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반갑고 외로운 길 - 아닌 밤중에 논쟁을 벌인 주비리
10월 12일
프랑스길 Roncesvalles - Zubiri 21.5km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리가 더 많이 부어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비몽사몽으로 세수를 하고 나오는데 남자 하나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뒤돌아보니 남자화장실이었다. 헉. 아침일찍이라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H의 조언에 따라 발목보호대를 다시 꽁꽁 싸매고 배낭을 부쳤다. 다행히도 아직 배낭을 부치는 트랜스포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배낭을 부치고 가볍게 걸으려고 나서는데 어제 같은 55번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유스케도 다리를 절며 나온다. 너도 배낭 부치고 걷는구나! 잘했어! 서로 동병상련의 눈으로 인사를 나눈다.
알베르게에서 나와 아침 식사하러 가는 길. 밤하늘의 별이 알알이 박혀있는 것이 아름답다. 똑딱이 카메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진을 찍어둔다.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뒤 H와 Y, L,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왔다는 스페인 아주머니 이렇게 총 다섯이서 길을 나선다. 스페인 아주머니는 어제 H, Y, L이 사귄 친구. 야심 찬 과거의 나는 오늘 라라소아냐까지 가려고 했지만 그냥 다른 사람들 가는 만큼만 가기로 한다. 다리가 아프니 걷는 것에 욕심도 적어지고, 그냥 엄마를 만나러 가야 하는 날만 잘 지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 천천히 걸어볼까.
론세스바예스에서 다음 마을까지 가는 길은 어둑한 숲길. 걸음이 빠르고 힘찬 Y와 L이 앞서서 길을 밝혀준다. 프랑스에서는 항상 동이 트고 나서 출발했는데 스페인에 오고 나니 모두 새벽부터 경주를 하듯이 길을 나서는 것 같다.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순례자들이 이미 출발했거나 출발하려는 참이다. 해도 뜨지 않았는데. 불현듯 늦잠 자고 늦게 출발하던 티보 키티 말리스들이 생각난다.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 오브락 고원으로 향하던 새벽, 까마귀 밭이던 숲에서 무서워서 벌벌 떨던 이야기를 해 주니 웃겨한다.
공식적인 GR65길은 끝났지만 곳곳에서 GR 마크를 만날 수 있었다.
어제 알베르게 가던 길에 만나던 한국인 아저씨 F도 만난다. 진짜 프랑스길을 걸으니 한국사람을 잔뜩 만나게 되는구나.
1500km로 시작했던 게 어저께같은데.
저 멀리 먼저 걸어가는 Y의 모습.
이 마을은 빨간 문들이 많았다. 창문의 위치가 흥미로움.
가끔 만날 수 있는 GR마크.
많은 스티커들이 다 자기 할 말 하느라 참 시끄러운 패널.
개인적으로 나는 프랑스길 첫째 날 많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 사진 왼쪽 구석에도 볼 수 있는, 화장실 휴지 때문에 말이다. GR65길을 걸을 땐 사람들이 마을 공공화장실이나 바에 딸린 화장실들을 이용해서 그런지 길가에 X휴지가 있는 것은 못 보았던 것 같다. (X휴지는 여러분이 연상하시는 바로 그 단어이다. 그 단어. X) 그런데 정말 거짓말같이 프랑스길로 넘어온 후부터 나는 길가에서 수많은 X휴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X의 흔적이 그대로 보이게 버려져있는 것도 너무 자주 보아서 속에 메슥거릴 정도였다. GR65에서보다 더 많은 화장실들이 있고 더 많은 바와 레스토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째서 길에서 볼일을 보는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더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만, 그러기엔 프랑스길에는 편의시설이 충분히 넘쳐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길에서 나는 지린내에 가끔 숨이 턱턱 막힐 때도 있었다. 동물들의 냄새가 아니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프랑스 오브락 고원에서 맡았던 거대한 소똥 밭에서의 냄새나, 바스크 지방에서 맡았던 양 떼 밭이나 소 농장의 냄새와는 다른, '인간' 화장실에서 느낄 수 있는 지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생장에서 시작한 많은 순례자가 길을 시작한 행복감과 기대감에 차 있을 때, 나는 이놈의 지린내와 X휴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점이 있다면 프랑스 길에서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르퓌길에 비해 반의 반으로 준다. 화살표가 너무 많아 여러갈래로 헷갈리게 표시되어 있을지언정, 그 많은 길 표시들을 잘 따라가기만 하면 결국 다 만나게 된다. 또 유명한 길이니만큼 길 자체가 걷기에 좋게 잘 닦여 있어서 수많은 자갈이나 거친 지형에 고통받았던 내 무릎은 프랑스길에서 좀 더 편해진다.
이러나저러나, 가방을 부치고 걸으니 몸이 이렇게도 가벼울 수가 없다. 걸음이 빨라진다. 아무래도 한 달 동안 내내 걸어온 구력이 있어 그런 모양이다. 아픈 다리인데 날아갈 것 같다. 길도 깨끗해서 훨씬 걷기 수월하다. 아직은 걸음이 느린 일행과 자연스레 헤어지고 혼자 길을 걷는다. 그러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아들이 있다는 한국인 아주머니 Z를 만난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걸음이 느려서 새벽 6시에 출발하셨단다.
아주머니 Z와 나는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함께 주비리에 도착한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 12시 무렵이다.
나는 내가 가방을 부친 알베르게에 그냥 묵기로 하고, 아주머니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갈 공립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알베르게에 잘 배송된 내 가방을 챙겨 침대에 자리 잡는다.
곧 방에는 다른 순례자들이 차례차례 도착한다. 오늘이 스페인의 무슨 공휴일인지, 스페인 순례자들도 사방에 보인다. 곧 남자 순례자 하나가 알베르게로 들어오는데 뒷모습이 쟝과 비슷해 한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인사를 했지만 이 남자는 유디. 독일에서 왔다는 유디는 순례길을 자주 걸었단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그러면서 나에게 왜 이 길을 걷는지 물어본다. 그냥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서라고 꽤 진부한 답변을 했다. 왠지 이 사람과는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어서 이정도면 그냥 넘어가겠다 싶어서 한 대답이기도 하겠다. 그러자 유디 하는 말.
이 길 걸어서 돌아볼 자신이라면 이미 집에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과 쟝이 비슷하다 생각했다니.. 쟝에게 미안해진다.
기분이 살짝 안좋았을 그 때, 우연히 C 언니와 맥주 한잔 하며 기분을 풀 수 있었다. 맥주 하고 있으니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침대 아래층을 썼던 아르날도도 와서 한자리 차지하다 간다. 내일 먹을거리와 오늘 저녁거리를 간단하게 사서 돌아와 식사를 한다. 몽펠리에에 살며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미국인 찰스와 이야기도 나누고, 엄마 따라 순례길에 끌려 온 미곌과도 인사하고. 바르셀로나에서 왔다는 카탈루냐 아가씨들과도 인사를 하고 다리를 마사지하고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카탈루냐 아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 유디가 말을 건다. 귀 기울여 듣지 않았지만 뭔가 한잔 하자고 하는 것 같았다. 아가씨들 냉랭하다. 유디가 나한테 물었던 것처럼 이 아가씨들에게도 왜 길을 걷는지 묻자 친구들끼리 함께 추억 쌓으려고 걷는 거라고 대답한다. 좋겠다... 하고 부러워하며 침낭 안에서 웅크려 잠을 청하려는데 유디의 한마디가 또렷하게 들린다.
"난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야. 정치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지."
음.. 아나키스트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이미 정치에 관심이 많은 거 아닌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문제가 많은 카탈루냐 사람들한테 그러지? 이때 한창 카탈루냐 독립 문제 관련해서 투표니 유혈시위니 하는 긴급 뉴스가 쏟아지던 때이기도 해서 더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독립을 원하니?라고 유디가 이 아가씨들에게 묻자 아가씨들은 그렇단다. 그러자 유디 왈, 너희들은 어렸을 때부터 세뇌당한 거야. 다 정치인들의 속셈 안에 놀아나는 거라고. 정치나 권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야. 그냥 신경을 끄고 사는 게 좋아. 너희들도 이 참에 아나키스트가 되어 보는 건 어때?
와 뭐래 정말. 내가 다 화가 난다.
그러자 이 카탈루냐 아가씨들, 잔뜩 얼굴이 빨개져 논쟁을 시작한다. 우리도 투표를 해서 의견을 결정했다. 우리들의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일방적으로 우리 의견을 무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위를 진압하는 방식이 더 평화롭길 바란다 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방에 카탈랸이 아닌 에스파냐 사람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침낭 안에서 꼬물거리던 나도 일어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유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도저히 이야기가 안 통한다. 너희들 그게 바로 시간낭비라니까. 어차피 다 힘이 있는 사람들 맘대로 돌아가게 되어있어, 그냥 포기해! 그리고 인생을 즐겨.
여기서 포인트는 유디도 그렇게 영어를 아주 능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카탈랸 아가씨들은 정말 영어인지 카탈루냐어인지 모를 단어들을 던져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은 밤 9시 반. 다리도 붓고 아프고 힘들고 졸린데 이 인간들 도저히 잘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이 안타까운 논쟁의 시간... 10시 바로 직전, 결국 열 받은 나도 그 논쟁에 동참하고 말았다.
유디, 일단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겠어. 혹시 너희 나라에서 너 투표를 하니? 응 해. 그러면 적어도 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고 있는 사람이겠네. 나는 카탈루냐 사람들이 어떤 걸 원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고 이 친구들의 의견이 전체 카탈루냐 사람들의 의견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아니야, 대부분의 카탈랸은 독립을 원해. 음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거지. 한국에서는 정치에 관심이 없던 젊은이들도 전 대통령 탄핵(impeached라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나 고생했다) 사건을 계기로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투표의 중요성도 절실히 깨달았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유디가 얘기했던 '힘이 있는 사람들'이 정말 전부 자신의 몫으로 가져버린다고 생각해. 적어도 이 친구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너도 그런 사람으로 보여.
또 나는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ㅇㅇㅇ주의자, ㅇㅇㅇ사상을 가져라 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형태의 폭력이라고 생각해. 나는 사람을 때리고 피를 흘리게 하는 것 말고, 지금 네가 하는 것처럼 원치 않는 걸 권하는 말도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냥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있구나 하고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너 다양한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한다며. 그러니 여기서 만난 이 친구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해 이 정도 의사표시만 하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있잖아, 지금 많이 늦은 시간이야, 곧 10시가 된다고. 순례자들은 잘 시간이지. 이제 잠자리에 듭시다.
열 받아서 그런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말한 것 같았다. 예전에는 문법이 맞는지 아닌지 신경 써 가며 이야기했는데 저 말들을 하며 틀린 문법이고 뭐고 일단 말하고 보았던 것 같다.
내 따발총 같은 말에 유디랑 카탈루냐 아가씨들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며 유디 말한다.
너 할머니냐 벌써 자게.
갑자기 카탈루냐 아가씨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카탈루냐 아가씨들은 내 이름을 묻고 통성명의 시간을 가진다. 나와 카탈루냐 아가씨들은 먼저 잠자리에 들려던 참에 타이밍 좋게 미곌과 미곌의 어머니가 들어온다. 유디가 불을 끈다.
오래간만에 전투하듯 이야기해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속은 시원하다. 어찌 됐건 저 유디란 녀석이랑은 얽히지 않는 게 좋겠어.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에겐 천사, 누군가에겐 악마가 될 수 있는 법. 유디는 후에 다른 이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