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희망함은 진부하지만 아름답다.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 작가 한강은 그의 작품 ‘흰’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삶이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앞으로 한 발씩 내딛는 것이라고. 내가 지금 내딛을 땅이 투명한 땅일지, 아득한 허공 일지 모르는 채로 우리는 한 발을 내딛는다.
사실 우리는 시간에 계속 등 떠밀 리면서, 시간을 따라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시간에 얽매인 서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이 투명한 벼랑에 끝에서 한 발자국을 다시 또 내딛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산다. 이러니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 ‘불안’이라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내민 발에 딛는다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까지, 살아보지 않은 시간이 살아온 시간이 되는 그 찰나의 순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내일에 대한 불안이 없진 않을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나. 그런데 우린 사실 매일을 불안해하면서 살진 않는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온 시간의 끝에서 살아보지 않은 시간으로 들어서는, 살아보지 않은 시간이 살아온 시간으로 들어서는, 불안한 순간의 연속이 우리 삶이다. 그러나 불안해하기보다, 이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가 갱신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정성껏 무모하게 살아간다. 전혀 모르는 세계로 항상 한 발씩 들어서는데, 그 한 발 내딛는 것이 온전한 삶일지, 어쩌면 허공에 떨어지는 결말일지 전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인지 매일을 불안 속에 살지만은 않는다.
우리는 때론 본질처럼 불안하고 비관하고 의심하고 하면서도 순간순간 행복하고 사랑하고 희망차며, 검고 희고, 빨갛고 파랗고, 축복처럼 다채롭게 산다, 축복처럼. 그 이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시간에 따라 강제되는 그 한 걸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불안하지 않기 위해 우리 내부에 강요되었을 희망,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믿을 수 있기에 사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믿어야만 사는 것이다. 이 강요된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그 ‘불안’이라는 본질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내일이 온전하기를 기대하며, 더없이 무모하게, 우린 믿는다. 내일을 알 수 없음에도 철저하게 시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에서, 내일을 믿는다는 것은, 철저히 강요된 희망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희망은 강요되는 것이다. 희망하지 않을 수 없도록, 어쩌면 악독한 희망고문.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희망할 수 있어 다행이다. 이 잔인한 투명함 속으로 던져지면서, 그 불안 속으로 던져지면서,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난 오늘도 내일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