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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pr 07. 2020

 라디오를 듣다가


 ‘사연을 듣고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를 듣고 차를 갓길에 세우고는 펑 울었습니다. 저처럼 누군가를 떠올리신 분들, 모두 힘내시길 바랍니다.’


 모든 이별노래가 당신 얘기인 것처럼 들렸던 날들처럼

누군가는 어떤 이별노래, 그 슬픈 노랫말 속에서 한 사람을 잡아두고 있기 마련이다. 


언젠가의 첫사랑일 수도 있고, 영영 사랑할 것 같은 누군가이기도 하고 영영 사랑할 것 같던 누군가이기도 하다. 이들의 위상은 매순간 달라지지만, 그들이 모든 걸 제치고 찾아가게 만들거나, 다 이룬 꿈을 포기하게 만들고, 보고 있더라도 눈물이 난다거나, 다른 괜한 핑계로 울게 만드는 이유가 됨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보면, 강렬한 이유인 그들은 꼭 그만큼 강렬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일상 속으로 금세 사라진다. 이 증발이 슬픔인지 기쁨인지는,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는 것이, 사실 사라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하나의 서정으로 의미부여된 순간들이 그 슬픈 노랫말들 사이마다 터져나온다.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마주한다. 허공에 마음을 걸어둔 듯하다. 이것들은 다시 한 순간의 서정으로 흘러간다. 지나간만큼 미화된 기억들이 어디선가 솟아나오고 다시 어디론가 흘러나가고를 반복한다. 그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제멋대로의 물리법칙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그 사람은흐릿해져간다. 드디어 조금씩 조금씩. 


이별이란 것은 빵 한 덩어리를 한 웅큼씩 떼어 삼켜내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한 덩어리를 겨우 다 삼켜내고 나서야 이별이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별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동사의 과정에는 큰 착각이 있다. 어디론가 흘러갔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 단지 가라앉아 있었을 뿐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푹 가라앉은 미숫가루 탄 물을 탁 하고 흔들면, 화를 내듯 솟구치는, 춤추는 수만 개의 별들을 닮은 가루들이 그 맑은 물을 어둡게 만들어간다. 참 제멋대로다. 그렇게 선명하다가도 순간 흐릿해지고 그렇게 잊혀진 것 같다가도 다시보면 전혀 잊혀지지 않았다.


언젠가 가라앉아있던 것이 한 순간 흔들려 다시 새로워진다. 흘려보내고 싶지만, 미숫가루와 다르게 이 동사, 이별의 경우에는 그 가라앉음의 물리법칙이 흰 우유조차 맑게 침전시키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제멋대로의 물리법칙’ 이기에 전혀 흘러가질 못한다. 도무지 가라앉지 않고 물 따라 흘러갔을 것 같은데, 하얗게 침전되어 있다. 흘러갔다고 생각했지만, 간절히 붙잡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흘러가지 않음은, 순전히 흘려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데, 노랫말을 가득 채우던 그 사람은 어디론가 흘러간 것이 아니라 잠시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고, 그것은 한 사람이 간절히 붙잡아 두고 있는 결과인 것이다. 한번 흔들면 춤추기 시작할 것이다. 


  라디오에서 한 문자메시지를 읽어주더라.


 ‘사연을 듣고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를 듣고 차를 갓길에 세우고는 펑 울었습니다. 저처럼 누군가를 떠올리신 분들, 모두 힘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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