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카페트 위에 엎드려있다. 거실 화분 속에서 기어나온 검은 개미 두 마리가 뽀르르르 지나간다. 눈으로 따라가다, 멈칫 선 개미를 손가락으로 직- 짓눌러 죽인다. 남은 한 마리가 황급히 돌아 도망치지만, 잠시 머뭇거리다 나는 다시 같은 짓을 한다.
옆에 누인 하얀 핸드폰에서 알람이 두번 울린다. 띵, 띵. 누군가의 생일을 알리는 소리와 언젠가 내가 댓글을 쓴 글에 누군가도 댓글을 달았다는 소리. 두 개체의 생명을 앗은 그 손가락으로, 다시 그 알람들의 확인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종료 버튼을 누른다. 습관적으로 카카오톡에 들어가 친구목록을 살핀다. 업데이트 됐다는 친구의 프로필 사진을 한번씩 훑어보고, 인연의 끝에도 사인이 있다면, 자연사한 인연들의 얼굴에도 한번씩 눈길을 두어본다, 물론 역시 그 무심한 손가락으로. 좀전의 생일 알람이 신경쓰여 페이스북을 살펴본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친구들의 글이 늘어선 그의 타임라인을 스쳐지나가듯 살피고 괜히 찝찝해져 내 친구목록을 살펴본다. 이 목록은 이제 거의 인연의 시체들만 나열된 목록인 것 같다. 헌데 보고싶지 않다. 그립지않은 이별들의 목록. 헛헛한 기분이다. 더이상 보고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영영 잊혀진 사람들, 그게 참 다행이다 싶다.
결국 무의미한 관계들이다. 경조사 챙기기와 안부 인사들이 이제는 진심을 덜어낸 스킬이 되어버려, 만남이 피곤한 관계들이다. 이 카페트 옆을 지나다가, 내가 소파 밑으로 밀어내버린, 개미 시체들과 같은 인연들이다. 이런 죽어버린 관계들과 인연들에 지쳐 하나하나 마음을 덜어내다보니, 열 손가락으로도 넉넉히 세어낼 정도로 좁아져버린 내 인간관계지만, 나는 만족스럽다. 내 이 관계들에는 어떤 시체 냄새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몇 되지는 않지만 그리운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진심을 담아 그들의 탄생에 감사하고 그들의 어떤 한걸음을 함께 해주고 그들의 안녕을 바라고 나의 안녕을 전하고, 싶다. 그렇게만 살고싶다.
헌데 또 어떻게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 세상은 미묘하고 복잡한 곳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생일 축하글 하나에도 어쩜 그리 큰 의미가 생기는지 싶지만, 댓글 하나에도 어쩜 그리 큰 의미가 생기는지 싶지만, 우리 관계라는 것의 형태가 이제 그러하다. 난 또 피곤한 얼굴로, 이제 아마 지문이 닳지 않았을까 싶은 손가락으로, ㅋ과 ㅎ이 난무하는 행복한 관계에 사는 듯한 축하글을 써낸다. 어쩌면 작은 보험이자 계산이겠지만, 이렇게 난 한 인간으로서 해야할 도리를 하나 지켰을 것이다. 내 작은 범주의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아 전하기도 하는 일이니, 어려울 일도 아니다.
개미 한 마리가 또 지나간다. 이번엔 그냥 지나가게 냅두었다.
하나의 예의인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뭐 앞으로 영영 안봐도 내 삶에 큰 변화가 없을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관계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이어져있다면 이런 정도의 성의는 표시해주는 것. 조만간 끊어질지라도 사람이 사람과 이별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어야 할 매너. 이젠 하나의 예의인 것 같다. 작은 귀찮음과 피곤함을 참아주고 ‘우리의 관계는 그래도 꽤 소중했습니다'라고 전달하는 하나의 표현으로 난 그들에게 작은 안부와 작은 축하를 종종 전하곤 한다. 나에게 이런 예의를 베풀어주는 인연들에게 내가 고마움을 느끼듯 그들도 마찬가지일꺼라 믿는다. 가끔은 용기를 내야하기도 하지만, 용기낸 만큼 그들이 내가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그런 용기에서 내가 상처받더라도, 상처받은 만큼 그들이 결국 끊어질 인연일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간의 예의를 지켰다.
예의없이 보고싶은 사람들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