킴이라는 다른 여성 순례자분이 계셔서 많은 이들이 그분과 나를 혼동하시기도 하셨다. 뭐 날 알고 계셨다면 좋은 거지! 잠시 수다를 떨고 다시 길을 이어간다.

순례자를 주의해야 한다.


한참 오르막 내리막을 걸으며 아 다리 아파! 하며 징징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들린다. 아...! 역시! 미국 캐나다 스위스 3인방이다. 진짜 오랜만이야 잘 걷고 있구먼?! 하고 시끌벅적하게 인사를 하고 함께 길을 걸어간다. 그동안 대체 어디서 묵었길래 코빼기도 안보인 거야 쏘아! 진짜 시끄러워서 웃음이 나온다. 너희야말로 대체 어디서 묵은 거야...

내가 발목이 썩 좋지 않은 걸 눈치챈 3인방 중 한 명이, 자신도 콩동 이후부터 다리 안 좋아서 한동안 느리게 걸었고 지금도 이 3명 중에 가장 느리게 걷는단다. 꼭 자주 쉬어주고 괜찮다면 어디서 하루 이틀이라도 꼭 쉬라고. 내가 엄마 만나러 레온까지 열심히 가야 한다고 말하니 너의 의지에 맡기겠지만 몸을 굳이 깎아먹어 가며 길을 억지로 걷진 말라고 조언해준다. 내 나이의 딸이 있다더니, 진짜 엄마 같다.

소를 조심해야 하는 구역이다. 3인방 중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아저씨.

소를 조심해야 하는 구역이야 하고 아저씨랑 농담하는데 왼쪽에서 말 두 마리가 길에서 뛰어다니다가 언덕 쪽으로 올라가는 걸 보았다. 캘리포니아 아저씨 왈, 이거 소 지우고 말 그려야 되는 거 아니야? 쏘아 너 그림 잘 그리지? 뭐야 진짜ㅋㅋㅋ

빨간 집들 사이에 초록 집이 예뻐 찍어봤다.

마을 사이의 길을 지나고

오래된 성이 보여서 한번 찍어본다.

생쟝 직전의 가장 큰 마을, 생쟝르비유 Saint-Jean-le-Vieux. 진짜 한시간만 걸으면 생쟝피에드포흐이다. 성당 근처의 마을 광장에서 시끌벅적 3인방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하겠다 한다. 오후 1시, 생쟝까지는 한 시간. 그냥 걸을까 하고 고민하다 그냥 마을 광장 벤치에 앉아 갖고 있던 바게트, 파테, 버터와 오렌지로 점심식사를 한다.

이 고속도로를 바로 따라가면 생쟝으로 가겠지만, GR길은 항상 마을 사이나 숲 쪽으로 안내한다. 안전하기도 하고.

생쟝에 들어가기 직전, 마을 어귀의 성당이 보인다. 잠깐 들러 감사기도도 한다.

드디어, 생쟝으로 진입한다.


확실히 큰 마을이긴 큰 마을이다. 큰 도시 혹은 마을은 도착하기도 전에 집들이 자꾸 나타나서 순례자 마음을 설레게 한다. 생쟝도 마찬가지이다. 300미터 정도 남은 곳에 있는 이정표에서 설레는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어본다.

생쟉 성곽으로 향해 올라가야 구시가지, 그러니까 순례자들이 길을 시작하는 생쟝드피에포흐 구시가지가 나온다.

구시가지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생쟝드피에포흐 전경. 저 멀리에는 큰 도시로 오가는 역도 있을 게고, 학교도 있을게다.

드디어, 마을 성곽 입구로 들어간다.

L'entrée des pélerins, 순례자들의 관문. 왠지 마음이 두근두근 댄다.

한 달 동안 잘 걸었다. 이제 한 달 동안 더 잘 걸어야지.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장을 받기 위해 순례자 사무실로 향한다.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사무실은 조금 비어있고, 내 앞에 누가 봐도 한국인들로 보이는 두 분이 보여서 괜히 들썩인다. 스페인어만 가능한 봉사자가 스페인어 가능하면 내가 처리해 줄 수 있어! 하고 인사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스페인어는 불가능하다. 기다리면서 내 가방 무게를 한 번 재 본다. 헉... 13kg.... 혹시라도 다른 봉사자들이 보고 혼낼까 봐 얼른 숨긴다. 몸무게의 10%가 이상적이라고 하는데 대체 이게 몇 kg야 하고 혼자 빵 터진다.


순서를 기다리다 드디어 내 차례! 오늘 길을 시작하냐고 물으시길래 내 순례자 여권을 내민다. 르퓌에서 산 순례자 여권 앞면은 르퓌에서부터 받은 도장들로 빼곡했다. 나는 그 뒷면의 첫 번째 칸에 도장을 부탁드렸다. 봉사자 할아버지는 오 너는 이미 충분히 걸어왔구나! 그러면 내 순례길 조언들은 그렇게 많이 필요가 없을 수 있겠구나~ 하며 씩 웃으신다. 그렇게 도장 쿵. 드디어 프랑스 안에서의 GR65길의 끝이 보이는 기분이다.


봉사자 아저씨께 알베르게 지도를 하나 받고, 내일 오를 피레네의 지도를 하나 받아 인사를 하고 나서려던 참이었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쏘아! 하고 나를 부른다. 맙소사, 신경 안 쓰는 듯 하지만 제일 나를 신경 써주고 살갑지 않지만 은근히 반가워하던 선생님 순례자이다. 선생님 순례자는 나에게 다가와 찐한 비즈부터 하신다. 잘 걸었다고, 고생했다고. 그 말을 듣는데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순례자 사무실 안에 있던 봉사자들 표정들이 참 흐뭇하다. 선생님은 오늘이 마지막. 여기서 도장을 찍고 하루 묵은 다음 내일 집으로 돌아가신단다. 돌아가서 자신의 여행에 대해 글 쓰던 걸 마무리하고 책을 내실 거라고. 그러면서 네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아름다운 순례길이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겠단다. 마음이 미어진다.


한국인이 정이 넘친다고들 한다. 길을 걸으면서 느낀 건 '한국인들'이 정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서로에게 정답다는 것. 그 인간들이 한국인이어서 그렇게들 말하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이 길에서 나는 정말 정이 넘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선생님 순례자와 인사를 하고 알베르게로 향한다. 나는 한국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서, 그런 한국사람들을 제일 많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55번 알베르게 선택했다. 이런.. 이 55번 알베르게는 내가 입성한 성곽 입구 바로 앞에 있었다. 내려왔던 내리막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55번 알베르게에 들어간다.


버릇처럼 순례자 여권만 내밀었는데 직원이 내 여권이 필요하단다. 프랑스에서는 굳이 여권을 확인하는 절차가 없었는데, 이 생쟝부터는 거의 모든 알베르게가 여권을 요구하고 여권 번호까지 적어갔다. 아, 다르다. 느낌이 확 다가왔다.


짐을 두고 씻은 뒤 빨래를 마친다. 네덜란드 당신 집부터 걸어왔다는 순례자와 인사도 하고, 일본에서 왔다는 약간은 소심해보이는 유스케와도 인사를 한다. 그 뒤 마을을 한 바퀴 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알베르게로 돌아가는데, 왠지 한국인처럼 보이는 분이 식당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고 계신다. 그분,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영어로 말을 거신다. 아니 왜.. 이제 난 드디어 국적을 잃어버린 건가! 내가 한국말로 저 한국사람인데요 하니까 소스라치게 놀라신다. 소스라치게 놀랄 건 없잖아요 히히. 그게 H와의 첫 만남이었다. 잠시 회사 휴가를 내어 이 먼 곳까지 왔다는 H, 잠시 서로의 이야기를 하다 함께 장을 보러 간다. 나는 이 동네 꺄르푸가 어디 있는지 몰랐는데 H가 길을 알려준다며 함께 나서 준 것.


함께 꺄르푸에 가서 장을 봐 온다. 가는 길에 반갑게 곤니찌와 하는 아저씨가 있길래 곤니찌와 해준다. 이제는 농 쥬쒸꼬헤엔느 하는 것도 귀찮아... 니하오 하면 니하오 하고 곤니찌와 하면 곤니찌와 한 지 좀 됐더란다. 아마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그 느낌이란 것이 있다. 이게 진짜 반갑게 인사해보고 싶어서 하는 건지, 아님 호기심에 그냥 던져보는 건지. 호기심에 던져 보는 사람들에게는 무시가 답이요,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짧게 답 해주거나 혹은 나는 한국인이에요 우리는 안녕하세요 한답니다 하고 긴 버전으로 답해주거나.


장을 보고 성곽을 따라 올라오는데, 저 멀리 익숙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와! 티보 키티 말리스이다!!! 너무 반가워서 비즈 하고 난리를 친다. 오늘 좀 멀리서 출발했는데 이왕 걷는 것 생쟝까지 가 보자고 해서 늦은 오후까지 내리 걸었단다. 그렇게 서로 반가워서 찍은 사진.

티보 키티 말리스는 자신들 이따 저녁에 미국 캐나다 스위스 3인방에게 아페리티프 초대받았다고, 함께 가잔다. 페이스북 메시지 줄 테니 오라고, 신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니 H가 없어져있다. 아무래도 H가 우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도망간 것 같았다.


이제는 지트가 아닌 알베르게. 알베르게로 돌아가 보니 또 다른 한국인들이 와 있다. Y와 L, 절친한 친구 사이로 보였다. H와 Y, L은 하얗고 반짝반짝해서 정말 한국인 같았고, 나는 태평양 어딘가의 섬 원주민 같은 빛깔의 얼굴을 절절히 자각할 수 있었다. 어찌 됐건 정말 오랜만에 한국말로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눌 수 있어 정말 반갑고 행복했다.


아까 티보 키티 말리스와 약속한 시간이 되자, 말리스와 키티에게서 동시에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들이 알려준 알베르게로 가자 미, 캐, 스 3인방과 티보 키티 말리스가 이미 빙 둘러앉아있었다. 나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함께 와인을 땄다. 그동안 걸어왔던 길들, 그리고 앞으로 걸을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럴 땐 확실히 미래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지.


미, 캐, 스 3인방은 우리에게 궁금한 게 많았던 모양이다. 말리스는 워낙 좋은 학교를 다니고 좋은 회사에서 인턴도 해서 취업이 보장되어있지만, 프랑스임에도 불구하고 9 to 9인 근무환경이 걱정되어 이 일을 시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란다. 티보 키티야 신혼여행 중이고, 이 길을 끝내면 마다가스카르를 갈 거니까. 나는 길을 끝내고 엄마와 이베리아 반도를 돈 뒤 공부를 좀 더 할 것 같다고 답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이 스위스 아주머니, 자신의 아들과 말리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근위병으로 근무하고 있다는(난 잘 몰랐는데 선발 요건이 꽤나 까다롭단다) 잘생긴 큰아들을 말리스와 연결해주고 싶어서 아주 열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말리스는 농담에 강력한 여자. 적절히 농담으로 받아쳐가며 슬슬 곁눈질을 해 가며 티보 키티에게 무언가 압력을 주고 있었다. 눈치 빠른 키티, 우리 얼른 밥 먹으러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리스도 동조한다. 나도 인사를 하며 나온다. 스위스 아주머니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캐나다 아주머니는 내가 어머니와 순례길 걷는 걸 걱정하며, 나에게 신신당부한다. 어머니는 끝까지 어머니야. 친구 같은 어머니든 깐깐한 어머니든 말이야. 그걸 항상 기억하면 너의 순례길은 평화로울 거야.


아까 H와 저녁 식사하려고 했다가 약속을 취소할 뻔한 것을 떠올리고 H와 식사하러 갈 작정을 한다. 티보 키티 말리스는 하루 이곳에서 쉬고 길을 이어갈 예정이란다. 나는 엄마와 만나기 위해 좀 더 길을 재촉한다. 우리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서로 진하게 비즈를 나눈다. 안녕, 소아. 안녕 얘들아.


H와 다시 만나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한다. 갈리시안 수프, 적절한 메뉴 구성.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미, 캐, 스 3인방과 마주쳐 인사를 나눈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 별이 알알이 박힌 프랑스의 밤하늘을 본다.

알베르게에 돌아와 보니 프랑소와즈 쟝미셸이 내 침대 1층과 옆침대에 앉아있다! 꽤 오랜만이라 세상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당신들은 피레네는 차마 못넘겠어서 내일 택시 서비스를 이용할거란다. 이제는 농담이 수월해진 쟝미셸 아저씨. 인간 문명의 진보인 택시 안에서 널 보면 두 팔 흔들어 인사해주겠노라며 뿌듯해한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그동안의 길을 복기한다. 혼자, 당신, 그리고 당신들과 걸어온 르퓌 길. 이어서 나는 내일부터 '프랑스길'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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